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93화 (193/203)

193화. 독제비는 참지 않고 (4)

예결은 자신보다 대사형의 손이 빨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걸 준비해 놨는데 보여주기도 전에 대뜸 침상으로 끌어들이는 사제라니, 순진한 하량에게는 충격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아니. 어떻게. 그.”

여긴 마교의 본거지인 십만대산이고 저들은 기예에 도움이 될 철사장 같은 삼류 무공 정도나 익혔을 게 고작인 일반인이다.

눈이 아플 정도로 알록달록한 색채는 그들이 얼마나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지 요란하게 외치는 듯했다.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흥겨운 음악도 그렇고.

심지어 기예단 앞에는 예결과 하량을 위해 마련된 자리도 있었다. 술이며 간단한 먹을거리도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눈이 아릴 정도로 붉은 석류라든가 열매가 무성히 맺힌 포도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차마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예결이 입만 뻐끔거리자 하랑이 재미있다는 듯 답했다.

“눈을 가리고 데려왔지. 아랫것들과 어울리기 싫어서 가끔 이런 요구를 하는 고관대작이 종종 있는 모양이더구나.”

돈만 충분히 쥐여주니 크게 어려운 것 없었다며 하량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어, 나야 잘됐지. 별 소요 없이 데려올 수 있었거든.”

“하지만, 그래도……. 이래도 괜찮은 거예요?”

대담한 예결이라지만 가슴이 제법 벌렁거렸다. 중원에서 악인을 줄지어 세우라면 악명을 다툴 이는 많다만, 그중 이견 없이 선두를 차지할 자가 있다면 바로 천마였다.

마교가 발호하지 않는 시대에도, 천마는 어떤 공포의 대명사 같은 존재였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노괴들마저 밤잠을 설치게 하는 악몽의 주인공.

그런 천마의 거처 앞에 기예단을 데려다 놓아도 되는 건가?

“천마가 되어 좋은 점이 있다면, 내 무얼 하든 막아설 자가 없다는 거지.”

최소한 앞에서는.

하량은 고작 이 정도로 놀라 제 팔을 잡고 흔드는 순진한 사제 앞에서 뒷말을 덧붙이지 않고 삼켰다.

“다들 내가 괴물이라도 된 양 질겁하지만, 이럴 땐 편하더구나. 자, 저들이 불안해하기 전에 어서 앉자꾸나.”

예결은 홀린 듯 기예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량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자리에 앉아 넋을 놓은 사제를 무릎 위에 앉혔다. 미리 마련한 자리는 두 곳이었다만, 계속 안고 있으니 놓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기도 하고.

아찔한 곡예가 시작되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 어느 괴짜 부자의 별장 같은 곳으로 왔다고 생각하는 기예단은 최선을 다해 공연을 펼쳤다.

물구나무서기로 외줄을 가로지르고, 그 중앙에서 한 손만 줄을 쥔 채 몇 바퀴씩 도는 단원이 익살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주인이 달라는 육포를 가져와 놓고는 천연덕스럽게 제 입에 넣는 알록달록한 새도 보였다.

한 사내가 앞구르기를 두 번 하더니 입김을 후, 하고 불자 불이 쏟아져 나와 둥근 고리에 옮겨붙었다.

“와, 와아. 입에서 불이 나왔어요……!”

마른하늘에서 번개도 치게 만드는 S급 에스퍼가 손뼉을 치며 좋아라 외쳤다. 현대였으면 아무리 순진한 가이드라도 그 가증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을 테지만, 예결에겐 다행스럽게도 여기는 중원이었다.

하물며 그의 유일한 가이드는 사제가 어떤 기만을 건네더라도 기꺼이 속아 넘어갈 사내였다.

“어떻게 저런 걸 하죠?”

“글쎄.”

