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98화 (198/203)

198화. 독제비는 참지 않고 (9)

“아무리 천마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해도 이런 일은 묵과할 수 없습니다!”

“음.”

예결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노인이라 그런지 혜안이 있어서 바로 봤다.

자신은 대사형의 총애를 받고 있긴 했다.

‘이게……. 타격을 입으라고 한 말인가?’

그 태연자약한 낯에 탁 노야는 더더욱 열이 올랐다.

“칠괴동은 본교의 오랜 역사가 담긴 곳입니다! 이런 곳을, 이렇게…… 이렇게 부숴 버리다니! 마도육가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마구 삿대질하는 노인의 얼굴에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이 뭐라고!”

“내가 뭐냐니? 노야가 나를 아나?”

예결이 눈을 희번덕이며 떴다.

상대가 움찔했다.

‘기백에서 밀리면 마인도 별거 아니네.’

“대답 못 하네.”

예결은 혀를 찼다. 귀 파고 들으라는 투였다.

“그럼 질문을 바꿔 보자고. 당신이야말로 누구지?”

탁 노야의 입이 벌어졌다가 다물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예결은 그가 곧바로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대사형을 맞이하던 사람 중 중요해 보이는 인간들 얼굴은 기억하는데, 그쪽은 처음 봐서.”

예결은 어깨를 으쓱했다.

가벼운 태도와 달리 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이 노복은 천마님을 수년 전부터 보아왔습니다! 마의의 배신을 가장 먼저 천마께 알려드린 것도 바로 저이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 칠괴동의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탁 노야가 수십, 수백 번을 스스로에게 되뇐 변명이었다.

그토록 충성을 바쳤으니 마땅한 대가를 받은 거라는 위로가 없었다면 그는 오래전에 미쳐버리고 말았으리라.

이런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마의 ‘손님’은 천천히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내 생각에는 말이지.”

예결이 고개를 기울였다.

“대사형이 진짜 수하로 여겼다면 홍여나 진영처럼 옆에 두고 쓰거나, 여기 삼랑처럼 나한테 붙여줬을 거야. 그렇지?”

그의 질문은 칠괴동의 관리자가 아니라 삼랑에게로 향해 있었다.

“글쎄요. 감히 주군의 의도를 가늠하는 건 수하 된 자의 도리는 아니지만…….”

삼랑이 코끝을 찡긋했다.

“주군이 저 사내를 마지막으로 불러들인 게 음…… 삼 년 전이던가?”

다시 말해, 천마가 되고서부터 얼굴 본 적이 없다는 소리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노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통쾌하긴 해도 오래 보고 싶을 정도로 잘난 얼굴도 아니었다.

“천마께서는 저를 잊으신 게 아닙니다! 그분이 처음 교에 왔을 때부터 지내던 칠괴동을 직접 관리하는 것부터가 천마께서 이 노구에게 품은 신뢰를 보여주는 게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합리화했나.

“그래? 하지만 그게 뭐.”

예결은 느릿하게 뱀뱀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대사형이 그랬어. 천마와 한 침상을 쓰는 건 나뿐이라고.”

〈너희 대가리가 그랬다. 어쩔래?〉 전법을 받아칠 수 있는 건 드물다.

“그럼 내가 대사형을 잘 알까, 아니면 기껏해야 삼 년 전에 마지막으로 대사형을 만난 그쪽이 잘 알까?”

탁 노야가 침음했다. 그 일그러진 낯은 영 별로였지만, 일단 조용해진 건 마음에 들었다.

“내가 말하는 건 뭐든 들어주신다고 하셨거든.”

예결이 속눈썹을 팔랑였다.

대단한 미인계를 쓸 생각은 없었다. 예결은 하량 외의 모든 사내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만 해도 비위가 상하는 독보적인 입맛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단지 상대에게 ‘미인계를 쓰는’ 것처럼 보이면 족했다.

“그쪽도 알다시피……. 대사형은 워낙 관대하셔서 실수로 이런 거 없앤다고 혼낼 분도 아니신데.”

