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각성
도윤이 제자리에 털썩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본다.
“이걸로 과거로 돌아온 건 확실한데…….”
순간 도윤이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아픈 거 보니까 꿈도 아니고.”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조용히 중얼거리던 도윤이 그대로 몸을 돌려 단비가 나간 현관문을 쳐다봤다.
방금까지 단비가 있었던 자리에서 기분 좋은 채취가 나자 옅게 미소 지은 도윤이 순간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응?”
바닥에서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도윤이 손을 뻗어 그 물체를 움켜쥐었다.
“단비 귀걸이잖아?”
도윤이 귀걸이를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회상에 빠져들었다.
* * *
“와! 저 귀걸이 진짜 이쁘다!”
“아, 넌 이쁜 게 뭐가 그렇게 많냐? 빨리 좀 가자, 이러다가 백화점 전 코너 다 돌겠네.”
“안 사 줄 거면 말이나 이쁘게 해라?”
“즐~”
“뭐? 즐? 그게 뭐야?”
“있어, 바보야”
“에잇!”
퍼억!
“악!”
그대로 정강이를 걷어차인 도윤이 제자리에 펄쩍 뛰었다.
“바보 오빠놈.”
“이게 오냐오냐해 줬더니, 확 그냥!”
“흥이다!”
말을 마친 단비가 훽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단비를 보며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도윤이 귀걸이가 진열된 유리장에 천천히 다가간다.
“저… 이거 얼마예요?”
“어서오세요, 고객님~ 인물만큼이나 보는 안목도 있으시네요! 그 귀걸이는 이번 계절 한정 상품으로 나온…….”
순간 홱 하고 고개를 돌린 단비가 빠르게 다가온다.
“아, 됐어! 오빠 돈 없는 거 다 아는데, 무슨…….”
“얼마라구요?”
단비에게 손을 휘휘 저은 도윤이 직원에게 재차 묻는다.
“동생이 너무 이쁘네요!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제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할인 같은 거 잘 안 해 주는데, 특별히 고객님한테만 해 드릴게요.”
“네? 할인요?”
애써 무관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단비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귀걸이도 주인이 있다고, 이렇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주인이 나타났는데 안 깎아 드리면 안 되죠! 10퍼센트 특별 디씨해 드릴게요.”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단비를 힐긋 바라본 도윤이 피식 웃으며 직원에게 묻는다.
“그래서 얼만데요?”
“네, 고객님. 원래 3만 원인데 디씨해서 2만 7천 원에…….”
“오빠, 나 이런 거 진짜 필요 없어. 그냥 가자. 자세히 보니까 내 스타일도 아니야. 아나바다 벼룩시장에 이쁜 거 많아.”
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매를 잡아끄는 단비를 보며 도윤이 재차 직원에게 묻는다.
“그런데… 이 귀걸이에 꽃은 뭐예요?”
도윤의 물음에 그냥 가 버릴세라 직원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고객님, 진짜 센스 있으시다. 그 귀걸이 모양은 보신 대로 꽃이 맞구요. 물망초라는 꽃인데 혹시 들어 보셨나요?”
“아, 네. 들어 봤어요. 모양이 참 이쁘네요. 그거로 주세요”
“네~ 고객님! 바로 포장해 드릴게요.”
“오빠, 진짜 괜찮……!”
“됐어. 내가 사 주고 싶어서 그래.”
“…….”
이내 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단비를 보며 도윤이 피식 웃었다.
“대신, 나 소원 하나 들어줘.”
“……?”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단비를 보며 도윤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단비꼬야! 한 번 해 줘.”
“…….”
순간 표정을 굳히는 단비를 보며 도윤이 눈을 반짝인다.
“응? 한 번만 해 줘.”
재차 말을 잇는 도윤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 단비가 ‘스읍’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단비꼬야! 단비꼬야! 애애애액! 사 줘! 사 줘! 애애애애액!”
“푸핫!”
순간 빵 하고 웃음을 터뜨린 도윤을 발견한 단비가 팍 하고 인상을 찌푸린다.
