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베갯머리송사 (15)
십만대산에 사제를 데려오고 고작 하루째다. 그런데 벌써 예결은 중독되어 앓고 있었다.
적이나 그 어떤 위험한 사건에 휘말려서가 아니라, 고작 하량이 잠을 청할 때 쓰는 약 때문에.
“삼랑 네 생각에는 이 아이가 십만대산에서의 생활을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하량은 예결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물었다.
“음…… 글쎄요.”
주군의 애틋한 음성에 삼랑은 흘깃 예결을 내려다봤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하량이 묘사하는 것처럼 가냘파 보이긴 했다. 실제로도 연약하긴 할 것이다. 일반인치고는 체력이 괜찮은 편이지만 어디 무림인을 따라올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의원으로서의 제 소견을 묻는다면 예. 입니다.”
하량이 그녀를 바라봤다.
“주군께서 쓰시는 약은 거의 독에 준할 정도로 강합니다. 무인이라도 독에 내성이 없다면 쉽게 당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문 공자가 앓아눕는 것도 크게 이상하거나 많이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열이 제법 올랐는데?”
하량은 어젯밤부터 안고 있던 예결을 보며 물었다. 까무룩 기절한 후에도 열이 내려가지 않아 삼랑을 부르고, 예전에 곁눈질로 익힌 빙공을 동원해서 예결의 몸을 식혔다.
그러고 몇 시진이나 지났는데 아직 평소의 체온으로 돌아오진 않는다.
“예.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삼랑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약의 부작용은 신경이 둔해지고, 졸음이 쏟아지는 정도여야 하니까요.”
체질에 따라 약재에 대한 특이한 반응이 있을 수도 있다만, 그래봤자 발진이다. 이 열의 원인은 조금 다른 데에 있었다.
“문 공자가 이렇게 열이 오른 건, 자체 해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약 기운을 밀어내려고 하니까, 이렇게 열이 나는 겁니다.”
“해독?”
하량은 아, 하고 중얼거렸다. 예결이 지나치게 생기가 넘기는 까닭에 그가 자신처럼 마의의 실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하고 만다.
아니, 예결이 생기가 넘쳐서가 아니라 그의 눈에 비치는 사제가 너무 연약하게 느껴지는 까닭에 그가 병기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자꾸 낮추어 보게 되는 것이다.
“왜 흥분이 동반되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때제때 열기를 해소해 준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방치하면 그게 문제지요.”
하량은 옷소매로 예결의 얼굴을 닦아내며 물었다.
“열병을 앓을 때와 비슷한 부작용인가?”
기이한 충동이 하량의 눈 안에서 어른거리다가 사라졌다.
“예. 열병을 심하게 앓은 사람이 말이 어눌해지거나 사고방식이 단순해지듯, 그런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약탕에 집어넣고 평시에 몸을 식힐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놓는 걸 권고드립니다. 아마 그것도 그렇게 오래 안 해도 될 거예요.”
어깨를 으쓱한 삼랑이 덧붙였다.
“생각보다 금방 적응하실걸요?”
호위를 핑계로 매양 예결의 곁에 붙어 있던 그녀는 깜찍하고 악랄한 청년이 주군에게 내비치던 기묘한 집착을 알고 있었다.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금방 정신을 차릴 거고, 배신감을 느꼈을지언정 주군의 곁을 떠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을 거다.
‘그런데 약의 부작용쯤이야……. 몸이 안 따라줘도 정신력으로 극복하겠지.’
뭐, 전부 그녀의 짐작일 뿐이지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수하의 낙관에도 하량의 낯에서 걱정이 가시진 않았다. 다만, 예결을 쥔 그의 손길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사제의 몸을 안아 올린 남자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칭얼거리는 예결의 등을 툭툭 두드려 어르고는, 삼랑에게 턱짓했다.
“일단, 약탕이 준비된 것 같으니 그쪽으로 가지. 앞으로 닷새 동안은 근처에서 대기하며 사제의 상태를 직접 살피거라.”
“존명.”
***
예결은 눈을 떴다.
“으응…….”
물이 가슴 어림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기겁한 예결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아래에서 느껴지는 감각 때문에 황급히 등을 수그렸다.
“아, 아흣…….”
“깨어났구나.”
그의 아래에서 젖은 음성이 들렸다. 흐려진 시야에 하량이 담겼다. 예결은 몇 번 눈꺼풀을 깜빡였다.
“여, 여긴 어디…….”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무슨 거대한 목욕탕에 온 기분이었다. 수영장과 욕조 사이쯤 되는 크기에, 마감으로 쓰인 석재는 중원에서 흔히 보기 힘든 종류다.
독특한 문양의 대리석이며 아로새겨진 무늬 따위가 상당히 이국적인 정취를 불어넣었다. 보석이 박힌 것도 아니고 금박 장식을 입힌 것도 아닌데 곳곳에서 은은한 호사가 배어 나온다.
물도 그냥 물이 아닌지, 불투명한 색에 코끝을 간지럽히는 시원한 향이 났다.
박하는 아닌 것 같다만 이게 뭐지?
“청형전의 탕옥이란다.”
천마가 쓰는 욕실은 이런 거구나, 하고 납득한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우형을 깔고 앉은 건 새삼 놀랍지도 않은 모양이구나. 발칙하기는.“
콧잔등을 툭, 건드리는 손길이 장난스러웠다.
