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99화 (199/203)

199화. 용서 (1)

“뭐?”

아랫사람의 보고에 진영의 입이 쩍 벌어졌다.

“칠괴동이…… 뭐 어째?”

하량을 보좌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까지 경악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영의 동요를 이해한다는 듯, 그에게 급한 보고를 올리던 수하가 설명했다.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 위로 벼락이 몇 번이나 쳤다는 목격자가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자가 헛것을 본 거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진영은 짚이는 구석이 있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표정을 정리했다.

“문 공자가 다녀갔나?”

“예. 지금은 무월당주와 청형전으로 돌아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놈의 천년뇌각망……!’

칠괴동이 붕괴한 원인을 짐작한 진영은 탄식 아닌 탄식을 삼켰다. 그러나 이번 동요는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다.

처음처럼 단정한 태도로 돌아온 진영은 상대에게 고갯짓했다.

“알겠다. 보고를 올릴 테니 돌아가도록.”

“예.”

초조하게 그 자리를 몇 번이나 오가며 마음을 가다듬은 진영은 마지막으로 심호흡했다. 태화전의 길고 고풍스러운 복도를 지나, 너른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장지문 위에 드리운 제 그림자를 보며, 진영은 입을 열었다.

“주군. 진영입니다.”

“들어와라.”

하량은 한참 죽간을 살피는 중이었다.

보통 짙은 색의 옷을 선호하던 이전과 달리, 지금의 그는 하얀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은은하게 들어간 금사 자수가 호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긴 머리카락은 푸른 비단 끈으로 느슨하게 묶여 있었는데, 조금만 움직여도 풀어질 것 같았다.

‘문 공자가 주군께 선물했던 그 비단 끈이군.’

하량이 손에 것 외에도 탁상 위에 색색의 실로 묶인 죽간이 잔뜩 쌓여 있었다. 교를 비워 놓은 시간이 길었던 데다가 돌아오자마자 마도육가 중 공가의 가주를 억류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문 공자와 관련된 일입니다.”

진영의 말에 하량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죽간을 내려놓았다. 차르륵,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결이와?”

살짝 좁아진 미간은 하량의 걱정을 드러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군보다 걱정이 안 되는 사람 아닌가.’

진영은 조금 심란해졌으나 조금 전 들은 보고를 입에 담았다.

“칠괴동이 무너졌습니다.”

“……그 소리였나.”

“문 공자가 마지막에 그곳을 다녀갔다고 합니다.”

진영은 하량이 묻기도 전에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다치진 않으셨습니다.”

하량은 침착해 보였다.

예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진영이 이렇게 침착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고 칠 생각은 없다더니.”

외려 하량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진영의 착각이 아니라면, 그는 즐거워 보였다.

“칠괴동의 붕괴는…… 문제 삼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하량이 그의 수하를 응시했다.

“너는 본좌가 칠괴동을 무너뜨렸다면 뭐라고 말할 생각인가?”

“……그야.”

진영은 그 전에 만류할 거라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그만뒀다.

하늘이 둘로 쪼개질지언정 그는 제 주군의 앞길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 하량의 자비로 잔존했을 뿐, 애당초 그 칠괴동은 삼 년 전에 무너졌어야 하는 곳이다.

“떠오른 대로 후처리하도록.”

하량은 여상한 투로 명했다. 진영이 어떤 판단을 내렸을지 질문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존명.”

미혹 따위는 훌훌 털어버린 진영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위가 있는 곳에 살짝 손을 올려놓은 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았다. 아직은.

***

아쉬움을 머금고 뱀뱀이와 헤어진 예결은 청형전에 들어섰다.

이 복도에는 아주 은은한 빛만 들어올 뿐, 전체적으로 어둑했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몰라도 서늘한 공기가 머물렀다.

태양보다는 달빛을 잡아두기 위해 지어진 전각 같았다.

하량이 불러들일 때가 아니면 시비 한 명 보이지 않는 탓에 청형전은 유난히 거대해 보였다. 중원과 비슷하면서도 이국적인 건축 양식 때문에 화려하게 느껴지는 요소요소들이 눈의 즐거움과 위압감을 동시에 선사했다.

과연 천마가 머무를 법한 공간이다.

‘하지만 쓸쓸해.’

혼자라면 그 사실이 더 피부에 와 닿을 법한 구조였다. 적어도 예결이 느끼기엔 그랬다.

오늘따라 하량이 없을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미적거리던 예결은 복도의 모퉁이를 돌자마자 장지문 너머로 어른어른 비치는 노란 불빛을 발견했다.

“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한 예결은 하량의 거처 바로 앞에 도착했다.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예결의 손이 멈칫했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사형은 원체 조용한 사람인 데다가 평소에는 존재감을 잘 숨기는 편이라 예결도 그가 있는지 없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다.

‘착각일까?’

어쩌면 누군가가 침실을 정리하고 켜놓은 촛불일지도 모른다.

예결은 저 촛불이 만들어낸 하량의 그림자라도 훔쳐보고 싶어 그 앞을 서성였다.

지금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대사형이 돌아왔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만약 이 너머에 제하량이 없다면 실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퍽 쓸쓸한 일이다.

“결아?”

망설이다가 손을 뻗는 찰나, 눈앞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어느 과거에서 몰래 훔쳐보았던 사내처럼, 흰옷을 걸친 하량이 예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여긴 산속이라 쌀쌀한데 왜 밖에 있어.”

