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용서 (5)
예결은 그 말에 쉬이 답할 수 없었다.
대사형이 원한다면야 통장 비밀번호도 알려줄 수 있었다. 피자의 뻑뻑한 크러스트만 대신 먹어줄 수도 있었고 비가 잔뜩 내리고 눈이 가득 쌓인 궂은날 하량을 업고 다닐 수도 있었다.
정말로 그날 죽은 게 맞는지,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는지 묻는다고 해도, 어쩌면 말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스스로를 용서하라는 것만은 어려웠다.
“……그건.”
예결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려울 것 같아요.”
베갯머리송사를 해 보라고 도발해 놓고는, 고개를 내젓는 게 면구해 예결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가 어쩌기도 전에 턱을 붙든 하량이 입술을 부딪쳐왔다.
아랫입술을 빨고 혀를 얽으며 숨까지 싹싹 발라먹는 접문은 어딘지 모르게 절박한 구석이 있었다. 처음엔 조금 당황했던 예결은 이내 적극적으로 응했다. 하량이 원하는 걸 해줄 수 없다면 이거라도 잘하고 싶었다.
천천히 입술을 뗀 사내가 괴로움이 일그러졌던 예결의 미간을 꾹꾹 눌러 피더니 입가를 엄지로 훑었다.
희롱의 연장선이라기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손길에 예결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계속 마주 보고 있기가 거북했다.
제 밑바닥을 다 헤아릴 것처럼 검고 깊은 눈에 실망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어. 천마 된 자의 체면이 있지.”
추궁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으나 상대의 음성은 예결의 예상보다 가벼웠다.
“이 우형도 날로 먹을 생각은 없단다.”
기사멸조는 이미 해치운 뒤였던 대사형을 날로 먹어 치운 예결의 흔적기관이 따끔거렸다.
그런데 날로 먹는다니?
“……네?”
“겨우 이 정도론 부족한 거겠지. 나도 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올려 본 하량의 낯에는 선선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앞으로도 노력할 테니, 마음 내키거들랑 내 청을 들어주렴.”
예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토록 가벼운 반응이라니.
“그게, 무슨. 읍.”
예결이 의문을 다 입에 담기도 전에 하량은 다시 입술을 붙여왔다.
먼젓번과 달리 두 번째 접문은 상냥하기만 했다. 혀조차 섞지 않고 쪽, 쪽 하고 부딪혔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탓에 입술 위에 약간의 온기와 아쉬움이 머물렀다.
간질간질한 감촉 때문인지, 예결은 제가 느끼던 가슴의 수런거림조차 설렘 때문이라 착각할 것 같았다.
“좋은 얼굴이야.”
언제 다시 입 맞출지 몰라서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멈칫거리는 사제를 보며 목적을 달성한 하량은 나직하게 웃었다.
비밀 많은 욕심쟁이인 데다가 이제 거짓말쟁이이기까지 하다고?
어차피 처음부터 신뢰해서 곁에 들인 것이 아니기에 실망이나 배신감 따위를 느끼지 않는다.
그저 이제 예결이 본인이 무언갈 숨기고 있음을 시인할 정도의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것이 기쁠 뿐이었다.
사제가 품은 비밀이 자신에게 독을 먹이고, 가슴에 비수를 찌른들 뭐 어떤가?
목숨은 하량이 예결에게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하찮은 거였다.
“이번엔 네가 해주렴.”
예결은 하량의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꼼지락거리다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등을 일으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대사형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눈꺼풀 위에, 콧잔등 위에, 그리고 코끝과 입술 언저리에.
“옳지…….”
급소를 전부 내어준 채 무방비하게 눈을 감은 사내의 낯은 지독하게 선량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예결은 이상하게 눈물이 비어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전부 주려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엇이라고.
“저도…….”
예결은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저도 노력해 볼게요.”
하량은 무어라 더 말하지 않고 예결을 끌어안았다. 제 몸이 다 파묻힐 정도로 너른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예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가 어디에서도 얻지 못했던 안식이 여기에 있었다.
***
산비탈, 다 쓰러져가는 움막이 세워져 있었다. 앞에는 반쯤 찌그러진 밥그릇이며 타다 만 장작 같은 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사람 사는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아직 예 머무르시는 건가.‘
황 걸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안휘에서 거지들이 굶어 죽을 일은 없게 해주겠다는 남궁운의 약조를 받고 이 자리에 섰으나 잘한 짓인지는 걱정이었다.
“계, 계십니까?”
바싹 마른 입술로 부르자, 그 집이라 말하기 어려운 공간에서 한 노인이 튀어나왔다. 그는 손에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예가 어디라고 오느냐? 썩 꺼져라!”
그냥 성질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부스스한 빗자루의 궤적을 따라 타구봉법의 스물여덟 가지 변초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악! 아! 스승님! 스승님……!”
희고 성성한 수염을 기른 거지 노인이 저와 꼭 같은 거지 노인을 두들겨 패는 건 그야말로 드문 장면이었다.
움막에서 튀어나온 노인이 봉을 쓴다면, 황 걸개는 취팔선장으로 이를 막아섰다. 그러나 둘 사이의 역량 차이는 명백했다.
두 사람이 맞부딪히며 딱! 딱! 하는 마찰음이 들릴 때마다 흡사 회초리에 맞기라도 한 것 같은 자국이 황 걸개의 손바닥에 모질게 새겨졌다.
