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200화 (200/203)

200화. 용서 (2)

“어디에 쓰려고?”

하량의 질문에 예결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글쎄요. 책도 읽어 주고, 같이 산책도 하고, 또 밥도 함께 먹고.”

떠오르는 대로 하나하나 헤아리는 목소리는 점점 감정이 묻어났다.

“자장가 불러주고. 재워 주고.”

대사형의 등이 살짝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가 충분히 동요했다고 판단한 예결은 하량의 머리 끈을 풀어버렸다. 잘 모여 있던 머리카락이 흩어지는 감각에 하량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사형의 목을 끌어안았다. 첫 사냥에 성공한 아이처럼 들뜬 눈을 빛내며, 예결은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제 몸에 겹치는 사제의 몸에 하량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허수아비처럼 풀썩 쓰러지는 사내의 위에 올라탄 예결은 입술을 잠시 떼고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아랫입술을 살짝살짝 빨아들이며, 예결은 하량의 손을 침상 기둥으로 가져가 제가 뺏어버린 비단 끈으로 묶었다.

센터에서 배우고 써본 적이 없어서 조금 엉성하긴 했지만, 잡아당길수록 오히려 손목을 옭아매게 되어 있는 매듭이었다.

‘역시, 뭐든 배워두면 쓸모가 있네.’

보통 때라면 끈을 찢어서 구속을 벗어났을 하량은 하필 그 천이 사용되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두 다리 사이에 사내를 가둔 예결은 하량의 옷을 잡아 벌리고 그의 가슴 위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매번 느낀 거지만, 보기에만 좋은 게 아니라 이렇게 만졌을 때의 감촉도 좋다. 부드러운 살갗은 누를 때마다 탄력 있게 되돌아온다. 손가락 아래에서 탄탄한 육체가 움찔할 때마다 차곡차곡 수납해 놓은 가학심이 눈을 빛냈다.

고개 숙인 예결은 재차 하량에게 키스했다. 그리 대단치도 않은 입맞춤이었다. 하나 칼도 들어가지 않을 하량의 강건한 육신이 그의 아래에 깔린 채 벗어나고자 요동쳤다. 달아나기 위해서라기에는 하량의 눈에 사나운 허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예결은 그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눈웃음쳤다. 허리를 조금 들썩이자 제법 단단해진 성기의 윤곽이 천 너머로 느껴졌다.

부러 깔고 앉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반응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런…….”

나직한 탄식이 대사형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예결은 그의 코끝을 살짝 깨물고 뺨을 핥으며 하량의 반응을 살폈다.

평소의 단정함이라곤 오간 데 없는 서늘한 낯의 사내가 그 얼굴을 곤혹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잠깐 사이 손을 풀어보려 한 눈치였으나 예결에게 정신이 팔린 채라 미처 해내지 못한 눈치였다.

예결이 하량에게 선물했던 푸른 비단 끈은 퍽 좋은 인질이었다. 조금 기어오르려 하면 잘도 상황을 뒤집어 사제를 농락하던 사내가 꼼짝도 못 하고 있지 않나.

흐트러진 사내의 붉어진 낯은 잔뜩 희롱당한 자의 것이었다. 붉어진 눈가를 지분거리며 예결은 상기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예뻐요.”

이 순간을 더 즐기고 싶기도 하고,

몽롱한 눈을 한 예결은 하량이 살짝 입술을 벌리자 홀린 듯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당혹을 갈무리한 사내의 입맞춤은 능수능란했다.

흑귀와 초야를 치를 땐 이보다 더 거칠고 짐승 같았는데, 지금은 예결의 성감대를 속속들이 알아낸 후라 그런지 고작 입맞춤만으로도 아래를 적실 것 같았다.

“으응…….”

입천장을 자극하는 하량의 혀에 애써 눌러 삼키던 신음이 샜다.

다디달다.

기대로 작은 가슴을 부풀리며 하량의 입맞춤을 더 깊게 받아들이던 예결은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에 깜짝 놀랐다.

아래를 내려다본 예결은 자신이 묶어놓았던 대사형의 손이 자유를 찾았음을 발견했다. 그가 입맞춤에 한눈판 사이, 하량은 어느새 손을 묶고 있던 끈을 풀어버렸다.

“아. 좀 더 오래갈 줄 알았는데.”

예결은 아쉬움과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으로 자유가 된 대사형의 손을 바라봤다.

그 반응에 하량이 낮게 웃었다.

“끈이 찢어질까 조심하느라 충분히 오래 걸렸는데.”

“그래도요.”

노골적으로 욕심을 내비치는 예결은 여전히 달아날 기미 없이 그의 몸 위에 앉아 있었다.

십만대산에 돌아온 첫날, 사제를 가둬두고 범했던 하량은 이런 음탕한 농지거리는커녕 일상적인 대화조차 나눌 수 없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그 몸을 곁에 묶어 두었으니 그걸로 만족하자고 스스로를 달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제 앞에 있는 사제는 여전히 정인 간의 밀월을 나누는 것처럼 굴었다. 두려움을 삼키기 위해 내비치는 가식이나 현실을 잊으려 발버둥 치는 기색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청해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이상해.”

하량이 조금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게 꿈 같아.”

