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호식의 비화(?話)
속으로 쾌재를 부른 도윤이 호식을 바라보며 묻는다.
“어제… 했냐?”
“하다니? 뭘?”
호식의 반문에 도윤이 다섯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손바닥에 마주치며 ‘탁, 탁’ 소리를 낸다.
“야동 보셨냐고요.”
“…….”
이어지는 도윤의 말에 호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겉보기에는 그쪽 분야에 대해 달관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쑥맥에 맹탕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도윤이었다.
“야, 그걸 어떻…….”
호식이 말을 잇던 중 갑자기 입에 머물러 있는 녹색 빛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
갑작스러운 현상에 도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녹색 빛은 빠르게 다시 옅어지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던 호식의 얼굴빛도 원래 색깔을 찾아 갔다.
“어제는 피곤해서 못 봤고, 그제는 봤지.”
“…….”
“아오이 고동이라고, 이번에 데뷔한 떠오르는 그라비아 모델인데, CD 공유 좀 해 줄까?”
이어지는 호식의 물음에 도윤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한 가지만 더.’
이내 정신을 차린 도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괜찮아. 미안하지만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그래.”
이번에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호식을 보며 도윤이 묻는다.
“오성춘이 너한테 하는 말, 왜 이전에 박봉준 검사도…….”
차마 특정 단어를 내뱉지 못한 도윤이 말끝을 흐렸다.
“오성춘? 박봉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거론되자 호식이 낮게 반문하며 팍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호식이 이내 감탄사를 터뜨린다.
“아, 첩출이라는 얘기?”
“…….”
이번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호식을 보며 도윤이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재벌가에 늘 있는 흔해 빠진 얘기야. 듣고 싶어?”
“…….”
도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식이 말을 잇는다.
“우리 어머니는 젊었을 때 룸살롱에서 일을 하셨어. 나름 대한민국 상위 1퍼센트만 상대하는 초호화 룸살롱이었다고 하더라.”
“……!”
“거기서 일하는 여자 직원들을 보통… 아가씨라고 부르지?”
이어지는 호식의 말에 도윤이 또 한 번 놀랐다.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기업, KS그룹의 막내 자제가 혼외자인 것도 놀라운데 그 어머니는 술집 아가씨란다.
이는 결코 흔치 않은 일이다.
재벌가의 문란한 성생활이야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다.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황금물질주의가 팽배한 현 사회에서 돈 많은 재벌이 아가씨와 2차를 가는 일쯤이야,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하지만 그 아가씨가 임신한 것도 모자라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이 표면상으로나마 가문의 정식 자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가씨와 2차를 가는 상위층들은 피임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날의 기분과 본능에 따라 그저 자신들의 씨앗을 싸지를 뿐이다.
만약 아가씨가 임신을 한다면?
대부분 임신한 아기를 지우게 만든다.
대한민국에서 낙태죄는 엄연히 형법상 처벌 조항이 있는 중죄이지만, 소위 말하는 상위 1퍼센트들에게 그 정도 범죄를 덮는 것쯤이야 우습다.
온갖 인맥을 동원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막고, 그 인맥으로 외부에 노출될 위험이 없는 개인 병원을 이용한다.
민감한 시기에는 아예 해외에 있는 병원을 이용하기도 한다.
스폰 명목으로 여자에게 적당한 거금을 찔러 넣어 주고, 목줄을 틀어쥐고 협박함으로써 마침내 여자의 입까지 틀어막는다.
그 정도 돈과 능력은 충분히 있는 사람들이니까.
여자가 결국 아기를 낳게 되는 경우에는?
곧바로 강제 해외행이다.
그날부터 대한민국 안에서 그 산모와 아기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뿐이면 다행이다.
평생을 감시 속에서 살며 마음대로 고향 땅조차 밟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혼외자의 자식이 버젓이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는 모습이 놀라웠지만, 도윤은 문득 호식에게 측은한 감정이 더 강하게 들었다.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암암리에 펼쳐지고 있는 2차 관행을 깨부수고 상위층들이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것, 혹시나 이로 인해 발생한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
“…….”
“그게 내 꿈이야.”
30분 뒤,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호식을 돌려보낸 도윤이 상념에 빠져 들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하다.’
스킬 대상이 범죄자로 한정되지 않음은 물론, 질문 내용도 범죄 사실로 국한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스킬의 대상이 된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데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특정 사실을 말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의문조차 가지지 않는다.’
도윤이 진중한 표정을 지은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호식과 나눈 대화를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심문의 달인은 앞으로 도윤이 가진 최고의 무기 중 하나가 될 것이다.
* * *
3개월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병역비리의 대부이자 도피 생활 중 여장까지 한 것으로 유명한 박노항이 검거되었고, 그로부터 약 1주일 뒤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이 일본 입국 심사에서 위조여권 발각으로 체포되었다.
1세대 아이돌 그룹의 시초이자 대한민국 대중 가요계의 한 획을 그은 그룹 HOT가 공식 해체를 선언했고, 내년 2002월드컵에 앞서 한국과 일본에서 2001컨페더레이션스컵이 개최되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많은 일이 있었다.
