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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10화 (10/174)

10화 실습

1년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2000년, 그 특별한 숫자의 해에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땅덩어리를 가진 국가, 러시아에서는 향후 20년 이상을 군림할 독재자, 푸틴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남한의 대통령과 북한의 독재자가 남북 분단 이후 사상 최초로 평양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고, DJ는 한국인으로는 최초이자 유일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세계 최강국, 미국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으로 유명한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이웃 나라에서는 훗날 일본의 5대 미스터리 사건으로 불릴 세타가야 일가족 살인사건이 발생해 전 국민이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크고 굵직한 일들이 지구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 도윤은 비교적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법시험은 ‘합격이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합격한 이후에도 공부할 양이 무지막지하게 많다는 뜻이다.

고시생 시절에는 그저 합격할 때까지 특별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7과목만 달달 외우면 된다.

그에 비해 사법시험을 패스한 사법연수생은?

한 학기에 배울 과목이 9~10개, 그 엄청난 양을 4개월 만에 공부하여 시험을 치러야 한다.

성적은 곧 진로를 결정했고, 동기라는 이름의 경쟁자들은 밤낮으로 코피를 쏟았다.

실제 고시생이 공부를 하다가 사망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지만, 사법연수생이 공부를 하다가 사망하는 경우는 더러 있었다.

물론, 게임과도 같은 능력이 있는 도윤은 예외였다.

공부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반복 학습하는 동기들에 비해, 도윤은 한 번 머릿속에 집어넣은 지식은 절대 잊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도윤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고, 회귀 전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틈틈이 노트에 정리해 놓기 시작했다.

명성 그룹에 대한 기사를 따로 스크랩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에게 큰 무기가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하고 말이다.

1, 2학기 연수원 평가를 모두 마치고 해가 바뀐 2001년.

3학기 실무 수습을 앞두고 도윤은 또다시 ‘그 공간’에서 눈을 떴다.

* * *

[‘사법연수생 첫해를 1등으로 마쳐라!’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레인보우 주사위를 획득하였습니다.]

[주사위를 굴려 주세요!]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눈앞에 보이는 홀로그램을 보며 이제는 익숙한 듯 도윤이 주사위를 손에 쥐었다.

거의 1년 만에 보는 주사위였지만 딱히 어색한 느낌은 없었다.

‘이제는 내가 게임 캐릭터라는 사실을 완전히 자각한 건가?’

속으로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린 도윤이 피식 웃으며 주사위를 던졌다.

[실버 등급 주사위를 획득하였습니다!]

[주사위를 한 번 더 굴려 주세요.]

“첫 끗발이 개끗발이라더니, 어째 갈수록… 젠장.”

도윤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주사위를 던졌다.

그리고 사람의 얼굴만 확대해 놓은 듯한 그림이 그려진 면에 이르렀을 때 주사위가 멈춰 섰다.

[실버 등급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능력은 대상자의 운에 따라 랜덤하게 결정됩니다!]

[B등급, ‘청각의 비술’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청각의 비술(B) - lv.1

범위를 지정하여 범위 내의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들을 수 있습니다.

유효거리 5m, 범위 내 장애물이 있을 시 90% 효과 감소.

스킬 레벨이 상승함에 따라 유효 거리가 증가하고, 장애물 패널티는 감소합니다.

“청각의 비술이라…….”

말끝을 흐리며 짧게 한숨을 내쉰 도윤이 문득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처음에는 궁금했다.

왜 이런 공간이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지, 주사위의 정체는 무엇인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답은 나오지 않았고, 나중에는 그저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명성 그룹, 더 나아가 이 나라의 썩어 빠진 환부를 네 손으로 직접 도려내라는 뜻 말이다.

‘반드시…….’

조금씩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 도윤이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쾅, 쾅, 쾅.

누군가 현관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꿈틀.

잠시 뒤척이던 도윤이 스르륵 눈을 떴다.

머리를 휘휘 젓던 도윤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끙, 과음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거지…….”

쾅, 쾅, 쾅.

도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릴 때 또 한 번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야! 강도윤! 나와라, 빨리!”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살포시 인상을 찌푸린 도윤이 이내 몸을 일으켰다.

철컥.

빠르게 현관으로 다가간 도윤이 문을 열어젖히자 간편한 차림의 장호식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야! 너, 솔직히 말해 봐. 이제 일어났지!? 지금 니 꼴 완전 엽기다. 알아?”

얼마 전부터 ‘엽기’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하더니 틈만 나면 엽기, 엽기거리는 장호식이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무슨 일? 하! 내일부터 검찰청 실무 나가야 하는 것도 잊었겠다? 옷 사러 가기로 했잖아, 이 자식아!”

장호식이 집 안으로 성큼 들어서며 말했다.

“아…….”

사법연수생 1년 차를 모두 마치고 방학에 들어서자마자 도윤은 집으로 짐을 옮겼다.

2년 차, 3학기부터는 법원, 검찰청 실습 기간이라 굳이 답답한 기숙사에 머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첫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장호식의 의견에 도윤도 동의했기 때문에 옷 한번 사러 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날이 오늘이었나 보다.

“호식이 오빠?”

순간 현관문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 사람이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피부에 짧게 친 단발머리.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음에도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조화를 이뤄 여전히 귀여운 인상의 강단비가 그곳에 서 있었다.

“헉!”

순간 쉴 새 없이 떠들어대던 호식의 입이 마치 고장난 시계처럼 딱하고 작동을 멈췄다.