“남들 보는 앞에서 여동생 우습게 만드니까 기분 좋으신가 봐요? 오라버니?”
“엥? 우습다고? 누가? 니가?”
“…….”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는 단비를 보며 도윤이 말을 잇는다.
“졸라 귀여운데?”
“…….”
이내 픽 하고 웃음 지은 단비가 입을 열었다.
“오빠, 내가 ‘졸라’ 그런 단어 쓰지 말라고 했지. 하여튼 오빠는 매번 말해도…….”
“여기 계산 좀 해 주세요!”
잔소리가 시작될 기색이 보이자 도윤이 급히 지갑을 꺼내었다.
“남매가 되게 사이가 좋으시네요. 흔치 않은데…….”
“하하…….”
직원의 말에 멋쩍게 웃던 도윤이 순간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직원에게 묻는다.
“저, 그런데 물망초도 꽃말이 있나요?”
“물론이죠”
곧바로 대답하는 직원을 도윤이 잠시 바라보고 있자 이내 직원이 말을 잇는다.
“물망초는 영어의 ‘forget me not.’을 번역한 거예요. 그래서 그 꽃말도 그대로 직역하면 되죠.”
“…….”
“나를 잊지 마세요”
“…….”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랍니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손아귀에 있는 귀걸이를 이리저리 굴리던 도윤이 상념에서 벗어나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
잠시 고개를 갸웃한 도윤이 다시 귀걸이를 바라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거지?’
죽기 전 생까지 따지면 족히 20년은 된 일이었다.
아무리 소중한 추억이라지만 대화 하나하나까지 기억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왜…….”
도윤이 말끝을 흐리던 도윤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기 시작했다.
부모 잃은 없는 집 자식 소리 듣기 싫어 단비와 큰맘 먹고 구입한 GL PCS 싸이언 휴대폰.
스타크래프트 하겠답시고 거금 200만 원이나 주고 구입한 우대 코러스 프로넷 컴퓨터.
살짝 열린 단비의 방 사이로 HOT 브로마이드가 시멘트 벽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발매와 동시에 히트를 친 유승준의 ‘나나나’ 음반 CD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도윤이 멍하게 입을 벌렸다.
단비의 귀걸이뿐만이 아니었다.
휴대폰, 컴퓨터는 물론이고 집 안 곳곳에 있는 물건들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샀는지 모조리 기억났다.
“이게 무슨…….”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도윤이 집 안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팔락, 팔락
적막한 집 안에 도윤이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진다.
터억!
이내 손에 쥔 전화번호부를 덮은 도윤이 눈을 감더니 잠시 후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3쪽 미미다방 051-234-xxxx, 127쪽 태양이발소 051-218-xxxx, 231쪽 이장님 016-585-xxxx…….”
한참이나 중얼거리던 도윤이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쪽수까지… 어떻게 다 기억나는 거지?”
과거로 돌아온 것도 황당한데 머리까지 똑똑해진 것 같다.
그것도 보통 천재가 아니라 한 번 본 건 모조리 외워 버리는 천재.
‘중학생 속독왕처럼 된 건가?’
문득 예전 ‘세상에 저런 일이’ 라는 프로그램에서 30초 만에 300페이지 책 한 권을 모두 읽고 이해하는 중학생을 떠올린 도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도윤이 이내 번쩍 고개를 들더니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 * *
인근에서 가장 큰 서점에 도착한 도윤이 천천히 책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도윤은 책을 통해 자신에게 일어난 괴이한 현상들을 조금이나마 파악한 후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예정이었다.
‘만약 미래의 일이 또 다시 반복된다면…….’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도윤이 맹목적인 운명론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운명을 아예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 끔찍한 일을 사전에 피한다 하더라도 이미 이어진 악연의 고리가 완전히 끊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복수심과 두 가지 불안감은 도윤이 오씨 일가를 반드시 무너뜨리도록 다짐하게 만들었다.
다시 그 끔찍한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 그리고 이를 외면했을 때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과거로 돌아왔다 하더라도 오씨 일가의 힘은 여전히 강하다.’
