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독제비는 참지 않고 (3)
하량은 그럴듯하게 연출된 천진한 낯을 내려다봤다.
아무리 예결에게 눈이 멀었어도 이게 얼마나 작위적인 표정인지 모를 순 없다. 사제는 그걸 딱히 숨기려는 기색도 아니었다.
‘게다가 저 중 아무것도 원하지 않지.’
예결은 곤륜을 전혀 그리워하지 않는다. 외려 하량의 곁이 제 자리인 양 답삭 붙어 있었다. 그런 이가 갑자기 설산을 꾸며달라는 게 향수 때문일 리는 없다.
하지만 뭐 어떤가.
“내 약속하지 않았니.”
나직한 목소리가 예결의 귀에 흘러내렸다.
“네가 떠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첫발을 떼는 건 항상 어렵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다.
지금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더라도, 예결은 차차 진심으로 원하는 바를 말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때론 고통보다도 편리함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예결이 진주를 갈아서 사막을 만들어달라 요구해도 하량은 이를 충분히 이뤄줄 수 있었다.
그러니 사제가 원한다면 마교와 역사를 함께했다는 청형전을 갈아엎는 정도야 문제도 아니었다.
“정말요?”
“그럼.”
너그럽기 짝이 없는 하량의 답에 예결은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가슴에 뺨을 비볐다. 슬그머니 하량을 데리고 침상으로 갈 작정이었다.
‘베갯머리송사의 완성은 색사지.’
선후가 뒤바뀌긴 했지만 대사형은 자신에겐 온갖 예외를 만들어 주니까 괜찮을 거다.
본인의 음심을 합리화하며 희희낙락하던 예결의 귀에 제법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잠깐 밖으로 나갈까?”
제안처럼 들렸지만 하량은 이미 예결에게 겉옷을 걸쳐주고 있었다.
“밖이요?”
예결의 음성은 사뭇 떨떠름했다.
그가 청형전의 침상에 묶여 있던 건 첫째 날 뿐이긴 했다. 그러나 예결이 전각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무언의 금기는 분명 존재했다.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하량은 구체적인 설명은 삼갔다.
“……좋아요.”
예결의 가슴은 조금 덜컹거렸다. 이럴 때 불안부터 스미는 건 그의 나쁜 버릇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하량이 천마라고 해서 그가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니다. 대사형이 저에게 나쁜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신도 신어야지.”
하량은 안에 털을 덧댄 가죽신을 가져왔다. 십만대산은 서늘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싸맬 정도도 아니지만.’
직접 신으려 했으나 하량은 예결을 침상에 앉힌 뒤 손수 시중을 들었다. 발이 유리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데, 그의 손길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문득 예결은 자신이 병원에 있을 때 들은 대화를 떠올렸다.
‘치프, 아무리 에스퍼라지만 너무 막 다루는 것 아닙니까?’
채혈하던 날이었다. 주사를 너무 많이 맞아서 핏줄이 잘 잡히지도 않는 팔에 피멍이 드는 동안 예결은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선임이 예결의 피를 뽑는 걸 지켜보던 신입은 복도로 나간 뒤에 그런 질문을 던졌다.
‘저 괴물들은 금방 나으니까 괜찮아.’
귀찮다는 듯 툭 던지던 그 말. 예결은 그럭저럭 아무는 팔을 보며 그자의 말이 아주 틀리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기껏 생긴 부모님도 괴물 같은 아들이 무서워서 이런 시설에 던져놓은 거겠지,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조심하지 않으셔도 돼요.”
예결은 대단한 비밀을 말해주듯 소곤소곤 속삭였다.
“어차피 다쳐도 금방 낫는데.”
하량은 그가 덧붙인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제의 갈색 눈은 평소보다 무미건조했다. 본인도 자각은 없어 보였다.
예결은 타인의 가해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서악에 의해 중독당했을 때도 그리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게 상대를 처리한 게 전부였다.
감정이 배제된 효율적인 방식.
“이 우형이 겁이 많아서 그렇다. 발목이 이렇게 가는데, 자칫 부러지면 어쩌니.”
병아리를 쥐었다가 터뜨릴까 봐 겁이 난다고 해도 이보다는 납득이 쉬울 것 같았다. 예결은 그리 건장한 편은 아니어도 에스퍼 특유의 강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그래도 S급인데…….’
무림인의 내구도가 너무한 거지, 예결이 연약한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손톱에 긁혀 피라도 나면 어째.”
마치 동화책을 읽어주는 듯 조곤조곤한 음성이 사뭇 평화로웠다.
“……대사형이 그러지 않으실 걸 알아요.”
예결은 그리 덧붙일 뿐, 더는 그만두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잘 어울리는구나.”
하량은 뿌듯하다는 양 미소를 짓더니 예결을 안아 들었다. 엉겁결에 그의 목을 끌어안은 예결은 눈을 몇 번 끔벅이다가 하량이 침소의 문지방을 넘을 때 물었다.
“이럴 거면 신발은 왜 신긴 거예요?”
“밖은 추우니까.”
“걸어도 되는데.”
“넘어질지도 모르지.”
사내는 노래하듯 답했다. 어느 모로 보나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예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힘을 풀고 하량에게 몸을 기댔다. 대사형이 이렇게 나온 이상 고집을 꺾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결이 네가 자분자분 잘 걸어 다니는 거야 내 알지.”
사제가 영 얼굴을 보여주지 않자 하량은 그의 등을 토닥토닥 달래듯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혼자 걷다 보면, 가고 싶은 곳이 생기잖니.”