들뜬 눈에 한숨이 내려앉았다.

“왜요?”

솔직히 예결도 비슷한 생각을 했기에 하량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네가 나를 용서할 리가 없지 않니?”

그러니 하량이 느끼는 이 모든 건 착각일 터다. 그는 아직도 서녕의 골목에서 사제가 내비쳤던 절망과 비통함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예결의 낯에 머물렀던 건 꾸며낼 수도, 쉬이 삼킬 수도 없는 감정이었다.

충격을 금치 못하는 사제의 낯을 보며, 하량은 너무도 빨리 깨진 행복에 비소를 머금었다.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성을 세워놓고, 그게 무너지질 않길 바란 스스로가 지독하게 멍청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사형을 용서할 이유가 없잖아요.”

지독한 선고였다.

하량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으려 한 순간, 그의 어깨를 그러쥐고 있던 예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용서할 수 없는 건, 대사형이 아니라 저 자신이에요.”

뚝뚝 씹어뱉듯 말한 음성에서는 경멸과 분노가 묻어났다.

당혹한 하량은 예결의 표정을 보려고 했지만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돌린 예결은 그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결아.”

제 몸을 짚고 있던 사제의 손을 끌어다가 입술로 가져간 하량이 그 끝에 입을 맞췄다.

“……결아.”

달래듯 재차 이어지는 부름에도 예결은 반응하지 않았다.

반응할 수가 없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울 같은 게 없어도 지금 일그러진 제 얼굴이 얼마나 못났을지 안다. 잘도 이리저리 숨기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굴려고 했다. 오늘 하량의 반응을 보며 그럭저럭 성공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사형이 자책하듯 말하는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저 안에 뭉쳐 놓았던 그악스러운 감정의 덩어리들이 아우성쳤다. 검게 죽어 있다고 생각한 속이 그렇게 시끄러울 수가 없었다. 다시 조용해질 때까지 꾹꾹 눌러 담아야 하는데, 하필 제하량이 한 공간에 있었다.

“결아, 제발 나를 봐주렴.”

손끝에 다시 입술이 와 닿았다.

“응?”

조르듯 말하는 목소리가 그답지 않은 어리광을 담고 있었다. 예결은 하량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필사적이라는 걸 가까스로 이해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왜. 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고.”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는지 하량이 잠시 침묵했다.

“……그런 무서운 말을 입에 담는 거니?”

답을 듣기 전까진 도저히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입술을 짓씹던 예결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말 안 할래요.”

대사형이 천마가 되어 괴롭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그를 살린 걸 후회하게 되었다고.

앞선 말은 필사적으로 살아남은 하량의 삶을 비난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후자의 말은, 예결조차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하량이 살아남아 겪은 일이 제 책임 같아 괴로울지언정, 그를 대신해 죽은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예결이 도려내고 싶은 건, 그 후에 자신이 느꼈던 자기만족뿐이다.

삼랑에게서 들은 그 모든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예결은 결국 하량이 살아 있어서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아무리 대사형이 관대하다지마는, 이 말을 듣고 나면 그의 사제가 끔찍하게 느껴질 거다.

“내가 알고 싶다고 하여도?”

“……안 돼요.”

예결의 음성은 하염없이 흔들렸다.

그는 조금 용기를 내서 하량을 바라봤다. 선량하기 짝이 없는 두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내를.

일어나고 싶었는데, 하량이 놓아주지 않는다. 벗어나긴 글렀구나, 싶은데도 예결은 주춤 물러나다가 저를 잡아당긴 손아귀에 그대로 끌려갔다.

하량의 몸에 푹, 파묻힌 예결은 등허리를 감싸오는 손에 결국 일어나길 포기했다.

대사형의 가슴께를,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제가 잔뜩 들쑤셔 놓은 옷깃 위를 지분대며 움직였다. 하량은 그 성가시기 짝이 없는 손길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저를 밀어내라는 무언의 시위임을 알아챈 게 분명했다.

“……이 우형은 네게 용서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리될 모양이구나.”

“제게 무슨 잘못이라도 하셨어요? 용서는 죄지은 사람이 청하는 거잖아요.”

예결은 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반문했다.

하량은 사제의 몸을 꼭 끌어안은 채 얼굴을 숨겼다.

온갖 죄를 지으면서도 태양을 마주 봤던 사내는 예결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정확히는, 그의 갈색 눈에 비칠 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너를 속였으니까.”

대사형의 음성에 괴로움이 묻어났다.

“천마가 되었다는 걸 숨기고 상인이라고. 그리 말하지 않았니. 그 외에도 정말 숱하게, 숱하게 너를 속였다. 진실로는 거짓말을 숨길 수 없어서, 계속 거짓을 더해갔지.”

흑귀라는 신분은 또 언제 털어놓을 수 있을까?

지은 죄가 크니 그 위에 다른 걸 얹어놓기가 두려웠다. 예결의 저울이 이보다 더 기울면 어찌 될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량은 예결을 곁에 옭아매기 위해 저지른 짓을 후회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그는 사제를 탐하길 포기하지 않으리라.

하량은 그런 인간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는데 이제 겨우 인정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날 용서할 이유가 없다고 말할 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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