대형 로펌 변호사, 대한민국 10대 그룹에 항상 손꼽히는 명성 그룹의 오너 일가.
그 거대한 힘 앞에 마음속에서 살포시 쳐드는 두려움을 애써 떨쳐 낸 도윤이 밝게 미소 지었다.
‘할 수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이윽고 처음의 목적을 상기하고 암기, 타임슬립과 관련된 책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광수생각>
<산에는 꽃이 피네>
<1999년 지구멸망>
도윤의 시선이 베스트셀러 책장에 이르러 잠시 멈칫한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약 1년 앞으로 다가온 1999년 9월 9일! 인류는 멸망할 것인가?>
“응, 안 해.”
자연스럽게 제목 밑의 소개글을 읽어 나가던 도윤이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멈칫.
그대로 베스트셀러 책장을 지나치려던 도윤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휙.
빠르게 고개를 돌린 도윤의 시야로 한 권의 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법고시 전국 모의고사>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에 재벌 집안. 그런 거물들을 고작 형사 신분으로 잡아넣는 게 가능할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도윤이 그 자리에 서서 홀린 듯 책장을 넘겨 나가기 시작했다.
팔락, 팔락, 팔락.
평일 이른 아침, 한산한 서점 내부에 도윤이 넘기는 책장소리만이 간간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터억!
어느새 책을 모두 읽은 도윤이 턱 소리가 날 정도로 책을 덮었다.
‘기억난다. 한 번 공부한 적 있는 형법은 모조리 이해까지 될 정도로. 그뿐만 아니라…….’
도윤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민법이나 헌법 같은 접해 보지 않은 과목들. 책 한번 제대로 본 적 없는 그 과목들이 마치 인강을 들은 것처럼 전부 이해되다니…….’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에 도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직(?) 형사 출신이었기 때문에 검찰과 경찰의 권한 차이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는 도윤이었다.
만약 또다시 경찰이 되어 오길태 일가(家)의 비리를 잡아내겠답시고 날뛰다가는 그대로 생매장당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검사가 된다면, 그리고 남은 기간 검찰 내 커리어를 충분히 쌓아 놓는다면…….
‘놈들을 무너뜨리는 것도 꿈은 아니다.’
도윤이 눈을 감은 채 오길태 일가를 무너뜨릴 계획을 머릿속으로 차분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신분만 생각하면 안 된다. 구속된 수용자한테까지 손을 뻗칠 수 있는 걸로 봤을 때 보이지 않는 힘 또한 엄청날 터.’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서점 출입문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법고시 폐지는 먼 훗날의 얘기. 지금 시점에서 문제는 2006년 이전에 합격해야 한다는 것.’
2006년을 기점으로 사법고시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법학 과목 35학점을 이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도윤이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곧바로 시험 준비를 하려면 지금이 최적이었다.
딸랑.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긴 도윤이 그대로 문을 밀어내자 조그마한 종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날씨, 눈가를 찌르는 따스한 햇살에 기분 좋게 미소 지은 도윤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스읍~ 후우~”
그대로 땅을 박찬 도윤이 얼마나 달렸을까?
땀을 뻘뻘 흘리며 동네 뒤, 인적이 드문 야트막한 언덕 위에 도착한 도윤이 큰 소리로 외친다.
“반드시! 쳐부숴 주마! 개자식들아아아아아아아아!!!!”
푸드득.
순간 터져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근처에 있던 새들이 놀라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든 도윤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기를 잠시…….
이내 수화기 너머로 귀여운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바보 오빠야.”
“단비야.”
“…왜? 목소리가 좀 느끼하다?”
“…….”
단비의 반문에 도윤이 잠시 머뭇거렸다.
단비가 죽기 전, 자주 말해 주지 못해 끝내 한으로 남았던 그 세 글자.
이윽고 도윤이 휴대폰에 대고 큰 목소리로 외친다.
“사랑해, 내 동생!”
“아, 진짜! 오늘 미쳤나 봐!”
뚝.
곧바로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도윤이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본다.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도윤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언덕 곳곳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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