예결은 작심하고 사고를 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어딘가에서 마교 말아먹을 종자가 굴러들어와 천마의 눈을 가리고 난리를 친다고 생각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경국지색 뭐 별거 있나. 나라 하나 말아먹으면 그게 경국지색이지.’

심지어 예결은 상대의 심장을 어루만져줄 용의가 있었다.

조신한 에스퍼가 외간 남자를 맨손으로 만질 수는 없으니 급한 대로 벼락이라도 두르고.

“풉.”

아까부터 사내를 위협하듯 예결의 뒤에 서 있던 삼랑에게서 도저히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게 들렸다.

“무, 문 공자. 계속 여기 있으면 위험할 거 같은데요.”

삼랑이 웃음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예결을 잡아끌며 말했다. 아직 칠괴동을 떠받치는 기둥까진 건드리진 않았으나 동굴에 고정된 가구며 창살 같은 걸 여럿 무너뜨렸으니 계속 여기에 있어서 좋을 건 없다.

“알았어. 알았어. 나도 여기 깔려 죽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아, 뱀뱀아!”

예결은 뱀뱀이의 금빛 비늘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항상 몸에 가둬두기만 하던 거대한 힘이 천년뇌각망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예결의 손가락이 저 앞을 가리켰다.

번개 맛 좀 보여주라는 뜻이었다.

오래간만에 포식한 뱀뱀이는 덩실덩실 꼬리를 흔들었다. 예결의 지시대로 기둥을 향해 기어간 뱀뱀이는 벽에 앙증맞은 이를 박아넣었다. 금빛의 뇌전이 팍, 파팍! 하고 튀며 철목 기둥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정말 신통방통하단 말이지.’

예결은 만족스레 웃으면서 동시에 감탄했다. 영물이 인간과 의사소통이 된다는 걸 들은 적 없는데, 뱀뱀이는 매번 그가 뜻하는 바를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오, 이런.”

삼랑은 예결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자신의 뒤로 밀쳤다. 거의 동시에 그녀가 던진 비도는 그 꽁무니에 매달린 실로 솜씨 좋게 뱀뱀이를 휘감아 끌어왔다.

비늘 하나 상하지 않은 뱀뱀이는 주인만큼이나 해맑은 동그란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만약 뱀뱀이가 말할 수 있었다면 처음으로 롤러코스터를 탄 아이처럼 신나! 하고 외치지 않았을까.

우르릉!

저 안쪽에서부터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삼랑은 산도적처럼 예결을 어깨에 둘러메고 칠괴동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꽁무니에는 철걱거리는 쇠사슬을 매단 탁 노야도 함께였다.

칠괴동이 붕괴하고 있었다.

“아…… 아아…….”

숨이 턱 끝에 차오를 때까지 제 발로 달려 나와 가까스로 동굴의 잔해에 깔리지 않은 탁 노야가 입을 벌린 채 경악한 눈으로 제가 묶여 있던 곳을 돌아봤다.

‘역시 저 쇠사슬은 입구까지 나올 수 있게 되어 있었나.’

하량이 일부러 살려놓은 노인인데 정작 삼랑은 그를 구하려 따로 손을 쓰지 않았다.

노인의 피부는 햇빛 한 점 받지 못한 양 창백했다. 그걸 보면 탁 노야는 여태 일부러 밖에 나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어둠 속에서라면 모를까, 더없이 명징한 빛 아래에서는 제가 죄인이라는 걸 숨길 수 없을 테니까.

“세상에.”

‘칠괴동이었던 것’을 돌아보는 삼랑의 눈이 반짝였다.

“세상에!”

그녀는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킥킥대기 시작했다. 그 작은 웃음은 이내 폭소로 번졌다.

실로 무식한 화풀이다.

뒷일 따윈 생각지 않고 냅다 지르고 보는.

하지만 그 탓에 외려 통쾌한 구석이 있었다.

삼랑이 너무 웃는 바람에 흐른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문 공자, 미치셨습니까?”

진짜 거한 사고를 쳤다. 무려 칠괴동의 붕괴라니. 꼴에 역사씩이나 있는 동굴이라 평생 저 자리에 버티고 있을 줄 알았다.