네팔의 황태자이자 비운의 11대 왕, 디펜드라가 아버지인 비렌드라 국왕과 어머니 아이슈와라 왕비 등 일가족 12명을 총기로 몰살시키더니 스스로 자살을 기도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서는 훗날 이케다 초등학교 무차별 살상 사건이라 불리는 끔찍한 묻지마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사건사고가 많이 발생한 2001년, 도윤은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수위를 다투는 조직폭력단 행동대장 김두식이 검거되면서, 조폭 범죄에 대한 수사가 상당 부분 진척되었다.
부산 동부지청장은 ‘조직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이 때문에 윤만석과 박봉준도 눈코 뜰 새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도윤과 호식의 실습 생활도 흐지부지 끝나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우리 실습도 끝이네.”
나른한 오후, 비어 있는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소회의실에서 호식의 따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지막 두 달은 검찰청이 아닌 법원에서 실습을 진행한다.
“그러게.”
도윤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식의 말대로 남아 있는 실습 기간이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그런데 김두식이 자기 마약 유통 경로를 불었는데도 계속 족치고 있는 이유가 뭘까?”
호식의 물음에 도윤이 멈칫한다.
“정말 유통 경로를 사실대로 불었다고 생각해?”
“엥, 아니야?”
도윤이 가만히 자신의 두 눈을 바라보자 호식이 머리를 긁적인다.
“그럼 마약 유통 경로를 굳이 왜 진술하는데? 지들이 제일 좋아하는 묵비권도 놔두고.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입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잖아?”
“한번 생각해 봐.”
도윤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호식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
“혹시 적대 조직의 마약 유통 경로 뭐 그런 건가!? 수사에 혼선을 주면서, 손 안 대고 적대 세력도 제거하는…….”
“마약세계에는 관행이 하나 있어.”
호식의 말을 중간에서 끊은 도윤이 말을 잇는다.
“다른 건 몰라도 마약에 한해서는 같이 마약으로 먹고사는 식구를 팔아넘기지 않는다.”
“엥? 그게 뭐야?”
“말 그대로야. 한 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라는 거지. 지가 살기 위해서 공급처를 불면, 그놈에게는 평생 마약을 공급 안 해 주겠다는 거지. 중간 판매상이 적대 세력이라도, 쭉 타고 올라가다 보면 결국 서로서로 연결되게 되어 있어.”
“그건 왜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마약을 가장 쉽게, 많이 구할 수 있는 루트가 어디라고 생각해?”
“음…….”
도윤의 물음에 호식이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한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마약을 자체적으로 생성해 내기에는 한계가 있을 거 같고…….”
잠시 말끝을 흐리던 호식이 이내 말을 잇는다.
“중국?”
도윤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해했어. 그럼 김두식이 유통 경로를 말한 이유는 뭔데?”
“형법 51조.”
“형법 51조면… 양형조건이었지?”
호식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인 도윤이 말을 잇는다.
“판사는 형을 정함에 있어 4가지 사항을 필수적으로 참작하여야 한다. 그중에서 네 번째 항, 범죄 후의 정황.”
“아……!”
마침내 호식이 깨달았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특히 마약 범죄에서 이 네 번째 항이 많이 다루어지곤 해. 니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손을 털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겠다는 거지.”
“바로 위 마약 공급처를 불면 어느 정도 참작해 주겠다는 거구나!?”
“그래, 아까 말한 관행은 판사, 검사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야. 제대로만 불면, 마약사범이 더 이상 그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김두식은…….”
호식이 말끝을 흐리자 도윤이 옅게 웃으며 말한다.
“우리가 아는 사실을 쟤들은 모를 거라고 생각해?”
“…….”
“일단은 지들도 살아야 되니까, 불긴 부는 거야. 공급처 말고, 따까리급으로.”
“그럼 참작 안 해 주면 되잖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아. 뭐, 공급처가 아니라도 실적은 올라가잖아? 검찰 입장에서는 마약사범 하나 더 잡는 거니까.”
“그럼…….”
“피의자가 동종 범죄자를 검거하는 데 적극 협조하였고,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도 순순히 시인하면서 충분히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도로 검사가 보고서 한 장 치겠지.”
“그놈의 실적, 더럽다.”
경멸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호식을 잠시 바라보던 도윤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우우웅, 우우웅.
진동으로 바꿔 놓은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액정 화면을 통해 발신자를 확인한 도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부장검사님. 강도윤입니다.”
“잘 있었나? 실습 나온 친구들한테 같은 건물에 있으면서 제대로 신경도 못 써 줘서 미안하네.”
윤만석의 말대로 도윤이 윤만석의 얼굴을 못 본 지가 두 달은 다 되어 가는 듯했다.
“한창 바쁘신 것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말이라도 고맙군. 하하하하.”
도윤의 말에 수화기 너머로 윤만석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외 시시콜콜한 얘기를 이어 가던 윤만석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김두식이 건과 관련하여 한 가지 조언을 구하고 싶네.”
윤만석의 말에 도윤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검사, 그것도 부장급 검사가 고작 사법연수생 따위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말을 할 줄이야.
“제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도윤의 말에 만족한 듯 다시 한 번 하하 웃던 윤만석이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귀신 헬리콥터라는 말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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