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회귀
가볍다.
아무런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육신도, 정신도 모두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현실같이 생생하면서도 정신을 차리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이 느낌은…….
‘…꿈?’
도윤이 꿈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순간 눈앞에 누군가가 나타난다.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으려는 듯 한참이나 눈을 비비던 도윤이 화들짝 놀란다.
‘분명 꿈인 것 같은데 의식한 대로 행동할 수 있다?’
속으로 당황한 도윤이 잠시 후 눈가에서 손을 떼어 냈다.
“……!”
이내 눈앞에 있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도윤이 쩍 하고 입을 벌렸다.
깔끔하게 쳐낸 스포츠 머리.
마치 영국 신사처럼 차려입은 깔끔한 정장.
일견에도 고풍스러워 보이는 금테 안경.
무뚝뚝한 인상 사이로 옅게 지은 미소.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얼굴을 발견한 도윤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
와락!
정면을 향해 달려간 도윤이 눈앞에 있는 남자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남자가 한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던 도윤이 순간 당황한다.
‘…어? 아버지가 이렇게 컸었나?’
도윤의 키는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었기 때문에 상당히 작은 키에 속하던 아버지의 품에 쏙 안기는 현재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꿈이니까.’
이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도윤이 머리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손길을 만끽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자신을 떼어 내는 손길을 느낀 도윤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본다.
“아버지?”
잠시 슬픈 눈빛으로 도윤을 바라보던 남자가 이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아버지의 손에 쥐어진 회중시계를 바라본 도윤이 멍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아버지… 유품…….”
커다란 저택이 고풍스럽게 양각된 회중시계는 얼핏 보기에도 언제 제작되었는지 추측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어 보였다.
물론 도윤은 그 회중시계를 잘 알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금고에 보관되어 있던 유일한 유품이었고, 지금까지 집 안 어딘가에 보관하고 있었으니까.
달칵.
이내 남자가 회중시계 위로 솟아올라 있는 버튼을 누르자 저택이 양각된 뚜껑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그 순간…….
파앗!
“으윽…….”
회중시계에서 터져 나오는 밝은 빛에 도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그와 동시에 회중시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시곗바늘 소리가 쉼 없이 들려온다.
빛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하자 살며시 눈을 뜬 도윤이 시계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아버지는 온데간데없고 회중시계만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 상태로 회중시계의 바늘이 수백, 수천 배는 빠른 속도로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다.
문제는…….
‘왜 역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야? 아니 그보다 아버지는 대체 어디로…….’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도윤이 순간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떴다.
이번에는 회중시계마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지갯빛 알록달록한 주사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당신은 죽었습니다! 시간을 되돌리기 원하십니까? Y/N]
도윤이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을 멍청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건 마치 컴퓨터 게임 같지 않은가?
이윽고 꿈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도윤이 홀린 듯 ‘Y’ 글자에 손을 가져다 댔다.
[환영합니다! 최초 대상자에게 최고 등급의 다이아 주사위 1개를 지급합니다!]
새로운 홀로그램이 떠오름과 동시에 무지갯빛 주사위가 마치 다이아몬드를 깎아 만든 듯한 주사위로 바뀌었다.
[이제부터 퀘스트를 완료함에 따라 대상자에게 ‘레인보우’ 주사위를 지급합니다.]
[퀘스트 난이도와 상관없이 보상은 주사위 1개로 고정됩니다!]
[주사위를 던짐으로써 주사위의 등급을 결정합니다.]
[주사위의 등급은 브론즈, 실버, 골드, 플레티넘, 다이아로 나뉩니다.]
[주사위 등급에 따라 대상자에게 지급될 능력이 결정됩니다.]
[당신의 운을 시험하세요!]
수없이 떠오른 홀로그램이 사라짐과 동시에 눈앞의 주사위가 도윤의 손안에 쏙 하고 들어온다.
주사위가 스스로 움직여 손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그 황당한 광경에 도윤이 화들짝 놀라 주사위를 놓친다.
툭, 데구르르르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가 한참이나 굴러가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뇌?”
마치 사람의 뇌를 그려 놓은 듯한 그림을 보며 도윤이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이아 등급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능력은 대상자의 운에 따라 랜덤하게 결정됩니다!]