하량이 말꼬리를 흐렸다. 삼매진화 같은 거나 떠올리고 있을 거 같아 저도 모르게 웃는데, 그의 말이 좀체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예결은 대사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한 손에는 술잔을 든 사내가 다른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예결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매번 공연의 내용이 바뀔 때마다 정신없이 집중하는 척하던 예결을 감상하고 있었다는 게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태도였다.

그의 시선을 피하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예결은 부질없는 노력을 포기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왜, 왜 하필 기예단을 데려오신 거예요?”

뭔가 할 말을 찾다가 퍼뜩 떠오르는 게 없어서 무심코 나온 질문이 그거였다.

기실, 무림인 입장에서는 뜨거운 불에 손을 집어넣거나, 외줄을 타고, 칼을 입에 문 채 춤추는 이들의 기예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을 터다. 대사형처럼 고강한 경지에 오르지 않아도 어지간한 수준의 무인은 그런 걸 쉽게 해내니까.

그런데 굳이 십만대산까지 저들을 불러들이는 수고를 한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알고 보니 숨겨진 정보 단체? 그런 거라서 접선 같은 걸 하려고?’

제멋대로 세워본 가설이지만 말은 안 된다. 예결은 열렬한 시선으로 대사형의 입술만 바라봤다.

이내 입을 연 하량은 별거 아니라는 양 답했다.

“결이 너와의 약속이니까.”

그러고는 여상한 태도로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비웠다.

약속.

그 단어가 예결에겐 너무 무거웠다.

살아남아 좋은 적이 없었을 하량은 내내 예결의 약속을 저버리지 못했다. 삼랑에게 들었던 건조한 말들이 예결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하량의 입으로, 직접 그때 이야기를 해주는 날이 오기나 할까?

제 목을 조르던 손길이, 하량에게서 넘어오던 역가이딩이 생각났다. 깨어 있는 동안 대사형은 그런 마음을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하량이 정말 죽이고 싶었던 건 예결이라기보단, 죽지 못해 사는 그 자신이었으리라.

나약해진 심장을 비집고 들어오는 고통에 예결은 감히 거역하지 못한 채 흐느낌을 사리물었다.

‘울기는 뭐 잘났다고 울어.’

짧게 시선을 뗐다가 도로 고개를 돌린 하량은 예결의 젖은 얼굴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결아? 갑자기. 왜 우는 거지?”

아닌 게 아니라 예결의 시야에 들어온 사내의 곤혹스러운 낯이 희부옇게 번지고 있었다.

자꾸만 흐려지는 하량의 표정을 알아보려 눈을 몇 번 끔벅이던 예결은 입을 벌리고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어……?”

예결은 멍하게 무릎에 얹어놓았던 제 손을 들어 올렸다.

손등이 젖어 있었다.

“울리려 한 것이 아니었는데. 결아, 결아?”

우는 줄도 모르고 있었기에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에 예결은 멍해졌다. 하량은 그런 사제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는지 조바심이 깃든 음성으로 그를 연신 불렀다.

“왜 울고 그러니. 기예단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내 너무 멋대로, 굴어서.”

하량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그저 그 완벽했던 하루를 재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한데 입장을 바꿔 달리 생각해보면 사제에게는 급작스레 믿고 따르던 대사형의 정체가 천마라는 게 밝혀지고 제대로 앞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납치당한 날이기도 했다.

‘이런 멍청할 데가.’

예결이 생각보다 큰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고 어떻게든 십만대산에 적응해 보려는 기색을 내비치기에 하량은 방심하고 말았다.

색사 도중에 저 뺨이 젖은 건 몇 번이나 보았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들뜬 신음을 내뱉으며 애걸하던 목소리도 몇 번이나 들어보았다.

그러나 이 눈물은 달랐다. 너무 오래 묵힌 설움을 터트린 것처럼, 그렇게 하염없이 흐르면서도 소름 끼치게 조용하다.