“아래에 왜 아직…….”
예결이 차마 성기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가슴에 기댄 채 웅얼거리자 하량이 그의 날개뼈 어림을 어루만지다가 답했다.
“네가 막아 달라 하지 않았니? 너무 벌어져서 안 닫힐까 무섭다고.”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결이 네가 아프면 안 되니 안에 든 건 다 긁어냈는데, 아쉽다면 다시 채워줄까?”
어깨를 지분거리는 입술에 다정한 열기가 배어 있었다.
“빼주세요…….”
도리질한 예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량은 아쉽다는 듯 예결의 허리를 잡고 천천히 안에서 빠져나왔다.
“아……. 깨어 있으니 더 좁구나.”
밀지의 입구 어림에 귀두를 걸친 채, 하량은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너무…… 조이지, 윽. 말고.”
물에 젖어 있어 평소보다 야릇하게 느껴지는 대사형이 흥분한 기색을 내비치자, 예결도 자꾸 몸이 동하려 했다.
아랫입술을 핥은 예결은 하량의 어깨에 손을 얹고 스스로 무릎을 세웠다. 힘이 잘 들어가진 않았으나 가까스로 아래를 가득 채운 양물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흣……!”
내내 자다가 깨어나 한 일이라곤 고작 아래를 채우고 있던 성기를 빼낸 게 전부인데, 이상하게 몸이 지쳤다.
예결이 하량의 어깨에 고개를 숙인 채 새액새액 숨을 내뱉자 그가 등줄기를 어루만졌다.
안을 채우고 있던 큼직한 양물이 빠져나가자 밀지가 벌름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걸 내내 담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했다.
에스퍼의 회복력을 잘 알면서도 정말 계속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아래로 손을 뻗어 더듬거린 예결은 무언가 단단한 것을 만졌다. 그가 올라타 있던 하량의 허벅지였다.
그 옆으로 조금만 더 가면-
“이런.”
대사형의 입술에서 신음이 새자 예결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냈다.
“……더 괴롭힐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렴.”
젖은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이는 하량의 음성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정중하고 다정다감했다. 가히 놀라운 인내심이다.
예결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온화한 표정이며 잘난 이목구비 모두 그가 알던 제하량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시험 삼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가면 안 되나요?”
슬쩍 눈을 내리깔며 물속으로 목 근처까지 몸을 담갔다. 헐벗은 채 이렇게 뒤엉켜 있는 게 부끄러운 것처럼.
“안 그러는 게 좋을걸.”
하량이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건 약탕이니 말이다.”
예결은 멈칫했다.
“약탕……이요?”
“이 우형이 쓰던 약 기운이 너무 강해, 네가 중독되었다는구나. 그래서 해독을 돕기 위해 삼랑이 처방한 약으로 탕을 채웠지.”
아까부터 느껴지던 홧홧한 향이 약재를 달여낸 거였다는 걸 알게 된 예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아……!”
물이 뜨거워서 몰랐는데, 아까부터 하량의 몸이 차가웠다.
“사형의 몸이 차가워요.”
확인차 그의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 댄 예결이 중얼거렸다. 물이 뜨거워서 기분 좋게 몸이 데워진 채라 그렇지, 밖이었다면 손이 조금 시렸을 정도다.
“네 몸의 열을 내리려고 아까부터 빙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예결은 두 눈을 끔뻑였다.
빙공을? 왜?
“네 몸에 오른 열이 도통 떨어지지 않았거든. 해독하려면 약탕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차가운 물에는 약 기운이 잘 우러나지도 않고……. 그래서 내가 직접 몸으로 식혀 주고 있었다.”
그래서 하량이 인간 아이스팩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의식을 잃은 예결이 행여라도 물에 빠지면 안 되니 제 몸 위에 올려놓고 말이다.
“……무공을 자꾸 이상한 데 쓰시는 거 같아요.”
예결은 하량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웅얼거렸다. 이상하게 부끄럽다.
하량은 무공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다. 저번에 허공섭물로 고작 문이나 여는 것도 그렇고, 무림인치고는 상당히 소탈한 태도다.
강호에 몸을 담은 이들은 보통 무공에 목숨도 걸고 자존심도 건다. 그런데 하량은 무려 천마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인간 해열제 노릇을 하고 있지 않았다.
“네가 상하지 않게 무공을 쓰는 게 그리 이상한가?”
하량은 외려 반문했다.
“내 너를 귀애한다 하지 않았느냐. 눈에 담고만 있어도 이토록 아까운데…….”
사내가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예결의 손을 가져다가 제 뺨에 대고는 가만히 기댄 채 중얼거렸다.
“그런 결이 네가 신열에 들떠 끙끙거리는데 두 손 놓고 지켜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젖어 있는 제하량은 자극이 과했다.
속눈썹 끝에 아롱지는 물기는 눈물 같고, 젖어서 살갗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야릇하다. 물 아래로 어른어른 비치는 가슴이며 가장 내밀한 순간에나 훔쳐볼 수 있는 속살이 적나라하게 시야를 어지럽혔다.
예결은 차마 손을 물리지도 못한 채 물었다.
“……제가 여전히 당신의 사제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