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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91화 (191/203)

191화. 독제비는 참지 않고 (2)

예결이 그녀의 말을 받아 중얼거렸다.

마교에 대해 외부에 널리 알려진 몇 안 되는 사실 중 하나는 그들이 무(武)를 추앙한다는 거였다.

가장 강력한 자만이 교주가 된다.

“마의는 교주에게 주군이 그의 창과 검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교주의 눈에 주군은 경쟁자나 다름없었지요.”

경쟁자라니. 만약 하량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절대 천마가 되지 않았을 사람이다.

예결은 이를 악물었다.

“교주는 충성심을 시험해 보겠다는 명목으로 주군을 몇 번이나 사지에 몰아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매번 살아 돌아오셨지요. 차라리 실종되었을 때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버럭 화를 내야 하는데, 예결의 목소리는 힘을 잃어 나오지조차 않았다.

삼랑의 말마따나, 하량은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나았을까?

예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교주의 견제를 받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주군이 두 손 놓은 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계셨던 건 아닙니다.”

삼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교가 십수 년 동안 준비해온 정마대전을 일으켰을 때, 마도팔가 중 지금은 사라진 위지세가 출신의 소교주를 제거했습니다. 외부에는 부교주의 짓처럼 꾸몄기에 마교에는 내란이 일어났지요.”

십만대산은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였으나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법이다.

“마의는 내란을 수습하던 중에 주군의 개입을 알아챘지만, 함부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가 직접 벼린 검이 교주의 턱 끝을 겨누고 있다고 시인하기엔, 마의는 제 작품이 완성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광인이었으니까요. 거의 이긴 거나 다름없던 정마대전에서의 승기가 주춤했습니다.”

“다행이군.”

“글쎄요.”

예결의 중얼거림에 삼랑이 냉소했다.

“마의는 고독과 사술을 활용해서 주군에게 단신으로 곤륜을 몰살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어째서? 왜, 그런.”

아무리 제하량이 강하다고 한들 어떻게 혼자서 구파일방 중 한 곳을 지울 수 있단 말인가?

“정을 끊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제하량을 말소시키려고. 그럼 굳건한 정신이 무너지고 사술이 그 안에 스밀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만…… 주술 쪽은 제 전문 분야가 아닌지라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래서, 사형은? 대사형은 어떻게 했지?”

예결이야 사문에 깊은 정이 없다지만 하량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당시의 장문인을 무척 경애하며 따랐다.

“아무리 강해졌다 한들 고독과 사술을 어찌할 방도는 없었으니 따를 수밖에요.”

그 모든 순간에, 예결은 하량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예결은 하량을 위한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제 목숨을 놓아버린 것이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면, 하량보다는 덜 괴로웠을까?

“곤륜파에 들어가기도 전에 산의 초입에서 옛 스승님, 즉 장문인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는 기억이 없다시는군요.”

예결은 몸을 긴장시켰다. 백양진인의 사형이기도 한 장문인 백운진인은 대쪽 같은 성품을 가진 도인이었다.

“그때 파문당하신 건가?”

조바심에 입술을 깨문 예결이 묻자 삼랑은 고개를 내저었다.

“깨어났을 때 백운진인은 사라진 뒤였다고 합니다. 정신과 육체 모두를 가두던 금제도 함께요. 스스로 단전을 파괴했음에도 여전히 내공이 존재했기에 그길로 십만대산에 돌아온 주군은 마의를 살해했습니다.”

예결은 탄식을 내뱉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이전의 대사형이었어도 그런 자를 살려둘 리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예결이 비통한 것은 자신이 그의 복수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새파란 증오를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붉다 못해 푸르게 달아오른 증오가 뱃속을 검게 지졌다. 예결의 눈이 금빛의 테를 머금고 반짝이다가 다시 검어지기를 반복했다.

눈을 내리깐 채 주군의 과거사를 더듬던 삼랑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간발의 차로 예결의 눈에 머물렀던 이변을 목격하지 못했다.

