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명성그룹의 또 다른 자제
“하핫, 말에 가시가 있는데? 싸우려고 온 것 아니니까 진정하라고. 나는 단지 인재를 영입하고 싶을 뿐이니까 말이야.”
오성춘이 자못 실눈을 동그랗게 뜨며 과장되게 손사래 쳤다.
“인재? 니가 뭐가 아쉬워서?”
“에이, 아무런 꿍꿍이도 없으니까 그런 눈초리로 쳐다보지 마라. 그저 그룹 같은 걸 만들고 싶을 뿐이니까. 일종의 동아리랄까?”
“동아리?”
장호식의 반문에 오성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알다시피 이쪽 바닥이 특히 학연을 많이 따지잖아? 나는 단지 학벌 때문에 능력 있는 인재들이 초야에 묻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런 것치곤 동아리 인원 대부분이 너희 고조선 대학교 출신인 것 같은데?”
장호식이 힐끔 오성춘의 뒤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겠는데 이건 절대 내가 강요한 게 아니야. 전부 자발적으로 참여한 거지. 나를 저기 있는 속물들과 같이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오성춘이 중앙에 있는 다른 두 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학교 출신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출신들도 벌써 참석했다고? 여기 이 친구! 우리 학교 라이벌 대학 출신인데 이번 사시 차석 합격자야. 내가 가장 먼저 영입한 인재지.”
오성춘의 소개와 동시에 뒤쪽에 있던 네 사람 중 후덕한 인상의 남자가 앞으로 나온다.
“김영재입니다. 대KS 그룹의 자제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영재의 말에 장호식이 미간을 찌푸렸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집안에 대해 알게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호식을 이런 식으로 대했다.
또래는 물론 아버지뻘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조차 장호식의 앞에서 굽실거렸다.
인간 장호식이 아닌 KS 그룹 오너 일가의 막내 자제.
사람들의 그런 태도가 싫어서 스스로 미친 듯이 노력했고 결국 사법고시마저 합격했는데 아직도 이런 식이다.
장호식이 말없이 팩하고 고개를 돌리자 김영재가 무안한 듯 멋쩍게 웃었다.
“하하하. 우리 호식이, 어지간히 기분이 나쁜가 보네. 뭐, 당장은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까 긍정적으로 한번 생각해 달라고.”
“그런 거였군.”
순간 호식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잇던 오성춘이 움찔한다.
“……?”
오성춘이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도윤이 입을 열었다.
“다른 재벌가에 비해 인원이 적은 명성 그룹의 오너 오씨 일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오씨 일가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항상 생각했지.”
“너는 누구지?”
오성춘의 물음에도 아랑곳없이 도윤이 말을 잇는다.
“악습 중 하나인 학연이라는 고리를 끊어 낸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뛰어넘는 동아리라는 새로운 울타리로. 물론 동아리 회장은 당신이겠죠?”
“그야 뭐 내가 만들 거니까. 나는 딱히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으니까 적당한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지 회장 자리를 넘겨줄 수도…….”
“아니, 당신은 절대 회장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 없습니다.”
“…왜지?”
오성춘이 의아한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며 묻는다.
“당신은 그저 당신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들이 필요할 뿐이니까요.”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오성춘을 보며 도윤이 말을 잇는다.
“학연을 뛰어넘는 동아리를 만들자. 출신 지역, 학교를 불문하고 관심 있는 인재들은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다. 같은 동아리 소속 사람들은 언제가 되었든 서로 힘이 되어 주자.”
“그래. 지연, 혈연, 학연에 얽매이지 않는 전혀 새로운 집단. 원한다면 조건 없이 사법연수원생이라면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지. 참으로 이상적이지 않은가?”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죠.”
“…….”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한곳에 묶은 인재들을 명성 그룹으로 끌어들인다. 그게 당신의 최종 목표겠죠?”
“……!”
오성춘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겠죠. 알면서도 묵인한 이유는 일종의 보험 아닌가요? 그것도 대명성 그룹이라는 이름의 보험 말이죠.”
“…….”