그나마 그걸 없앨 수 있던 제하량만 해도 마의 패거리를 정리한 뒤로는 관심을 끊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몰라. 난 정파 출신에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인데 갑자기 천마한테 납치당해서 십만대산에 감금당했잖아? 그러니까 좀 미칠 수도 있지.”

“이럴 때만 정파…….”

실로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예결의 선득한 시선이 삼랑에게 향했다.

삼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눈을 데굴데굴 굴린 삼랑이 물었다.

“주군이 천마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려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마교를 말아먹으려고?”

그녀는 예결이 이 모든 일을 하는 동기가 궁금했다.

“대사형을 왜 끌어내? 십만대산의 주인이라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데.”

하량은 죽을 고생을 해서 그 자리에 올랐다.

현경, 아니지. 탈마의 경지에 올라 얼마든지 훨훨 털어내고 떠날 수 있게 된 사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가 비단 정마대전을 막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천마가 된 이상, 다시는 그 누구도 하량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다. 그는 권력과 무력, 금력 전부를 손에 쥐었으니까.

힘없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전생의 삶을 기억하는 예결은 하량에게 그걸 놓으라 말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예결이 아는 대사형에게 어울리는 건 영웅이라는 칭송이다. 하지만 평생을 타인의 사정과 무림의 정세에 등 떠밀리고 살아온 사내에게 필요한 건 악당이라는 타이틀이다.

조금쯤 제멋대로 살아도 다들 그러려니 할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해보면 영웅은 손해를 너무 많이 봐.’

제 가이드가 천마라는 이유만으로 에스퍼는 자신의 도덕관을 손쉽게 비틀었다.

예결의 머릿속에 윤리관을 주입하려 애썼던 한국의 센터장이 봤으면 통탄할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여기는 현대가 아니라 중원무림이었다. 잔소리하고 싶어도 시공간을 초월해야 하니 지금 예결을 막을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량조차 이번에는 사제를 말리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마교를 말아먹는다고? 내가 숟가락 좀 얹는다고 여기가 망할 수 있는 구조인가……?”

예결의 질문은 사뭇 진지했다. 삼랑은 저도 모르게 그 가능성을 셈해 보다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거의 찰나 만에 동요를 걷어낸 삼랑은 유들유들한 낯으로 답했다.

“완전 불가능하죠.”

완전 가능할 거다.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문 공자는 규격 외의 생각을 한다.’

상단주가 되자마자 밀수부터 해치웠다. 당연히 내단을 먹을 생각부터 하는 여타 무림인과 달리 영물을 데려다가 벽조목을 대량 생산해서 팔아먹었다. 그뿐이랴, 사기꾼들에게 사기를 치지 않나, 급기야 온 중원인이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십만대산 한복판에서 벼락을 내리쳐 칠괴동을 파괴했다.

저 성질머리라면 마교로 들어오는 협곡에 벽력탄을 잔뜩 깔아놓고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낼지도 몰라.’

이마저도 평범한 삼랑의 머리로 쥐어짤 수 있는 최대의 난장판일 뿐이었으니까.

딱히 마의의 방식에 동의하진 않지만, 저 머리통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저 안에 뇌가 있다지만 예결에게는 뭔가 다른 게 들어 있을 거 같았다.

“어쩐지 그날 저를 불러들여 지금도 누가 칠괴동에 있냐고 물으시더라니…….”

삼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주군의 과거를 듣고 동요하던 문 공자에게 잠시 시간을 주고 돌아가자 예결은 하량이 붙들려 있던 장소의 설명과 그곳으로의 안내를 부탁했다.

주군의 허락만 받아오면 안 될 것 없다고 흔쾌히 답한 삼랑조차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냥, 주군의 과거 흔적을 더듬어 보려는 줄 알았는데…….’

예결이 픽 웃었다.

그는 황망함과 절망에 사로잡힌 탁 노야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무너진 칠괴동의 잔해를 바라봤다.

“내가 일고경성(一顧傾城)의 미인은 아니지만.”

예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뜸을 들이다가 중얼거렸다.

“동굴 하나 정도는 내가 무너뜨릴 수 있잖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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