“교주는 곧장 주군이 모든 금제에서 벗어났다는 걸 알아채고 그분을 십만대산의 절벽에서 내던졌습니다만……. 옛 천마의 비동을 찾아낸 주군은 무공을 완성한 뒤 탈마의 경지에 오르셨습니다.”

“……그렇게 마교로 돌아와 교주를 죽이고 천마가 되셨겠군.”

“예. 그게 문 공자를 찾기 삼 년 전 일입니다. 올해로 사 년째로군요.”

“그리고?”

“……곤륜을 찾아가셨으나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주군이 천마가 되고 몇 달 뒤에 백운진인은 귀천했는데, 당시 유지를 남겨 주군을 파문했습니다. 다시는 곤륜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말입니다.”

“다시는 곤륜에 발을 들이지 말라…….”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던 예결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래서, 제하량이 자신을 곤륜으로 보내려 했던 거다. 마인이 된 제자에게 백운진인이 남긴 마지막 유언이 다시는 그 눈 덮인 산을 오르지 말라는 내용이라서.

설령 하량의 마음에 다시 원망이 자라나 예결을 향한 살의를 느껴도 그의 사제가 안전할 수 있게.

“그 후로 주군은 의무만을 위해 사는 사람 같았습니다. 무림맹과의 여러 차례 교섭 끝에 밀약을 맺고 정마대전을 끝내고……. 몇 번이고 무너졌던 곤륜을 재건을 아무도 모르게 지원하고.”

“청해상단이 그래서 생긴 거구나.”

예결은 천마가 어울리지도 않는 상단주 직함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어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청해상단은 그보다 전부터 가지고 계셨습니다만, 예. 청해상단을 통해 자금을 세탁하고 그 일부를 곤륜에 넘기긴 했습니다.”

백양진인과 하량 사이의 연결고리를 마침내 찾아낸 예결은 침음했다.

‘정작 자신은 돌아갈 수 없으면서 사제가 돌아갈 자리를 만드는 대사형의 기분은 어땠을까?’

무정한 운명이 하량을 할퀴고 지나간 것의 반만이라도 그가 자신에게 매정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하량은 예결에게 다정하기 짝이 없는 사내로, 그의 가장 상냥한 꿈으로 남았다. 예결은 그의 품에서 대사형이 쏟아주는 애정에 취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백운진인이 다시는 곤륜에 오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는데 대체 나는 어떻게 찾으신 거야?”

자책과 울화를 삼킨 예결은 하량이 저를 곤륜산 기슭의 강가에서 발견했다는 걸 떠올리며 물었다.

사람이 그렇게 버림받았으면, 마침내 돌아가 만난 스승에게조차 내쳐지고 말았다면 다시는 그 방향으로는 머리도 안 눕히는 게 맞지 않나.

“곤륜혈사가 일어난 이후 해마다 청해로 돌아가서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술잔을 기울이고 오셨습니다. 그때 문 공자를 발견하셨지요.”

“왜 백운진인의 기일이 아니라 곤륜혈사가 일어난 날에?”

예결의 목소리는 하염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따로 언급하신 적은 없습니다.”

삼랑의 증언에는 항상 하량의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아무리 최측근이라고 하나, 삼랑은 하량에게 일어난 사건을 표면밖에 모른다. 하여 예결은 삼랑의 말에서 하량이 느꼈을 분노와 슬픔, 증오와 절망을 모두 짐작해내야 했다.

다만 그 윤곽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눈물이 마르고 가슴은 재조차 남기지 못한 채 타들어 갔다.

괴로웠다.

대사형이 겪었을 고통의 만분지 일도 되지 못할, 알량하기 짝이 없는 감정에 예결은 구역질이 났다.

“그렇게. 천마가 되고부터 삼 년을.”

“……제 짐작입니다만, 고작 삼 년은 아니셨을 겁니다.”

그전에도 다녀가신 적이 있을 테니까요.

삼랑이 거의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음에도 예결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몸을 굳혔다.

“아마 중원에 나가 있을 때마다. 곤륜을 스치듯 지나갈 때마다 다녀가셨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지 않고서야 곧바로 곤륜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를 어찌 찾으셨겠습니까?”

