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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96화 (196/203)

196화. 독제비는 참지 않고 (7)

“넓긴 정말 넓다.”

예결은 삼랑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만약 현대에 십만대산이 존재했다면 고대인들이 어떻게 이런 규모의 시설을 산속에 만들 수 있었는지 온갖 역사학자가 들러붙어서 탐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분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다. 폐쇄적인 마교의 특성상 이 어딘가에 식량을 자체 수급할 수 있는 농업 설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강호인들이 마교의 씨를 말리겠다고 몰려왔을 때 산의 문을 닫아걸고 농성하다가 다 굶어 죽을 거 같은데.’

하지만 중원의 역사 동안 십수 차례에 걸친 정마대전을 겪었음에도 마교의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원래는 이보다 훨씬 좁은 공간을 사용했으나 몇 대에 걸쳐 차차 넓혔다고 하더군요.”

오늘 예결의 가이드는 삼랑이었다.

먼젓번에 뱀뱀이와 재회하게 해준 일로 예결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생각한 건지, 대사형은 재차 삼랑과 천년뇌각망을 함께 보내주었다.

뱀뱀이는 예결을 만나기가 무섭게 삼랑의 어깨에서 냉큼 그의 팔목으로 넘어왔다. 그간 조금 허전했던 팔목에 뱀뱀이의 무게가 더해지자 안정감이 들었다.

“십만대산에 들어오던 그 협곡 사이의 문은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

“글쎄요. 신실한 교도는 초대 천마님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저 정도 되는 간부가 읽을 수 있는 기록에는 마교가 처음 세워지기 전부터 그 문이 존재했다고 해요.”

천마신교 출신이라는 게 허언이 아니었는지, 삼랑은 십만대산에 대해 많은 걸 알았다.

그녀는 천마의 거처인 청형전에서부터 가지처럼 뻗어나간 각 건물을 소개해줬다. 천마가 교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태향전, 필요할 때 마도육가의 가주와 마교 내 조직의 책임자를 소집해 회의를 여는 수황전, 대외적으로 무력을 내보일 때 동원되는 패각당, 마공을 비롯하여 여러 무공을 연구하는 형금당……. 삼랑은 그 외에도 마도육가가 자리 잡은 거주 구획 등을 바삐 소개했다.

“물론 제가 당주로 있는 무월당은 여기 보이는 건물 중 어디에도 없습니다.”

“뭐 하는 곳인데?”

“그야…….”

삼랑은 비수를 꺼내더니 허공에 대고 한 바퀴 휘리릭 돌렸다. 어떤 수를 썼는지 몰라도 금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를 출수하고 다시 회수하는 삼랑의 동작 자체도 지극히 은밀하고 날렵하여 예결의 동체시력으로도 가까스로 확인하는 데 그쳤다.

삼랑의 행동은 곧 예결의 질문에 대한 답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유의 무공이 사용되는 곳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뭐 살수라든가, 첩보 등을 담당하는 곳이겠지.’

“비밀스럽네.”

예결은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주며 광활한 마교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이곳은 하나의 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이래서 황가가 마교를 싫어하지.’

중원에서는 천자야말로 하늘의 아들이라 주장하는데, 이곳 십만대산에서는 천마가 곧 신이라 믿는 거대한 무력 단체가 존재한다.

하여 정마대전 중에는 관무 불가침을 깨고 황가가 정파무림의 손을 거들어 주었던 전쟁도 더러 있다.

“여기는 규형원입니다. 마공을 어느 정도 익힌 마인들을 모아 수련시키는 곳이지요.”

“오…….”

거대한 전각과 그 앞의 연무장을 지나다가 무심코 고개를 든 예결은 제 머리 위로 솟은 절벽을 발견했다. 이곳은 산맥의 한가운데이니 절벽 자체가 그리 놀랍진 않았다.

하나, 깎아지를 듯한 절벽에 거대한 짐승이 할퀴고 간 것 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연이 남긴 자국이라기엔 그 깊이며 범위가 흉포하기 짝이 없었다.

“저거 사람이 한 거지?”

인위적인 흔적에 예결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짐작하기로는 몇 대 전의 천마가 무공을 과시하기 위해 저지른 짓이 아닐까 싶었다.

곤륜산의 연무장에도 이 비슷한 게 있었다. 백 년쯤 전의 장문인이 말년에 큰 깨달음을 얻고 제자들 앞에서 무공을 시연하다가 거대한 바위에 용의 형상과 비슷한 자국을 남겼다는 말만 전해지고 있었다.

“아.”

삼랑은 그 방향을 보더니 눈을 끔뻑였다.

“용케 알아보셨군요. 저건 주군이 전대 교주와 마지막 일전을 벌일 때 남은 자국입니다.”

“어?”

예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저게 제하량의 작품이라고?

“절벽이 지금보다 조금 더 높았는데……. 당시 저 검강이 날아가면서 윗부분이 무너졌습니다. 그 잔해가 규형원이라 불렸던 곳의 지붕으로 쏟아져 내려서 불과 일 년 전까지 철거 작업을 진행했지요.”

그러고 보니 집터 같은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간이 정말 크다.’

삼랑은 예결을 흘깃 바라보며 새삼 그가 평범한 성정이 아님을 확인했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가 맞붙은 듯한 현장을 앞에 두면 평범한 사람은 졸아붙기 마련인데, 예결은 주변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공포보다도 흥미가 엿보이는 시선이었다.

“확실히…… 풍화나 침식이 덜 된 거 같네.”

“몇 년 지나긴 했지만, 아직은 당시의 자취가 퍽 생생한 편이죠.”

“이런 게 있을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둘러보자고 할걸.”

