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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5화 (5/174)

5화 합격

사람들은 흔히 사법고시를 옛날 과거 급제에 비유하곤 한다.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춘향아, 과거 급제하여 꼭 돌아오도록 하겠다.’

‘어머니, 소자 꼭 장원급제하여 돌아오겠습니다.’

과거(科擧)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이외에도 상당히 많이 있었고, 일단 급제만 하면 평민도 양반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수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도전했다.

그러나 급제하는 선비들은 그야말로 극소수.

대부분의 선비들은 낡은 골방에 틀어박혀 평생을 글공부에만 매달리다 여생을 마감한다.

이는 현대의 사법고시도 마찬가지다.

추운 겨울, 낡은 패딩 하나에 의지한 채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몇 년이고 좁은 고시원 생활을 이어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오랜 고시 생활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고시생의 이야기는 더 이상 사회적 이슈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가 고시 생활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잃어버린 청춘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포기하는 순간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낙오한 고시생들에게 남는 것은?

수년 간의 고시 생활로 쌓은 법학적 지식?

20대 청춘 대부분을 한곳에 바친 성실과 열정?

그 따위 것은 이 나라에 있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단지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와 어느덧 주름으로 가득한 부모님의 얼굴에서 지난 세월의 흔적만을 느낄 뿐이다.

반대로 사법고시에 합격하게 되면 그때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1차만 합격해도 동네에 현수막이 걸린다.

합격자의 출신 초, 중, 고등학교는 난리가 난다.

마치 로또라도 당첨된 듯 안부조차 없던 친척들에게서 수없이 많은 축하 전화가 걸려 온다.

시골 촌 동네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을 일컬어 ‘개천에서 용 났다.’ 라고 표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공부 좀 한다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시험.

평민이 양반으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 종말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은행 중 하나였던 제일은행이 IMF의 직격탄을 맞아 뉴브리지 캐피탈에 헐값으로 매각되어 비판적 여론이 들끓던 1999년 12월의 겨울.

고시 생활을 시작한 지 햇수로 2년 만에, 나는… 양반이 되었다.

* * *

합격 통지서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긋지긋한 노량진역을 뒤로하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버스 안에서 도윤이 손때 가득한 형법 책을 펼쳐 든다.

그동안의 노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책 안은 수없이 많은 필기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한 장, 한 장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겨 나가던 도윤이 이내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을 때 행동을 멈췄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합격한다! 할 수 있다!>

흰 여백에 조그마한 글씨로 쓰여 있는 글자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은 도윤이 밑에 있는 글자를 계속 읽어 내려간다.

<단비 지키기, 오씨 일가 타도!>

“밥은 먹고 다니나.”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도윤이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혹여 마음 심란해질까 꺼 둔 휴대폰 전원 버튼을 도윤이 조심스럽게 눌렀다.

“말도 없이 갑자기 찾아가면 놀랄 텐데…….”

즐겨찾기를 뒤적이던 도윤이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우우웅, 우우웅.

짧은 진동음과 함께 화면에 떠오른 수신자를 확인한 도윤이 피식 미소 지었다.

“양반은 안 되겠다.”

이윽고 도윤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수화기 넘어로 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뭐야? 오늘은 어쩐 일로 휴대폰 안 꺼 뒀대?”

“왠지 모르게 님의 전화가 올 것 같아서 말이야.”

“님 얼굴도 잊어버리겠네.”

픽하고 웃은 단비가 중얼거렸다.

“이제 시험 4개월 남았지? 이번에 막 합격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이어지는 단비의 말에 도윤이 멈칫한다.

1998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가을, 집 근처 도서관에 무거운 엉덩이를 깔고 앉기 시작한 날.

무슨 공부를 하려고 갑자기 도서관으로 출퇴근하냐고 묻는 단비에게 그저 경찰관이 하고 싶노라 얘기했다.

때문에 지금도 단비는 도윤이 7급 경찰간부 시험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도윤이 순간 장난스러운 미소로 대답한다.

“나, 이제 그만 포기할까 봐.”

“뭐!?”

도윤이 말을 마치자마자 휴대폰 너머로 하이톤의 고성이 들려왔다.

“갑자기 왜!? 공부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포기야!?”

“2년 해 보니까 대충 감이 오네. ‘내 수준으로 이 공부는 무리구나.’ 라고.”

“뭐?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얏!? 오빠가 지금 포기하면? 지난 2년은 뭐가 돼? 아깝지도 않아?”

“그래서 포기하는 거야.”

“뭐?”

“니 말대로 공무원 수험생들은… 포기하는 순간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 흔히 말하는 스팩 쌓기와는 다르니까 다른 회사에 취직하려고 해도 오랜 수험 생활은 마이너스 요소일 뿐이지.”

“…….”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던 36살 형이 옥상으로 조용히 부르더라. 평소에 보던 츄리닝은 어디로 내다 버렸는지 말끔하게 정장까지 차려입고 말이야.”

“…….”

“옥상 바닥에는 손때 묻은 두꺼운 수험서들로 가득했어.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더니 그 형이 말하더라. 책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단비의 반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윤이 말을 잇는다.

“말하지 않아도 그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어.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지.”

“…….”

“한 10분 정도 말없이 담배만 태우던 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더라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

도윤의 말에 단비가 할 말을 잃었다.

“평생을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사신 분인데, 오매불망 아들의 합격 소식만 기다리시던 분인데, 못난 아들 공부하는데 방해될까 연락 한 번 제대로 못 했대. 임종도 못 지켜 드렸다며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하더라.”