예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토록 증오스러운 마교의 수인(囚人)이 된 제하량이 반평생을 그리워했을 설산.

천마의 위에 오르며 마교를 십만대산에 가둔 수인(守人)으로 남은 대사형이 영원히 그리워할 곳.

다시 태어나 내내 곤륜을 찾아 헤맸던 예결은 곤륜을 지척에 둔 채로도 감히 그 땅을 밟지 못했을 사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어렵지 않았다.

까닭에 오히려 더 절망적이었다.

“잠시……. 혼자 있었으면 하는데.”

예결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반 시진 뒤에 천년뇌각망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삼랑이 조용히 물러났다. 예결은 두 손으로 뱀뱀이를 받쳐 든 채 앉아 고개만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완벽하게 조형된 정원이 보였다. 넓은 중정 가득,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나무며 수석, 졸졸 흐르는 물길과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

이곳이 어딘지조차 잊게 하는 아름다움이었다.

삼랑이 내심 짐작한 것과 달리, 예결의 낯에는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제 감정에 취해서 서러워하기엔 예결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것도 상당히.

***

“대사형.”

하량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쪼르륵 달려간 예결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휘청임조차 없이 덥석 안겨드는 몸을 지탱한 하량은 예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은 하루를 보낸 것 같구나.”

순간, 그는 사제가 아무것도 모르던 달포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안겨 오는 걸 보면 뱀뱀이와 삼랑을 만난 게 즐거웠던 모양이야.”

여전히 하량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뱀뱀이라는 이름은 어색했다.

‘대사형이 손가락 하트를 만드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려나.’

예결은 배시시 웃었다.

“그보다는, 대사형을 온종일 못 만났으니까요”

하량의 말투는 여상했지만 예결은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많이 바쁘셨어요?”

언제 엉엉 울며 낯을 가렸냐는 양 잘도 치대는 예결을 보고 있노라면 요 며칠간의 기억이 휘발된 이를 보는 듯했다.

하량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애써서 예전처럼 굴지 않아도 된다.”

“예전처럼?”

예결은 하량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양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에는 영특하기 짝이 없던 사제가 일부러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하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제 말씀해주신 것처럼 중정에 눈 쌓아주세요.”

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죠? 하고 되묻는 예결이 속눈썹을 팔랑였다.

“네가 원한다면.”

냉기는 빙공을 운용해서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그게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가두는 건 진법가를 불러 대대적인 공사를 해치워야 하는 일이다.

전체적인 구조를 손봐야 할뿐더러 저 안에 자라는 식물 중 추운 기후에서 살지 못하는 화초도 더러 있었다.

하필 그 자리에 있던 탓에 중원에서는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서역의 기화요초가 예결의 말 한마디에 뽑혀 나가게 된 셈이다.

심지어 예결의 요구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곤륜에 있던 나무도 심어주시고. 아, 그냥 괜찮은 걸로 뽑아오면 안 될까요? 곤륜 사부님 거처에 그분이 애지중지 키우던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아무리 청해와 십만대산이 그나마 가까운 편이라곤 하나 그 사이에는 사막이 놓여 있었다.

죽은 나무를 가져오는 거라면 모를까, 살아 있는 나무를 옮기려면 그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으리라.

게다가 백양진인의 안뜰에 심어진 나무를 몰래 파헤쳐서 가져오려면 구파일방 한복판에 잠입할 수 있는 수준의 고수를 동원해야 한다. 그러고도 나올 때까지 들키지 않아야 했고.

예결은 이런 사실을 다 알면서도 뻔뻔하게 요구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하얀색 장포를 입어주세요. 푸른 선이 들어간 거요. 대사형은 흰 게 잘 어울려.”

검은 옷깃 사이로 슬그머니 손을 밀어 넣은 예결이 중얼거렸다.

여기 온 뒤부터 어두운 색을 고집하는 하량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싹 벗겨놓는 게 제일 잘 어울리지 않을까 같은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이런 걸 어찌 대사형 앞에서 내색할 수 있겠는가.

“해주실 거죠?”

하량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 예결은 배시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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