“그런 이유로… 동아리 회장은 반드시 당신이 되어야겠죠. 명성 그룹이라는 떡밥이 없는 동아리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큰 메리트가 없을 테니까”
오성춘이 이제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하핫, 소설 쓰는 실력이 뛰어나군. 혹시 작가 지망생인가? 니 말에는 중요한 어폐가 있다.”
“…….”
“동아리 가입과 탈퇴가 당사자들의 자유인 것처럼 우리 회사에 취직할지 말지도 본인들의 자유다. 내가 강제할 수 없지. 내 목표가 인재를 끌어들이는 거라고 했는데… 니 말대로 뛰어난 인재가 보인다면 제안은 해 보겠지만 거절하면 나로서도 딱히 방법이 없지 않나?”
“그래서 제가 말했지 않나요? 일종의 보험이라고.”
“…….”
“실제 명성 그룹에 갈지, 안 갈지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그저 보험일 뿐이니까.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
“뛰어난 인재를 초기에 남들보다 빨리 캐치할 수 있다는 것, 설령 명성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더라도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미리 친분은 쌓아 놓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말끝을 흐리며 오성춘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도윤이 말을 잇는다.
“동아리 인원의 절반, 아니 그 절반의 절반만 영입할 수 있어도 당신에게는 아쉬울 게 전혀 없겠죠. 맨땅에 헤딩 하듯이 영입 제의를 하는 것보다는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을 테니까요.”
짝, 짝, 짝.
마침내 도윤의 말을 모두 들은 오성춘이 두 손바닥으로 소리 나게 박수를 쳤다.
“하하하하하하! 정말 재능 있는 소설가 친구군. 이봐, 호식이. 이런 재미있는 친구를 알고 있었으면 나한테도 소개 좀 시켜 주지 그랬나? 조금 섭섭해지려고 하네.”
말을 마친 오성춘이 도윤을 바라본다.
“요 근처에서는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혹시 어느 집안 자제신가?”
은근히 출신까지 물어 오는 오성춘을 보며 도윤이 입을 열었다.
“강도윤. 부산에서 올라왔고 고졸 출신입니다. 당신과 달리 서민이라 아마 본 적도 없을 겁니다.”
“서민? 고졸?”
오성춘의 눈빛에 순간 경멸의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허탈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던 오성춘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근본도 없는 고졸 나부랭이 새끼가 운 좋게 분수에 맞지 않은 시험에 합격하고 나한테 설교질을 했다?”
“오성춘!”
순간 장호식이 큰 소리로 외쳤다.
“넌 닥치고 있어. 더러운 첩출 새끼야.”
“……!”
인상을 굳힌 채 침묵을 지키던 도윤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KS 그룹의 비화를 들어 버렸다.
“이 개새끼가…….”
장호식이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꽈악 말아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에 아랑곳없이 오성춘이 뱁새 같은 눈을 치켜뜨며 도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남들이 어렵다, 어렵다, 하는 시험 합격하니까 니가 뭐라도 되는 것 같지? 벌써 세상 다 가진 것 같고, 세상에 있는 나쁜 놈들 잡아넣을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러지?”
“…….”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도윤을 보며 오성춘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을 잇는다.
“그런데 이걸 어째? 현실은 정반대인데.”
오성춘이 옷깃에 달려 있는 명성 그룹 배지를 가리키며 계속 말한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지. 우리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계층의 사람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지배당하는 피지배 계층의 사람들. 신분제가 폐지되었다? 그거 다 개소리야.”
“…….”
“귀족이라는 명칭이 재벌이라는 이름으로, 노예라는 명칭이 서민 혹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왠 줄 알아?”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도윤을 보며 오성춘이 말한다.
“여전히 귀족이 노예들을 지배하는 사회니까! 날 때부터 천한 것들은 어린 시절부터 노력하고 또 노력하지. 어떻게 해서든 그 천한 신분을 벗어나려고 말이야.”
“…….”
“그렇게 노력해서 남들한테 성공했다는 소리 듣는 사람들? 우리 회사 직원이 돼. 비로소 정식으로 노예가 되었을 뿐인데 그게 좋다며 펄쩍 뛰고 난리가 나지.”
