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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97화 (197/203)

197화. 독제비는 참지 않고 (8)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탁 노야의 태가, 어느 몰락한 황가의 충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속이야 어떻든, 겉만은 그럴싸했다.

“안에 좀 보고 싶은데. 안내해 주겠어?”

예결의 갈색 눈은 반지르르한 유리구슬처럼 빛났다. 탁 노야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천마께서 친히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 곳입니다.”

“어. 그래?”

탁 노야의 말은 엄격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들어가도 되겠네.”

예결은 노인을 비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슨!”

탁 노야가 저도 모르게 성큼, 빛으로 한 걸음 더 나아왔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아직 칠괴동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던 그의 하반신이 드러났다.

옷 아래로 가려져 있을 발목에 길고 긴 쇠사슬이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관리인?’

예결은 새어 나오려는 실소를 참지 않았다.

‘어느 모로 보나 죄인인 거 같은데.’

상대의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챈 노인은 옷자락을 휙 옮겨 사슬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저 길고 긴 꼬리가 전부 숨겨질 리가 없었다.

“돌아가십시오.”

노인의 주름진 목에 힘줄이 서는 게 보였다.

“대관절 무슨 자격으로?”

픽 웃은 예결이 삼랑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대사형께서 십만대산 내라면 어디든 가도 좋다고 하셨어. 그렇지, 삼랑?”

늬들이 학연을 알아?

예결은 고압적인 낯으로 탁 노야를 바라봤다.

“물론이지요.”

그리 답한 삼랑은 탁 노야를 향해 고압적인 투로 말했다.

“그쪽이야말로 물러서시오. 탁 노야. 문 공자는 한 당의 당주를 일개 길잡이로 붙여줄 정도로 주군이 아끼는 분입니다.”

제법 혈색이 생긴 탁 노야의 낯에 예결은 휘파람을 불었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그럼 가자. 뱀뱀이, 너는 뭐 마음에 드는 거 있니?”

소매에서 고개를 비죽이 내민 황금빛 뱀은 어느 모로 보나 범상치 않았다.

이 무도하기 짝이 없는 침입자가 흙발로 제 영역에 들어오는 걸 막지 못한 탁씨 노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칠괴동 내부는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영락한 부잣집을 보는 기분이었다. 내부를 채운 가구며 물건은 그 가짓수가 다양하고 꽤 고급품으로 보였으나 군데군데 이가 빠지거나 낡아 있었다.

제 눈에 보이는 곳의 먼지를 닦고 관리를 하려고 한 태가 역력하지만, 조금만 까치발을 들어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엔 소복이 쌓인 먼지나 거미줄이 보인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예결은 적절한 목표물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오. 꽤 높은 선반인데.”

“약재를 보관해 두던 곳이었습니다…… 무슨!”

예결이 손을 뻗자, 노란 번갯불 같은 것이 튀더니 선반의 귀퉁이가 풀썩 무너지며 기울었다. 그 위에 있던 잡동사니가 아래로 우르르 쏟아졌다.

쨍그랑! 쾅!

요란스러운 소리에 예결이 난처하다는 듯 턱을 긁적였다.

“이거. 큰일 날 뻔했네. 노인이 혼자 지내는 곳인데 내가 아니라 여기 관리자가 만져서 저게 머리로 떨어졌어 봐.”

“그러게 말입니다.”

삼랑은 뻔뻔한 예결의 발언에 반박하기는커녕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탁 노야의 낯에 혼란스러움이 깃들었다. 고작 석 달 전에 고친 선반이었다.

“이건 뭐지?”

예결은 비범해 보이는 편액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칠괴동에서 깨달음을 얻은 삼백 년 전의 고수 혈마신군이 직접 쓴-”

이 침입자는 탁 노야가 말을 끝마치게 두지 않았다.

“오. 현판인가? 신기해.”

예결은 칠괴동이라 적힌 현판을 들어 올리고 가볍게 힘을 줬다. 그 귀퉁이에서부터 천천히 쪼개지는 게 보였다.

“아니, 아니!”

탁 노야가 허겁지겁 그 부스러기를 주워 담았다.

“음. 먼지.”