[SSS등급, ‘지식의 대가’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지식의 대가(SSS) - 패시브
대상자의 기억력, 집중력, 논리력, 추론력, 직관력 등 두뇌 활동과 관련된 일체의 능력치가 대폭 향상됩니다!
[SSS등급 스킬을 최초로 획득하였습니다! 축하드려요!]
눈앞에 떠오른 수많은 홀로그램을 도윤이 멍청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꿈이라기에는 너무 실감 나는 거 아니야……?”
도윤이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볼을 꼬집었다.
그러기를 잠시, 도윤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한눈파는 사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주사위가 어느새 도윤의 몸집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 상태로 허공에 둥둥 떠오른 주사위가 더욱더 크기를 부풀려 가기 시작한다.
“으… 으악!!!!!!”
이내 족히 3층짜리 건물 크기는 될 정도로 커진 주사위가 자신을 덮쳐 오자 도윤이 비명을 질렀다.
철푸덕!
빠르게 뒷걸음질 치던 도윤이 이내 발을 헛디뎌 뒤로 쓰러진다.
“안… 안 돼!”
이윽고 코앞까지 다가온 주사위가 그대로 도윤을 덮쳤다.
쿵!
* * *
쿵!
“으악!”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도윤이 비명을 질렀다.
“아으… 머리야.”
호들갑스럽게 뒷머리를 문지르던 도윤이 이내 정신을 차린다.
“…여기는?”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낯선 천장에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도윤이 눈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뒷머리가 툭 튀어나온 아날로그 TV.
경찰 수험서로 가득한 책장.
가로로 된 데스크톱 위에 마치 일체형처럼 붙어 있는 모니터.
약 5평쯤 되어 보이는 방 안에 커다란 헹거가 있음에도 옷가지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분명 자신의 방이 아님에도 낯설지 않은 느낌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도윤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예전 집이잖아!?”
고등학생 무렵, 외식업계의 큰손이었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을 때 살던 집.
‘군대 전역하고 단비가 둘이 살기 너무 크다고 징징대서 팔았었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도윤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도윤에게 소중한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주르륵.
순간 눈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도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단비야…….”
삐리리리리릭, 삐리리리리릭, 삐리리리리릭.
도윤의 흐느끼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던 고요한 방 안에 순간 요란한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가슴을 부여잡은 채 한참이나 엎드려 있던 도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내 소리의 근원지가 책상 위라는 사실을 깨달은 도윤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이건…….”
일명 PCS폰이라 불리는 생애 처음 구입한 휴대폰.
잠시 후 휴대폰 액정 화면에 떠오른 발신자를 확인한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숏 레인>
도윤이 플립형으로 된 얇은 덮개를 재빠르게 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그 상태로 도윤이 휴대폰을 든 채 침묵하고 있자 잠시 후 꿈에 그리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오빠! 뭐야, 안 들리나?”
뚝.
이윽고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도윤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설마… 설마…….”
삐리리리리릭.
또다시 들려오기 시작하는 벨소리에 도윤이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뭐야? 고장 난 거 아니네. 내 말 안 들렸어?”
순간 도윤의 목이 콱 하고 잠겨 들었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앳되지만 분명히 도윤의 기억 속에 있는 단비의 목소리가 맞았다.
“단… 크흑… 단비야.”
“뭐야. 오빠, 울어? 뭔데, 무슨 일이야? 왜 울어? 오빠, 지금 어디야?”
“끄흑… 흑…….”
“오빠! 울지 말고 말을 해 봐. 지금 어디야? 집으로 갈까?”
“…응, 응…….”
“딱 기다려. 바로 갈 테니까. 조금 멀리 나와 있어서 한 30분 정도 걸릴 거야”
이내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도윤이 귀에서 휴대폰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뚝, 뚝, 뚝.
굵은 눈물이 휴대폰 액정 위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기를 잠시.
도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홈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화면이 떠오른다.
<1998/9/16/수 10:32>
확 하고 눈에 들어오는 날짜에 도윤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활짝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참을 혼자 중얼거리던 도윤이 이내 무언가 생각났는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회중시계, 주사위!”
갑자기 과거로 돌아오게 된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미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도윤이 다급히 헹거 아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도윤의 두 손에 작은 상자가 끌려 나온다.