하량이 아는 예결은 어릴 적부터 눈물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고향인 항주에 처음으로 돌아갔을 때도 유일하게 보고 싶다고 말한 노인이 죽었다는데 사제의 낯은 건조하기만 했다. 사제의 유년기를 지옥으로 만든 짝귀라는 자를 벌할 때도 사제는 웃었으면 웃었지, 울분을 터트리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울고 있는 예결을 본 순간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지나치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두 손으로 눈가를 연신 닦아내고 제 품에 가둬 틀어막아도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싫어할 줄 알았다면 기예단 같은 건 다신 안 데려올 테니까.”

남자가 달래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예결은 그런 게 아니라며 히끅거리다가 도리질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어서 부인해야 하는데, 그게 맘처럼 쉽지 않았다.

때론 울고 있다는 걸 자각하면 더 크게 울어버릴 때가 있는데, 지금의 예결이 그랬다. 정말 갓 태어났을 때도 이렇게 울지 않았다.

엉엉 소리 내 오열하는 건 아니지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지금 이걸 다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왜, 왜…….”

그깟 약속이 뭐라고. 기예단 따위 안 봐도 되는데.

살아남으라고 했다고, 생존을 위해 하량에게 그 모든 치욕과 고통을 감수하란 것이 아니었는데.

왜 이 사내는 이토록 요령 없이 우직하단 말인가?

약속을 지킨 거라는 하량의 말에 수면 밑에 잠시 가라앉혀 놓았던 삼랑과의 대화가 생각났다. 그녀가 건조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서술한 하량의 과거는 예결의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벌건 색을 덧입으며 그의 상상력을 부추겼다.

“약속 같은 거 지키지 마요.”

이게 대사형의 귀에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강짜처럼 들릴까.

“그런 거 다 쓸모없으니까. 천마면 천마답게, 그냥 마음대로 하란 말이에요.”

악당이면 좀 악당같이 굴라고 말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알겠다. 알았으니까…… 약속 같은 건 안 지킬 테니 그만 울렴. 이러다가 쓰러지겠어.”

정작 하량은 예결을 어르기에 바빠 그러마, 하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결의 눈물이 조금쯤 잦아드는 걸 느낀 하량은 주변을 휙 둘러보다가 새붉은 과일 더미에 시선이 꽂혔다.

뭔가 입에 물려 놓으면 덜 울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쳤다.

“울지 말고. 이거 먹어보렴. 응?”

예결을 살살 달래던 하량은 잘 익어서 입을 벌린 석류를 반으로 쪼갰다.

그러자 투명한 홍옥과도 같은 석류 알갱이가 비어져 나왔다.

보석 같은 과육을 건네는 하량을 보며, 예결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명부의 왕이 봄의 여신에게 건넨 바로 그 과일도 석류였다는 게 생각났다.

생각해보면 페르세포네와 예결의 처지도 얼핏 비슷했다.

죽음의 신 하데스는 대지의 여신이 낳은 딸, 페르세포네에게 한눈에 반해 그녀를 납치해서 자신의 영토로 데려갔다. 마치 하량이 예결을 십만대산으로 데려온 것처럼.

날마다 울며 보내던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의 꼬임에 저승의 과실을 입에 댔다가 영영 지저에 묶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지상으로 돌아갈 날만을 꿈꾸던 봄의 여신은 비통해했으리라. 하지만 예결은, 그는 달랐다.

대사형의 곁에 남을 수 있다면 집착이라 한들 달게 받아마시리라.

“주세요.”

젖은 뺨을 한 청년은 기꺼이 붉은 석류알을 입에 머금었다.

스무 해 전, 한 사내를 위해 칼 앞에 몸을 던졌을 때부터 그는 지상에서의 삶에 별 미련이 없었다.

“아.”

하량이 먹여준 석류는 달았다.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감각의 뒤에 조금은 시고, 약간은 떫고. 그리고 눈물 탓인지 짭짜름한 뒷맛이 따라붙는다.

앞으로 무얼 먹어도 지금 느낀 이 맛을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임을, 예결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옳지…….”

그의 입술에서 흘러내린 붉은 석류즙이 하량의 손가락을 적셨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