“…되잖아.”

“어?”

“합격하면 되잖아! 오빠 말은 떨어졌을 때의 상황의 한 가지 예를 든 것뿐이잖아! 포기를 위한 핑계일 뿐이야. 그런 건 너무 비겁해! 하늘에 계신 엄마, 아빠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래, 핑계지.”

“…….”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도윤의 눈빛이 마치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듯 아련하게 변해 간다.

“바닥에 널브러진 수험서들을 하나씩 불태우면서 그 형이 중얼거리더라. ‘안녕, 10년을 함께한 내 청춘아.’ 라고.”

“그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

수화기 넘어로 물기 섞인 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조금 장난친다는 게 나도 모르게 그때 생각이 나서…….’

도윤이 잠시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이내 단비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그래서 오빠는 만족해?”

“응?”

“여기서 그만두는 것. 만족하냐구. 최소한 미련은 남기지 말아야 될 것 아냐?”

단비의 물음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도윤이 대답한다.

“그래.”

이어지는 도윤의 말에 짧게 한숨을 내쉰 단비가 계속 말한다.

“그럼 됐어. 마음먹었으면 짐 정리해서 빨리 돌아와. 취직 준비하기 아직 그리 늦은 건 아니니까.”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뭐?”

“아니, 그냥. 너무 쿨하달까…….”

“하고 싶은 것 해 봤고, 미련도 없다는데 내가 뭐라고 할 게 뭐 있어?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백수인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교육시키면 사람 구실은 하겠지.”

“…….”

단비의 말에 도윤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싫어? 그럼 향후 계획을 서류로 만들어서 나한테 제출하세요. 나 이제 방학이니까 집에 갈 거야. 검사할 거니까.”

“…….”

“아 참, 선생님이 이번 주중에 오빠 한번 데려오라고 하시던데…….”

여전히 침묵하는 도윤을 보며 단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이?”

“응, 진로 문제로… 원래 부모님 중 한 분이 오시면 되는 건데 우리 집 사정 아셔서 오빠가 와도 된다고 하더라고.”

“…….”

“아! 부담스러우면 안 와도 돼. 내가 잘 얘기할…….”

“갈게.”

도윤이 단비의 말을 중간에서 끊고 대답했다.

“응? 진짜?”

“그래, 진작 인사 한번 드렸어야 하는 건데… 가야지.”

“그럼 오빠 내일 온다고 선생님께 얘기해 놓을게!”

“뭐? 내일?”

“방학 일주일도 안 남아서 왠만하면 그 전에 시간 내달라고 하셨거든. 바로 전할게! 오빠, 나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잠… 잠깐!”

“끊는다. 다른 약속 잡지 마!”

뚝.

이내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도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갑작스러운데…….”

말끝을 흐리던 도윤이 순간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내가 단비 학교에 찾아간 적이 있던가?”

회귀 전 기억을 떠올리던 도윤이 이내 고개를 젓는다.

이 무렵부터 도윤은 형사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간 기억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순간 단비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오빠 노릇 한 번 제대로 안 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애를 방치했었네. 한심하다, 진짜.”

씁쓸한 마음에 창가로 시선을 돌리자 창문에 반사된 더벅머리가 눈에 띄었다.

“집에 가자마자 머리부터 정리해야겠다.”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도윤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몸을 뒤척이던 도윤이 이윽고 눈을 떴다.

“……!”

세상이 온통 하얗다.

눈을 감기 전까지 분명 덜컹거리는 버스 안이었는데 어느새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빠르게 몸을일으킨 도윤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이내 눈을 부릅떴다.

[‘사법고시 합격’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꿈이… 아니었어?”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을 보며 도윤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과거로 돌아왔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하지만 꿈속에서 본 주사위는 그 이후 눈앞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꿈으로만 치부했었다.

“그럼 진짜… 내 안에 무엇인가 들어와 있는 건가?”

사법고시를 준비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머릿속에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라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아무래도 진짜였나 보다.

[레인보우 주사위를 획득하였습니다!]

[주사위를 굴려주세요!]

어느새 손안에 들어온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던 도윤이 이내 눈을 빛냈다.

“타임 슬립, 1년만에 사법고시를 패스할 정도로 똑똑해진 머리. 만약 이게 전부 현실이라면…….”

혼자 중얼거리던 도윤이 씨익 웃으며 손에 쥔 주사위를 힘껏 던졌다.

투욱, 툭, 툭, 데구르르르.

이내 주사위가 제자리에 멈췄고, 금빛 면이 반짝거리며 도윤의 눈에 들어온다.

[골드 등급 주사위를 획득하였습니다!]

[주사위를 한 번 더 굴려 주세요.]

또다시 떠오른 홀로그램에 도윤이 지체 없이 주사위를 굴렸다.

툭, 툭, 데구르르르.

이전에 마치 사람의 뇌와 같은 그림과 달리 이번에는 명상에 잠겨 있는 사람 그림에 이르러 주사위가 멈춰 섰다.

[골드 등급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능력은 대상자의 운에 따라 랜덤하게 결정됩니다!]

[A등급, ‘군주의 위엄’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군주의 위엄(A) - 패시브

위엄 스탯이 생성됩니다.

대상자의 위엄 수치에 따라 사람들이 스스로 자세를 낮춥니다.

또한 위엄 수치에 따라 인재를 영입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을 바라보는 도윤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허탈한 듯 웃음을 흘리던 도윤이 이내 광소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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