“잠시만요.”

삼랑이 손을 휘릭 움직이자 창 하나 없는 동굴 안에 인위적인 바람이 불더니 편액 부스러기를 저 멀리 밀어버렸다.

“음? 뱀뱀이는 그게 마음에 들어?”

예결의 손목에서 고개를 내민 금빛 뱀이 벽에 걸린 백호 가죽에 관심을 보였다. 손을 가져다 대자 그대로 샛노란 불꽃이 튀었다.

“아……!”

탁 노야의 두 눈이 커졌다. 백 년 전, 이곳의 관리자가 하사받았다던 백호 가죽이 한 줌 재로 변하고 있었다.

“흠. 정말 오래된 물건인가 봐. 다 삭았네.”

“다, 당신이 태운 거잖습니까!”

탁 노야를 무시한 채, 예결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리자는 어떻게든 그를 막아보려 했으나 예결의 움직임은 춤추듯 가볍게 탁 노야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신법을 익힌 건가?’

하지만 저이에게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다.

확인을 위해 탁 노야가 출수하려는 찰나, 삼랑이 그의 손목을 금나수로 낚아챘다.

“……감히 주군의 귀빈에게 손을 올리려는 겁니까?”

그녀의 두 눈이 조약돌처럼 어두운 빛을 머금은 채 가라앉았다. 탁 노야는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삼랑의 손을 털어내려 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아니, 아닐세…….”

저절로 작아지는 음성에 노인은 수치심을 느꼈다.

예결은 팔랑팔랑,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단단해 보이는 나무 창살을 발견했다.

“철목으로 만든 나무 살입니다. 실제의 철에 준할 정도로 단단하지요. 소금물에 넣었다가 뺐다 하는 식으로 내구도를 높일 수 있어서 자주 쓰입니다.”

“짠 냄새 같은 건 안 나는데.”

삼랑의 설명에 예결이 고개를 기울이자, 탁 노야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그가 냄새만 맡고 물러나지 않을까, 같은 그런 가당찮은 희망 말이다.

예결은 손을 뻗었다.

‘창살에는 안 닿았다……!’

탁 노야는 초조하게 그의 손만 지켜봤다. 하지만 그가 경계해야 했던 건 예결의 손이 아니라 금빛 뱀이었다.

아까부터 고개를 비죽 내밀고 있던 뱀뱀이는 예결이 하는 양이 재미있었는지 그 창살을 앙 하고 깨물었다. 자그마한 뱀이 철목을 건드린다고 해서 잇자국이나 남겠느냐마는, 뱀뱀이는 무려 천년뇌각망이었다.

화려한 번개가 그 앙증맞은 입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바닷물이니 뭐니 하는 온갖 가공 작업을 거쳤다던 창살이 허무하게도 갈라지기 시작했다.

“음. 여기 내구도가 좀 안 좋네.”

검게 변한 철목의 속을 보게 된 예결은 뻔뻔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삼랑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면, 이곳의 관리자라 나선 노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경악한 얼굴이었다.

“내가 오기 전에 누굴 가뒀으면 다 달아났겠어. 큰일 날 뻔했네.”

자화자찬까지 곁들인 예결의 태도는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뱀뱀이가 직접 닿은 곳은 타들어 가고 남은 곳은 쩌적, 하고 천장에 미치도록 금이 간 창살을 가고 말았다.

예결은 그 금을 가리키며 해맑게 웃었다.

“오. 혹시 여기 유지보수비용 빼돌려서 당호로 사 먹은 거 아냐?”

탁 노야는 더는 부정할 기운도 없었다.

저 갈색 머리 청년이 툭툭 건드릴 때마다 가구의 귀퉁이가 검게 타들어 가고, 이내 먼지가 된 양 형편없이 무너진다.

칠괴동의 천장을 받치는 기둥만은 내버려 두었다지만 예결의 손이 스친 벽에는 금이 갔고 몇 없는 모포 따위엔 불이 옮겨붙었다.

‘벽조목을 만드는 걸 보긴 했지만, 저런 것도 가능하던가?’