여상한 말투였다.
그 너머에 의심이나 불안 같은 게 깃들어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직 걱정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너를 번거롭게 하는구나. 조금만 더 양해해주렴.”
몸이 맞닿은 덕에 심장이 겹쳐 있었다. 예결은 하량의 심장 박동에 가만 귀를 기울였다.
정말로 쿵, 쿵 하고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마치 예결의 것처럼.
무공 한 수 익히지 못한 사제가 어디로 가든, 누굴 만나 도움을 청하든 얼마든지 잡아 올 역량이 있으면서 왜 이토록 불안해하는 걸까?
예결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랑 비슷하네.’
하량이 여전히 자신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천마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 골목길에서 느낀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허울 좋은 희생정신에 취해 마음 깊이 경애하던 대사형을 망가뜨리고 말았다는 깨달음이, 어쩌면 하량의 마음 한구석에는 사제에 대한 증오나 원망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예결을 괴롭게 했다.
언젠가는 하량이 그 구석을 들여다볼 거 같았다.
“말이 없구나. 내가 안고 가는 게 불편하니?”
“아뇨. 그냥……. 머릿속은 복잡한데 가슴은 설레서.”
예결은 무심코 진심을 입에 담았다가 깜짝 놀랐다. 상념에 깊이 빠져 있느라 너무 반사적으로 답해버렸다.
대사형이 주책없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래? 그럼 다행이구나.”
하량이 웃었다. 그 자잘하면서도 부드러운 떨림이 예결의 몸으로 옮아왔다.
“사실 나도 아까부터 그랬거든.”
마치 물에 번지는 물감처럼 큰 파문을 그리며 퍼지는 기쁨이 간지러웠다. 달콤했다. 좋았다.
“장인에게 신을 받아오는데 내 보기엔 너무 작았어. 그래서 이게 네 발에 들어가기나 할까 고심하며 돌아왔거든. 정작 널 앉혀놓고 그 발을 내 무릎 위에 얹어보니 너무 작고 가벼워서…… 어떻게 이 발로 내게 돌아왔나. 하고 생각했지.”
“안 작아요.”
예결은 고집스럽게 답했다.
실제로 삐지거나 화가 난 건 전혀 아니었다.
하량이 자꾸 그를 귀여워하는데, 오히려 좋았다. 센터 선배들이 말하길 콩깍지 중에 제일 무서운 건 귀여워 보이는 거랬다.
그러니 제 발은 대사형이 작다면 작은 거다. 173cm이나 되는 성인 남성을 한입에 삼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면 당연히 삼킬 수 있는 거고, 잘못하다 발목을 부러트릴 것 같다고 걱정하면 그것조차도 맞는 말이다.
‘……진짜 부러트릴 수야 있겠지만. 실수로 그러진 않으시겠지.’
단지, 하량이 이런 말을 할 때 ‘맞아요, 제 발 작아요.’ 하는 것보다 안 작다고 박박 우기는 게 더 귀엽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그래서 예결은 불퉁해진 척 눈을 흘겼다.
속 시커먼 사내지만 하나뿐인 정인에게 귀여워 보이고 싶어서.
아니나 다를까.
“그래. 결이는 하나도 안 작지.”
하량의 음성에 흐늘흐늘한 웃음이 배어 나왔다. 마치 염색물에 담가 놓은 비단처럼. 손을 가져다 대면 무척 부드러운데, 정작 만지려 들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처럼 보드레한 소리가 듣기 좋았다.
대사형은 이게 문제다. 귓불도 말랑말랑한데, 천마씩이나 되는 사람이 성격도 이렇게 말랑말랑해서 예결의 수작질에 잘도 속았다.
매번 속고, 속고 또 속고.
‘진짜 귀여운 게 누군데.’
예결은 일부러 하량의 목을 힘주어 꽉 끌어안고는 입을 다물었다.
놀려먹으려고 하량을 속이는 건 아니지만, 매번 이렇게 넘어오는 대사형이 순진해서 걱정이었다. 또, 일말의 애정이 아쉬워 자꾸만 그를 속이는 제가 밉다.
그러나 이건 예결에게 애정을 다투기 위한 줄다리기 같은 게 아니었다. 이 판에 오른 건 예결의 감정뿐이 아니라 그의 목숨도 함께였다.
까닭에 예결은 하량에게 미안했다. 사과도 할 거지만, 거짓말을 하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화났니?”
웃음을 그친 하량이 눈치를 살피듯 슬쩍 물었다.
“아뇨.”
“으응. 결이가 화가 났구나.”
내내 예결이 어깨에 턱을 괴고 있어도 내버려 두던 하량이 고개를 슬쩍 돌려 시선을 마주쳐왔다.
“하지만 용서해 주렴.”
청형전 밖으로 완전히 나오자 햇볕이 그의 얼굴 위로 가지런히 내려앉았다.
“선물은 받아야지.”
그 말에 예결은 상체를 들어 뒤를 바라봤다.
“어?”
순간 서녕성의 저자가 생각났다. 그 골목골목 기예단이 온다며 해 두었던 장식 같은 것들이.
기예단 소속으로 보이는 악사들이 예결과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연주를 시작했다. 둥, 둥 하는 북소리와 함께 요란한 피리 소리가 들리며 무희가 임시로 마련된 무대 위에 올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천이 그 뒤로 나부꼈다.
“……기예단?”
예결은 조금 멍하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