“…?”

황당한 표정으로 호식을 잠시 바라보던 도윤이 다시 단비를 바라본다.

“빨리 갔다 왔네?”

“응, 내일 오빠 첫 출근이잖아. 밥이라도 해주고 싶어서…”

말을 마친 단비가 손에 쥔 마트봉투를 수줍게 들어올렸다.

"실습인데 출근은 무슨, 우리 단비 다 컸네."

기분 좋은 미소로 단비에게 말하던 도윤이 다시 호식을 돌아본다.

“너 뭐냐? 단비보면 가을동화에 나오는 투빈 명대사를 하느니, 나랑 둘이 있을 땐 폼이란 폼은 있는대로 다 잡… ”

“야! 쉿, 쉿!”

호식이 급히 도윤의 입을 틀어 막았다.

'뭐 이런 쑥맥이…'

그 모습에 도윤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저 친구 옆에서 너스레를 떨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이정도 수준이면 단비를 정말 좋아해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다.

성별이 다르면 말 한마디 못 건내는, 말그대로 쑥맥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유쾌, 상쾌, 통쾌한 기분이네.”

도윤이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호식이 오빠도 있었네요? 나가는 길인 것 같은데…”

"아…"

"식전이면 밥 좀 먹고 가세요."

"아, 네. 감사, 아니, 응. 고맙…"

'등신…'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하는 호식을 보며 도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단비에 대한 걱정은 접어둬도 될 듯 싶다.

* * *

이튿날, 화장실 거울 앞에 선 도윤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마를 환하게 드러낸 도윤이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본다.

단추는 세 개에 통이 넓은 일자형 검은색 양복을 입은 어색한 모습.

어제 백화점에서 큰맘 먹고 산 옷임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도윤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춤형 정장만 입다가 옛날 양복 입으려니 이것도 할 짓이 아니네. 하긴 지금 상황에서 2017년의 그 핏으로 맞춰 달라고 했다가는 오히려 이상한 놈 취급당하겠지.”

작게 투덜거린 도윤이 무스를 이용하여 다시 한 번 더 머리를 매만지고는 이내 현관문을 나섰다.

“빠앙!”

“……?”

집을 나섬과 동시에 누군가 자동차 경적을 크게 울렸다.

도윤이 고개를 돌리자 한쪽 구석에서 검은색 대형 세단이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우대 자동차에서 나온 브로엄(Brougham)으로 파산 직전인 기업의 차량임에도 아직까지 중년층에서 상당히 인기가 좋은 차종이었다.

“야, 타!”

운전석 창문이 부드럽게 내려가더니 호식이 얼굴을 내밀며 씨익 웃었다.

“웬 거냐?”

“뭐가?”

“차 말이야.”

“아, 이거?”

장호식이 순간 우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형이 이번에 차 바꾼다고 주던데? 실무 기념 선물이라고.”

“…더러운 금수저 새끼들.”

“뭐? 금수저가 뭐야?”

“너 같은 놈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도윤의 말에 호식이 살포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묻는다.

“그거 욕이지?”

“욕? 그게 욕이라면 세상에 욕 듣고 싶은 사람 서울에서 부산까지 줄 세우고도 남을 거다.”

“뭐야, 칭찬이었어?”

호식이 다시 한 번 우쭐한 표정으로 말한다.

“너 하는 거 봐서 형이 자주 태워 줄게.”

“필요 없거든. 나도 차 살 거거든?”

“티코?”

“…….”

호식의 반문에 도윤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승차감이 다를걸? 야, 일단 타. 늦겠다.”

이어지는 호식의 말에 도윤이 차량으로 다가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밟는다. 가자, 씽씽아!”

“…이름도 지었냐?”

“물론! 씽씽~ 다정한 내 친구~ 아기 자동차 씽씽이!”

“…….”

호식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와 함께 도윤이 탄 차량이 빠르게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야 원래 집이 이쪽이라지만 넌 왜 부산으로 신청한 거야?”

1학기 동안 실습하게 될 부산지검 동부지청에 도착한 도윤이 차량에서 내리며 호식에게 물었다.

“빨리도 물어본다.”

“…….”

“너랑 같이 실습하고 싶어서?”

“…리얼?”

“스읍~~ 후우~~~”

도윤이 반문하자 잠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쉰 호식이 씨익 웃는다.

“음~ 벌써부터 바다 냄새가 코를 찌르는군.”

“…….”

“덤으로 부산 동부지검은 해운대에 있지. 그리고 3학기 중에 여름이 다가올 테고 여름 하면… 비키니지.”

“…그게 주목적인 것 같은데?”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도윤의 말에 호식이 정말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일단 들어가자.”

잠시 호식을 바라보던 도윤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건물을 향해 급히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

이내 두 사람의 인형이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지청장님이 급히 자리를 비우셔서 우선 부장검사님부터 뵈고 인사드리면 될 것 같아요.”

“아, 예.”

실무관으로 보이는 검찰청 직원의 말에 호식과 도윤이 다소 뻣뻣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똑, 똑, 똑.

“부장님, 사법연수생 두 사람 더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 더?’

호식과 도윤이 의아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들어오세요.”

이내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실무관이 들어가 보라는 듯 손짓한다.

달칵.

도윤이 부장검사실 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좌, 우측 소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가장 상석.

“……!”

점잖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 얼굴을 발견한 순간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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