“…….”
“공무원은 다를 것 같나? 당장 우리 아버지 전화 한 통이면 검찰총장이 스무 살은 어린 계집과 떡을 치다가도 팬티 한 장만 걸치고 뛰쳐나올걸?”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옆에 있던 김영재가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오성춘의 도윤의 멱살을 거칠게 놓았다.
“노예면 노예답게. 주제에 맞게 살아, 새끼야. 주제넘는 말 지껄이지 말고. 운 좋게 주제넘는 시험 턱걸이로 합격했다고 니 신분 바뀌는 것 아니다?”
“이봐, 강도윤이라고 했나?”
오성춘에 이어 김영재가 입을 열었다.
“사시 합격했다고 끝이 아니다. 또 다른 경쟁의 시작일 뿐이지. 니 연수원 성적에 따라 퇴직할 때까지 지방에서 국선 사건만 맡을 수도 있다.”
“오~ 그거 멋진데? 우리 영재 형이 합격자도 다 같은 합격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 달라고. 급이 있잖아? 내 기대가 상당히 커요. 하하하하.”
말을 마친 오성춘이 김영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합격자도 다 같은 합격자가 아니라고 했나?”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던 오성춘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한다.
“했나? 말이 짧…….”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너희 가족의 말 한 마디에 버선발로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말 한 마디로 너희 가족을 버선발로 뛰쳐나오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걸 내가 보여 줄게.”
“그래도 이 새끼가…….”
콧김을 내뿜으며 달려들려는 오성춘을 김영재가 막아선다.
“노예의 치기 어린 말일 뿐입니다. 결국 지방 한구석에서 도태될 운명인 놈. 제가 실력으로 확실히 짓밟아 놓겠습니다.”
“크흠! 내 영재 형만 믿습니다.”
짐짓 불편한 기침을 토한 오성춘이 홱 하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우리 지역 말로다가 가오는 졸라게 잡는데… 한 다이 할 자신은 있나?”
도윤의 말에 홀로 남은 김영재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급의 차이를 보여 주지.”
말을 마친 김영재도 오성춘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도윤이 빤히 바라보고 있자 장호식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 친구. 내가 속은 참 시원한데 말이야… 괜찮겠어? 저놈은 별거 아니지만 저놈 뒤에 있는 명성이라는 이름은 우습게 볼 게 아니야.”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도윤을 보며 겁먹은 것으로 오해한 장호식이 사람 좋은 미소로 말한다.
“에잇! 내놓은 자식이긴 하지만… 명성에서 개수작 부리면 내가 아버지한테 잘 얘기해 볼게. 걱정 말고 이 친구만 믿어!”
제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외치는 장호식을 보며 도윤이 피식 웃었다.
“말이라도 고맙네.”
“어? 지금 말뿐인 놈이라고 욕한 거지? 나 진짜 그 정도 얘기는 할 수 있다?”
“그래,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는 도윤을 한차례 쏘아본 장호식이 말을 잇는다.
“그런데… 정말 저놈 찍어 누를 수 있겠어? 명문대 출신에 나름 차석으로 합격한 놈인데…….”
김영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장호식이 말끝을 흐렸다.
“뭐, 수석도 아니고 차석인데, 이길 수 있겠지?”
태연하게 대답하는 도윤을 보며 장호식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만난 지 30분도 안 된 친구야. 나는 진심으로 니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하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하나, 둘. 곧이어 제31기 사법연수원 입교식 행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어느새 강당 2층까지 연수원생의 가족들로 가득 들어찼고, 스피커를 타고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강당 구석구석으로 울려 퍼졌다.
“입교식에 앞서 연수원생 대표의 선서가 있겠습니다.”
“그 수석이 이제 곧 등장할 것 같은데? 어떤 놈인지 궁금하다.”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장호식이 도윤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입교생 대표, 강도윤. 앞으로.”
“강… 도윤?”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장호식이 이내 단상을 향해 걸어 나가는 도윤을 발견하고는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말… 말도 안 돼.”
경악으로 물든 장호식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