“콜록, 콜록.”
묵은 먼지가 피어오르며 꿉꿉한 냄새가 코끝을 찌르자 잠시 인상을 찌푸린 도윤이 빠르게 상자를 열어젖혔다.
그 순간…….
번쩍!
“……!”
순간 상자 안에서 터져 나오는 밝은 빛에 도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그 강렬한 빛은 눈을 감싼 눈꺼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윤의 눈을 찔러 들어온다.
이상한 건 빛은 눈을 찔러 들어오는데 통증은 머리에서 느껴진다는 것이다.
“으으윽…….”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쥔 도윤이 신음을 내뱉었다.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었음에도 도윤은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뜨거웠다.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머리가 뜨거워 미칠 것 같았다.
벌레가 뇌를 파먹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빛이 스스로 악의를 품은 듯 끊임없이 괴롭혔고 어느 순간 도윤은 정신을 잃었다.
꿈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닥에 엎드려 잠시 몸을 꿈틀거리던 도윤이 이내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도윤이 이내 옆에 있던 휴대폰을 움켜쥐더니 빠르게 덮개를 열었다.
<1998/9/16/수 10:58>
이윽고 휴대폰에 떠오른 액정 화면을 확인한 도윤이 활짝 미소 지었다.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라고. 젠장…….”
도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꿈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꿈에서 그리던 그 얼굴을 볼 수 있다.
잠시 흐느끼던 도윤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상태로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게 꿈이 아니라면 나는 지금 과거로 돌아왔다는 말인데.’
마치 머릿속에 둥둥 떠 있는 듯한 기억들이 조금씩 퍼즐을 맞춰 가기 시작한다.
‘지금이 1998년이 맞다면 현재 내 나이는 스물둘, 무려 19년을 거슬러 올라왔다’
그 당시 부모님이 사고로 일찍 돌아가시고 어린 도윤과 단비를 돌보기 위해 할머니가 집으로 오셨다.
그 때문에 도윤은 안심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군에 입대할 수 있었고, 또래에 비해 상당히 빠른 나이에 전역할 수 있었다.
말년에 IMF 외환 위기가 전국을 강타했을 때도 부모님이 남긴 유산 덕분에 큰 걱정은 없었다.
전역을 한 달 앞두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8살이나 어린 여동생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중대장의 배려로 내리 한 달 가까이 휴가를 나올 수 있었고, 12월이라면 아마 그런 일이 있고도 3개월은 훌쩍 지났을 때 일이다.
도윤이 습관적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법원, 오영철과 오길태, 독직폭행(瀆職暴行), 집 앞 골목길,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던 도윤이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나… 죽었는데?”
힐긋 복부를 내려다본 도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날카로운 단도가 복부에 몇 번이고 쑤셔 박히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하… 하하하하하하…….”
이내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던 도윤이 현관문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철커덕, 끼이익.
쇠로 된 문고리가 돌아가는가 싶더니 잠시 후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아, 홀애비 냄새! 집안 꼴은 이게 뭐야? 오빠, 내가 집 어지르지 말라고 했지?”
곧이어 귓가를 때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도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교복 차림에 짧은 단발머리, 새하얀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귀염성이 묻어나는 얼굴은 앳되었지만 분명 도윤이 기억하고 있는 그 얼굴이 맞았다.
“단… 단비야.”
“뭐… 뭐야? 그 징글맞은 표정은? 꼭 죽었다 되살아난 사람 보는 것처럼…….”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천천히 다가오는 도윤을 보며 단비가 움찔 몸을 떨었다.
“잠깐, 스톱! 오빠, 멈춰 봐. 일단 코 좀 닦고…….”
이내 현관 바로 앞까지 다가온 도윤이 눈앞에 있는 단비를 와락 끌어안았다.
“단비야… 단비야…….”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는 도윤을 보며 단비가 몸을 움찔 떨었다.
잠시 그 상태로 멍하니 있던 단비가 확 하고 도윤을 밀쳐냈다.
“이… 이… 이……!”
단비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앙증맞은 선홍빛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바보!”
콰앙!
홱 하고 몸을 돌린 단비가 그대로 현관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멍하니 굳어 있던 도윤이 이내 아차 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아… 사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