심지어 아쉽다는 양 혀까지 찬다.

“또 어딜 가고 싶으신가요?”

삼랑은 선뜻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예결이 자신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음. 대사형이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른 곳 순서대로.”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한 예결이 이내 씩 웃으며 말했다.

나쁜 모략을 생각하는 악동 같은 얼굴이었다.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수상함에 삼랑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천마가 되기 전 하량이 지낸 장소는 다 거기에서 거기다. 강자존의 마교에 납치당한 포로는 대체로 오래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결에게도 주군의 이런 과거를 대충 설명해 줬으니 그도 이를 짐작하고 있으리라.

한데 굳이 그런 곳을 봐야겠다고?

진영 같은 상식인이라면 예결을 일단 막아서고 보겠지만, 삼랑은 스스로가 문 공자가 저지를 짓을 기대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규형원에서 가까운 건……. 음. 역시 칠괴동이네요.”

“칠괴동?”

“원래는 마공을 잃고, 이지를 잃은 마인을 가둬두는 곳입니다. 점점 변질되어 무공을 익힌 포로를 가두는 장소로 바뀌었지만요.”

삼랑의 말이 사뭇 의미심장했다.

아. 예결은 눈을 깜빡였다.

여기가 거기구나.

“좋아. 거기로 가자.”

***

삼랑의 안내로 절벽을 따라, 경사가 완만한 비탈을 지난 예결은 동굴을 발견했다. 자연 상태 그대로는 아니었다. 사람의 손이 닿았는지 거대한 석문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두께도 그렇고 높이만 봐도 평범한 사람이 밀면 한 치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다.

“음.”

예결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칠괴동입니다.”

“그래. 여기가…….”

조용히 중얼거린 예결은 입을 다물었다. 삼랑은 무슨 말을 하려 했느냐 묻지 않고 성큼 걸어서 문을 열었다.

검은 비동 속으로 한 줄기 빛이 이어졌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로는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괴수의 목구멍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지금은 잠정적으로 폐쇄된 상태입니다. 이곳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관리자 한 명만 남겨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왜 안 없애신 걸까?

예결은 의문을 조용히 제 속에 담아두었다. 삼랑에게 물어본다고 해서 그녀가 알 것 같진 않았다.

분명 삼랑은 충성스러운 수하였으나, 하량과 깊은 감정적 교류를 나눈 기색이 없다. 담백한 성격 때문이라기보다는, 글쎄.

‘진영이나 홍여처럼, 삼랑도 대사형에게 맹목적이지.’

마치 신을 섬기듯이 말이다.

“관리자는 어디에 있지?”

때마침 예결의 의문에 답하듯 철컥, 철컥하고 쇳소리 같은 게 들렸다.

“누구냐?”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정기 감찰 때는 아닐 텐데.”

햇볕이 불편한지, 이맛살을 찌푸린 늙은 남자는 삼랑을 보더니 고개를 돌려 침을 뱉었다.

“가문의 배신자로군.”

“오. 역시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오랜만에 만나도 칭찬부터 해주네.”

그 정도 도발은 같잖았는지, 삼랑은 피식 웃고 말았다.

“꺼져라. 너 같은 자가 이곳에 발을 들이는 건 허락할 수 없다.”

“흥미롭네. 뭐, 평소라면 나도 이런 칙칙한 곳은 싫어. 하지만 말이지.”

삼랑은 물 흐르듯 경쾌하게 움직여 예결의 옆으로 가더니 그의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손을 올리고 말했다.

“주군의 귀하신 손님이 이런 거미굴에도 호기심을 보이니 안내해 드린 것뿐이야.”

삼랑의 뒤에 있던 곱상한 사내가 그저 무월단의 일원이라 여겼던 노인의 흰 눈썹이 움찔했다.

천마의 귀환을 맞이하기 위해 나갔다던 시비로부터 그 ‘손님’의 이야기를 듣긴 했다. 식량을 전해 주러 온 그녀는 그들의 신이 한 청년과 함께였다며 상기된 낯으로 떠들고 가버렸다.

‘짧은 갈색 머리…….’

퍽 오래전부터 소문의 자취를 더듬는 것 외에는 외부의 변화를 알 방도가 없었던 탁 노야의 부연 잿빛 눈이 예결을 살폈다.

새삼 삼랑이 그를 놀려먹으려고 이런 수고를 들일 것 같진 않았다.

그가 아는 무월당주는 자신 외의 대상에게 화풀이씩이나 하려고 공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저 여자는 제 가족과 친지가 전부 불타 죽을 때도 입꼬리만 올린 게 고작이었다.

‘소름 끼치는 새끼.’

“천마께서 데려온 손님이라면 이 칠괴동에 발을 들여도 무방하지. 이 노구는 탁-”

“자. 사소한 건 모르셔도 괜찮아요. 더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삼랑은 관리인의 소개를 싹둑 잘라내 버렸다.

예결이 겪어본 바에 따르면, 삼랑은 대체로 거침없는 성격이지만 그런다고 해서 굳이 전면에 나서는 성격도 아니다. 본인이 꼭 개입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존재감을 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는 편이다.

그런 삼랑이 저 사내를 쳐낸 걸 보면 예결이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인간이라는 소리다.

이젠 폐쇄된 칠괴동의 관리자가 되어 썩어가는 게 전부인 인간.

“왜? 관리자면 여기에서 오래 지낸 사람 아니야?”

슬쩍 떠보듯 묻는 예결의 질문에 삼랑이 눈을 찡긋하며 답했다.

“뭐, 오래 지냈죠. 한 십 년 정도?”

“아. 십 년, 그래서?”

예결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하여간 대사형도 참. 지나치게 자비로우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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