홀린 듯 그 손에 이끌려 방에 들어선 예결은 따뜻한 불이 붙은 화로와 하량이 읽다가 내려놓은 듯한 서책을 발견했다. 탁상 한쪽에는 손질 후 내려놓은 듯한 검도 보였다.

예결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걸렸다.

“기다리셨어요?”

빤히 올려다보며 묻자 하량이 예결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었다. 마치 그의 팔 사이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등 뒤로 문이 덜컥,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평소였다면 허공섭물로 문을 닫았을 사내가 직접 손을 쓰는 이유가 퍽 빤했다.

“퍽 재미있는 하루를 보낸 모양이더구나.”

의미심장한 미소가 대사형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벌써 들으셨어요?”

세상 눈치 볼 거 없다는 양 날뛰었던 예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태도로 대사형에게 물었다.

“글쎄. 삼랑과 산책을 다녀온 게 아니었나?”

하량은 의뭉스러운 투로 답했다.

“인제 보니 코가 좀 붉은 것 같기도 하고.”

콧잔등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장난스러웠다.

“눈밭에 구른 강아지도 결이 너보다는 창백하겠구나.”

자신을 납치하다시피 십만대산으로 데려온 이후 곤두서 있던 하량이 상당히 누그러진 태도를 취하는 게 느껴졌다. 여기가 청형전만 아니라면 청해에서 갓 마음을 확인했을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예결은 하량의 손가락에 슬그머니 제 손을 얽고 그를 침상으로 이끌었다. 사제를 한 팔로 다 안고도 남을 정도로 체격이 큰 하량은 버티는 기색조차 없이 예결에게 끌려왔다.

바람에 등이 떠밀리는 얇은 능라가 이처럼 가벼울까?

예결은 하량의 어깨를 꾹 눌러서 앉히고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는 하량의 손을 여전히 꼭 쥔 채 그대로 머리를 대사형의 무릎에 뉘었다.

손도 놓지 않고 싶고, 무릎도 포기하지 않은 채로 편한 자세를 찾으려 꼼지락거리던 예결은 결국 고슴도치처럼 웅크렸다.

지나치게 단단한 하량의 허벅지는 빈말로도 편한 베개라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안정감이 좋았다.

“음.”

눈을 감고 치대던 예결은 하량이 낸 소리에 그를 바라봤다. 하량의 반대편 손이 그의 옷깃 어림에 머물러 있다가 아래로 내려와 예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퍽 자연스러운 연결 동작은 초식에서 초식으로 넘어가는 과정처럼 그럴듯했다. 하나 발랑 까진 예결은 하량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대번에 알아보고 말았다.

‘모른 척. 모르는 척하자.’

눈을 다시 질끈 감은 예결은 연신 뇌까렸다. 하지만 웃음을 참느라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결아…….”

나직하게 흘러나온 하량의 음성이 그답지 않게 불퉁했다.

“편히 웃으렴.”

대사형의 지엄한 허락이 떨어졌다. 가까스로 참고 있던 폭소가 터져 나왔다.

“흐, 흡……. 아니, 큽. 하하, 하하하!”

예결은 거의 울다시피 웃었다.

몸을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배를 부여잡을 필요도 없었다. 웃음이 어느 정도 가신 후에도 킥킥거리던 예결은 몸을 반쯤 돌린 대사형을 발견했다.

그의 등 뒤로는 예결이 항주에서 선물했던 푸른 비단 끈이 늘어져 있었다.

‘미치겠네.’

하얀 옷도, 저 머리 끈도. 얼굴은 감춰도 부끄러움까지 감추질 못하는 서투름마저도 예결을 닦아세운다.

진짜 한입에 털어 넣어도 하나도 안 비릴 것 같다.

꾸물꾸물 몸을 일으킨 예결은 예결은 하량의 어깨에 턱을 괬다.

“소제가 대사형을 기대하게 했나요?”

그 질문에 슬쩍 고개를 돌려 예결의 시선을 피하고 있던 하량의 귀가 새붉게 물들었다.

무림인이라 신체의 변화가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지금 대사형이 느끼는 감정의 등락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예결은 뒤에서 끌어안듯 그의 허리를 가두고 손을 뻗어 옷깃을 벌렸다. 구렁이 담 넘듯 장포 속으로 파고든 예결의 손이 하량의 탄탄한 가슴 위로 미끄러졌다.

조금은 뜨겁게 느껴지는 체온과 함께 기분 좋은 울림이 쿵, 쿵 하고 그의 손가락 끝을 간질였다.

잠시 망설인 하량이 고개를 숙이더니 예결의 한쪽 손을 끌어다가 손톱 끝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네가…… 즐거운 하루를 보낸 듯하여.”

지척에 있는 대사형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손끝에 톡, 톡 하고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한다.

“또 부탁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간지럽다.

예결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빼내려다가 붙들렸다. 움찔한 손가락 끝에 와 닿은 입술이 뭉그러지는 감각이 선명하게 와 닿는다.

불과 물로 제련한 철검보다 날카롭고 단단하게 벼려진 사내는 예결에게만은 무르기 짝이 없었다.

말캉하고, 부드럽고, 연약하고, 또 섬세하다.

“바로 생각나는 건 없는데.”

예결이 혼잣말하듯 속삭였다.

“근데 대사형은 가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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