184화. 베갯머리송사 (11)
“진작에 데려올 것을.”
예결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그를 끌어안으며 침상 위로 무너뜨린 하량이 사제의 어깨에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뭐라도 말을 해 보렴.”
가슴과 맞닿아 있는 사내에게서 전해지는 나직한 울림이 사뭇 스산했다.
“여기가, 여기가 정말…….”
예결은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십만대산이다. 네가 있는 곳은 일월신교의 성지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천마의 거처, 청형전이지.”
그는 가만히 하량의 몸을 밀어냈다. 몸을 일으킨 예결은 침상 곁으로 난 창밖을 바라봤다.
중원에서는 본 적 없는 형식의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좀 더 돌이 많이 쓰인 편이고, 물길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평화로웠다. 사막 저편에서는 보기 힘든 화려한 색의 꽃이 피어 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바투 다가와 등 뒤에 몸을 붙이고 있던 사내는 예결이 느끼는 이질감을 알아챘는지 속삭였다.
“마음에 안 드니?”
“아뇨. 아뇨, 그냥 처음 보는 꽃이라.”
“원한다면 곤륜처럼 꾸며 주마.”
하량이 선뜻 제안했다.
“눈을 가져다가 뿌리고…… 빙공을 익힌 자들을 모아 서늘한 기운을 흩뿌린 뒤 진법 안에 가두면 눈 덮인 산의 풍광을 만드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아. 꽃을 다 들어내고 나무를 심어야겠구나.”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는 음성에서 즐거움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예결은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나 대사형이 쉬이 물러날 사내는 아니었다.
“손이 차가워.”
하량은 예결의 손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말했다.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지?”
예결은 슬쩍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하량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우형이 섬세하지 못해서…… 결이 네가 겁을 먹은 모양이야.”
조심스레 끌어다가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는 사내는 정말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상냥했다.
그 모습에 예결은 제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는 걸 느꼈다.
‘진짜 왜 이래.’
지금 울었다가는 대사형이 오해할 텐데,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말을 듣질 않는다.
“이런. 결국 울려 버렸구나.”
하량이 혀를 찼다. 그는 옷소매를 끌어다가 예결의 눈가를 훔쳤다.
“괜찮아. 괜찮을 거다. 처음이 힘들지…… 금방 적응하게 될 거야.”
그는 울지 말라는 말 같은 건 입에 담지 않았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고개를 돌린 예결은 젖은 뺨을 한 채 하량에게 물었다.
“왜, 다 내 탓이라고 그렇게 원망하지 않았어요?”
원망 대신, 대사형에게 목이 졸린 적은 있다. 하나 당시의 하량은 약에 취한 채 악몽 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 외에는 밉다는 말 한 마디 들어본 적 없다. 원망하는 기색도 눈치채지 못했다. 예결의 온 신경은 언제나 자신의 가이드를 향해 기울어 있었기에, 하량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면 반드시 알아챘으리라.
“음…….”
하량은 이런 질문을 받으리라는 건 예상치 못한 사람처럼 잠시 미간을 좁혔다.
“지난 스무 해 동안, 원망 같은 건 정말 많이 했단다.”
예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증오하고 절망하고. 정말 질릴 정도로 말이다.”
악몽에 시달리던 하량이 제 목을 조르던 게 생각이 났다. 그에게서 휘몰아치던 가이딩은 예결을 두 번째 죽음의 문턱까지 데려갔었다.
“그러니 이젠 조금 다른 걸 하고 싶구나.”
예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다가온 하량이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입 맞췄다.
“아, 읏…….”
숨을 쉴 도리조차 없이 밀려드는 혀가, 그의 탐욕스러운 접문이 예결의 생각을 앗아갔다.
연정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고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예결은 차마 하량을 끌어안지 못한 채 늘어뜨린 팔을 파득였다.
“살아서,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 다오.”
예결이 바라 마지않는 말이었다.
내내 부추긴 그 마음이 지금 제 손에 들어와 있었다. 그럼에도 예결은 감히 손아귀를 틀어쥘 수 없었다.
너무 뜨거웠다. 이대로면 델 것처럼.
“주군. 공 가주가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득, 밖에서 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혀를 찬 하량이 아쉽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예결은 대사형에게서 멀어지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안도를 느꼈다.
“수혈을 짚어놓긴 할 생각이지만…… 그 전에 깰 수도 있으니.”
하량은 예결의 입에 무언가를 물렸다. 촉감은 천 같았는데 감촉은 부드러워도 제법 질겼다.
능숙하게 그걸 예결의 머리 뒤로 묶는 사내는 그리 잔혹해 보이지도 않았고 두렵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같은 천으로 예결의 손까지 꼼꼼하게 묶은 대사형은 그를 침상에 매어놓았다. 새삼 본인이 대사형의 손에 억류당해 있음을 실감한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애당초 얼마든지 반항할 수 있었는데도 유순히 몸을 맡기길 선택한 건 바로 그 자신이었다.