예결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삼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호기심 어린 그녀의 태도와 달리, 돌아가는 상황에 탁 노야의 낯은 검게 죽어갔다.

“아, 안 돼! 안 돼!”

노인이 절규했다.

탁 노야.

그는 칠괴동의 관리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마교에서 태어난 그는 강자존의 율법 아래에서 크게 두각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공에 대한 재능이 그리 좋지 않았을뿐더러, 제 한 몸을 살피기에 급급한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탁씨 노인은 불혹이 넘도록 미미한 한직만을 전전하다가 우연찮게 마의의 눈에 들었다. 그 자신이 대단한 무인은 아니었기에 마의는 사람을 등용할 때 경지의 고하보다는 충성스러움을 위주로 살폈다.

탁 노야는 출세를 원했기에 그가 포로들이나 가둬놓는 칠괴동의 관리자가 되었을 때도 이를 넙죽 받아들였다.

한때 통곡과 고통의 신음으로 가득했던 칠괴동은 오가는 이가 갈수록 줄어, 본인의 두 다리로 안과 밖을 오가는 이는 제하량뿐이었다. 탁 노야는 단 한 명의 수인(囚人)을 위하여 충실한 간수 노릇을 하기로 했다.

그는 여전히 천마가 된 제하량과의 첫 대면을 기억했다.

고절한 정파의 무림인을 살해하고 돌아온 제하량은 피를 닦지도 못한 채 칠괴동의 심옥에 스스로를 가뒀다. 현실을 외면하고자 차라리 악몽 속에서 헤매는 티가 났다.

마의로부터 그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던 탁 노야는 상처를 채 치료하지 못한 제하량에게 소금 섞인 얼음물을 끼얹었다.

“일어나라.”

고통의 신음 한 번 내뱉지 않은 사내는 그림처럼 일어나 탁 노야의 뒤를 쫓았다. 아무 표정도 읽을 수 없는 무감한 낯이 보였다. 기이하게도, 순간 소름이 치밀었다.

아니. 아니지.

‘이토록 대단한 무인이 고작 나 따위에게 반항조차 하지 못한다.’

탁 노야는 애써 공포를 외면하기 위해 제 알량한 권력을 즐기길 택했다.

“쯧. 마의께서 부르시는데 제때 응하지 않으면 결국 네게 해가 될 것이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명령에 따를 뿐.

그래도, 마의나 그 제자들에 비하면 탁씨 노인은 대단한 죄를 저지른 건 아니었다.

탁 노야는 마의의 제자들이 그 스승 몰래 제하량의 피를 원했을 때 슬쩍 눈감아 주었다. 명령에 따라야 하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본교의 자비에 기생하는 인간. 이렇게라도 제 몫을 해야지.’

마의에게 적대심을 가진 다른 당주가 제하량을 견제하려 들었을 때, 탁 노야는 윗선의 명령 때문에 물자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고 말하며 그를 굶기고, 화로조차 내어주지 않아 추위와 어둠 속에 방치했다. 어쩔 수 없었다.

‘적당히 화풀이를 받아주는 게 암살당하는 것보단 낫지.’

마의는 수시로 제하량의 상태를 확인하고 불러들였다. 낮이건 밤이건, 칠괴동의 수인은 그의 감시에서 벗어나 쉴 수 없었다. 이 또한 명령 때문이었다.

‘그래도 난 손찌검은 안 하니까.’

제하량이 수상하다 여긴 교주에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긴 했으나 이는 명령에 따른 것이다.

탁 노야가 생각하기에, 모든 건 그의 탓이 아니었다. 그러니 천마가 된 제하량이 자신을 살려둔 게 분명했다.

“이 미천한 노구는 다만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날, 검 한 자루 앞에 죽어 나가는 죄인들 사이에서, 탁 노야는 무릎을 꿇고 소리 높여 제 억울함을 읍소했다.

“그렇다면 이 명령에도 따르겠구나.”

새로이 등극한 천마는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칠괴동을 그에게 내렸다. 그러니 마의며 그 수족이 전부 다 죽어 나갈 때 자신만은 살아남은 것이리라.

적어도 탁 노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한데 지금, 탁 노야가 쌓아 올린 모래성이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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