“다시는! 이! 늙은이를! 찾지! 말라고! 내 말하지! 않았느냐!”
말 한 마디 마디마다 끊어 외치며 빗자루를 휘두르는 노인의 기세는 흉험했다.
지금은 팔결제자가 되어 개방의 장로 대우를 받고 있다지만, 스승의 앞에 선 황 걸개는 갓 개방에 들어간 새끼거지나 다를 바 없었다.
“제발 스승님!”
스승의 매타작을 버텨내는 게 고작이던 황 걸개가 틈을 노려 외쳤다.
“여기, 손님! 손님이 와 있습니다!”
빗자루가 잠시 멈췄다. 그의 눈이 이글이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이 불민한 제자에게 동행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까닭에 더 화가 난 거였다.
“무림맹 것들은 다시 안 본다고 했을 텐데?”
노환을 핑계로 방주 자리에서 물러난 이답지 않은 기세였다.
황 걸개는 입맛이 썼다. 스승이 물러난 이유가 노환이 아님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 무림맹 사람이 아닙니다.”
기다렸다는 듯, 황 걸개와 동행했던 남궁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 걸개는 그 운 좋은 등장에 눈물을 찔끔 삼켰다. 이 나이가 되어 주책인 걸 알지만 여전히 스승의 매는 아팠다.
“적 노사를 뵙습니다. 소인은 남궁세가의 남궁운이라 합니다.”
남궁운이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창천검룡이로군.”
과연 개방의 전 방주답게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남궁운이 바로 누군지 알아볼 정도의 식견을 갖춘 모양이었다.
“부족하지만 강호 동도들에게 그런 허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적노개는 잠시 멈췄던 빗자루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모르는 이 앞에서 제자를 두들겨 팰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상대가 무림맹에서 온 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기실, 그가 황 걸개를 두들겨 팬 건 따라온 이에 대한 시위에 가까웠다.
직접 키워낸 제자도 이렇게 가차 없이 다루는데, 탐탁지 않은 상대를 대상으로는 얼마나 무력시위를 하겠는가?
“손님을 맞이할 만한 곳도 아닌데 잘도 달고 왔구나.”
황 걸개에게 쏘아붙인 적노개가 지친 얼굴로 남궁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 적노개는 조금의 오싹함을 느꼈다. 생김새야 다르다지만 헌앙하고 훤칠한 겉모습이며 고고한 분위기가 그가 옛날에 알던 젊은이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젊은 용이여, 이미 은퇴해 초야에 파묻힌 노구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왔소?”
손으로 긴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모습엔 현기가 묻어났다.
조금 전까지 빗자루를 미친 듯이 휘두르던 노거지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미 은퇴한 이 노부에게 묻는 것보다는 저기 있는 못난 놈에게 묻는 것이 빠를 것이오.”
지친 낯을 한 적노개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남궁운이 입을 열었다.
“이번 대의 천마에 대해 알고 싶어 노선배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적노개의 낯이 무섭게 굳었다. 그의 눈길이 황 걸개를 향했다.
[네 녀석이 말했냐?]
제하량과 적노개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의 것이었다. 그에 대해 아는 건 개방 내에서도 극소수였다.
[아니, 그게. 이번에…… 청해의 서녕성에서 천마를 마주쳤습니다. 그가 한 소년을 납치해 갔는데…… 하필 남궁 공자의 지인이지 뭡니까.]
‘그가? 납치를?’
영 믿기지 않는 소리에 적노개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가 변질되었다고 한들 그에게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책임지지 못한 죄만 있을 뿐이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평생을 배운 것 없이 살았다 보니 소림 땡중들이 만사에 동원하는 염불을 외워봐도 번뇌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그 뜻을 전부 이해하기엔 그의 배움이 너무 얇고, 심마가 너무 깊은 탓이다.
[다만 젊은 후기지수의 치기로만은 느껴지지 않아 스승님께 안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편하시다면 바로 데리고 산을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황 걸개가 조심스럽게 덧붙인 전음에 적노개가 손짓했다.
“……손님에게 내올 만큼 변변한 차는 없소. 그래도 좋다면 안으로 들어오도록.”
움막 안은 좁았다. 겨우 한 몸을 구겨 뉠 정도의 공간이 전부로, 이슬과 햇볕을 피하는 게 다일 것 같았다. 한 귀퉁이에는 물을 받아놓은 항아리가 보였고 말린 건육이며 벽곡단 같은 게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 와중에도 움막 안에선 악취가 아니라 은은한 약초 향 같은 것이 났다.
적노개는 남궁운이 본 그 어떤 거지와도 달랐다. 특히 거적때기를 걸치고도 어딘지 모르게 초탈한 도인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전 개방의 방주라더니, 과연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다.’
“남궁 공자도 알다시피, 내 방주직에서 물러난 후로는 무림 돌아가는 일이 어둡소. 그러니 그쪽이 바라는 정보를 전부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네만. 먼저 정보를 준다면 이 노부도 남궁 공자의 질문에 성의 성심껏 답하기로 하지.”
굳이 말을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인 화술이 인상 깊었다.
“노선배님께서 먼저 말씀하십시오.”
적노개는 지체 없이 물었다.
“천마가 납치해간 자네의 지인, 그가 누군지 알고 싶네.”
남궁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런 질문을 받으리라곤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습니다. 천마가 서녕성에서 납치해간 자는 곤륜의 제자로, 이름은 문예결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고요하던 적노개의 눈에 핏발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