“금방 돌아오마.”
예결의 뺨을 상냥하게 두드린 남자가 그를 힘주어 끌어안고는 괴롭다는 듯 물러났다.
아쉬움을 갈무리하는 사내는 당장에라도 방을 나설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량은 우뚝 멈춰 선 채 예결을 내려다봤다.
“행여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손을 뻗어 자신이 묶어놓은 사제의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린 하량이 말했다.
“혀를 깨물어도 죽지 못할 거다.”
재갈을 물린 이유를 알게 된 예결의 눈이 커졌다.
누굴 부르려는 걸 막으려고 한 게 아니라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머리를 벽에 박아서 깨도 죽지 못할 거고.”
예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손목을 긋거나 목을 매도, 어떻게든 독을 먹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온갖 자살 방법을 거론하면서도 하량의 눈은 무감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을 가정해 놓고도 그게 현실이 될 거라 생각지 않는 게 느껴졌다.
“실패할 거란다.”
단정적인 어조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왜, 왜 그런 걸 알려주는 거지?’
예결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하량을 바라봤다.
‘내가 정말 그런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하도록 내버려 뒀다가 살려내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나?’
결과를 미리 아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 사건에 도달하는 건 느낌이 다르다. 전자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면 후자는 사람을 겁에 질리게 만든다.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상황에 부닥치면 사람은 포기한다. 저항의 싹을 뿌리부터 뽑아버리기 좋은 상태가 되는 거다.
재갈이 물고 있는 사제의 입술에서는 숨소리조차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예결의 눈에 서린 의아함에 하량은 그 마음을 읽었다는 듯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사술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예결의 대사형이 다정하게 웃었다.
“……그중 네가 겪을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아.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게 재갈을 문 예결의 입술 사이로 스며 나왔다. 하량은 이를 못 들은 척, 그를 조심스레 침상에 눕혀주고는 소곤거렸다.
“착하지? 되도록 빨리 올 테니 얌전히 기다리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사형이 예결의 수혈을 짚었다.
요 며칠 사이 익숙해진 어둠이 내려앉는 걸 느끼면서도, 예결은 필사적인 시선으로 하량의 뒤를 쫓았다.
이런 순간에조차 결코 다정을 잃지 않는 사내의 뒷모습은 예결이 아는 그 무엇보다도 낯설었다.
모든 지표가 하량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는데도, 예결은 처음으로 그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가지 마요.’
가지 마.
***
예결은 눈을 떴다. 머리가 이상하리만치 뜨거웠다.
또 꿈을 꿀 거라고 생각했다. 요 며칠 사이 잠이 들 때마다 과거에 겪었던 사건이 그에게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결이 누워 있는 곳은 여전히 십만대산에 있는 천마의 거처, 청형전이었다.
“흐…….”
몸을 둥그렇게 말며 예결은 허리를 들썩였다.
‘왜, 왜 이렇게 더운 거지?’
예결은 본인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굳이 따지자면 당서악 때문에 미약에 중독되었을 때와 비슷했다. 다만 한순간에 차오른 열기가 그를 말라 죽게 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점진적으로 차오른 성감에 익사할 것 같았다.
‘그땐 상황이 특수했던 거고, 에스퍼는 어지간하면 약에 중독되지 않는데, 대체 왜?’
사고를 이어가려 해도 머리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몸에 지펴진 열기가 머리꼭지까지 치밀었기 때문이다.
코끝에 하량이 피우던 연초의 냄새 같은 것이 스쳤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만 천마가 된 이후 내내 이 공간을 사용했을 대사형의 체향에 발정이라도 난 걸까.
아니 아무리 에스퍼라도 그렇지, 가이드의 향을 맡기만 해도 이렇게 돌아버리진 않는다.
보통은 그랬다.
‘하필, 하필 이런 때.’
예결은 손톱을 세워 침상 바닥을 긁어내렸다.
“아흣……!”
발정 난 짐승이 된 기분이다. 하반신에 몰린 열기를 해소하지 않으면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다는 착각이 그를 몰아갔다.
예결은 무의식중에 야금에 대고 하반신을 비볐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재갈이 물려 있으니 저 밖에 있을 누군가에게 대사형을 불러달라고 할 수도 없고, 두 손이 묶여 있으니 혼자 스스로를 달랠 수도 없다.
그런데 머릿속은 자꾸만 부옇게 변하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흐윽…… 흐윽…….”
허벅지를 좁히고 어떻게든 다리 사이를 비비며 절정을 유도하려 했으나 별로 소용은 없었다. 뒤가 간지러웠다.
앞만으로는 절정에 도달할 수 없다. 항상 하량이 아쉬움 없이 뒤를 채워주었기에 예결은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대사형은, 대사형은 언제 오시는 거지?’
부연 시야를 놓지 않으려 애쓰며, 예결은 낑낑거렸다. 재갈 때문에 벌어진 입가에 타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예결은 엉엉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