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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24화 (24/174)

24화 대포통장 (1)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도윤의 집에 들이닥친 호식이 두 팔을 들어 올려 쭈욱 기지개를 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거실 소파에 몸을 묻으며 호식이 묻는다.

“뭘?”

“부장검사님이 부탁한 것 말이야. P의 의미는 그렇다고 쳐도, 무슨 수로 입 꾹 다물고 있는 김두식이 입을 열게 할 수 있겠어?”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지.”

“……?”

도윤의 대답에 호식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호식이 말끝을 흐리자 도윤이 씨익 웃었다.

“그래.”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는 호식을 일별한 도윤이 주머니 속에서 곱게 접힌 전단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통장 삽니다……?”

이내 전단지에 적혀 있는 글자를 확인한 호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윤이 손에 쥔 전단지에는 ‘통장 삽니다’라는 짧은 문구와 함께 전화번호 하나만 달랑 적혀 있었다.

“장기밀매범이든, 마약사범이든, 돈을 목적으로 하는 범죄자 놈들에게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물건들이 몇 가지 있거든.”

도윤이 휴대폰 자판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대포통장!”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호식이 소리치자 도윤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첫술에 배 한번 불러 보자고.”

말을 마친 도윤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신호음에 집중하기를 잠시.

“예~ 여보세요.”

비교적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저… 전, 전단지 보고 전화드렸는데요.”

도윤이 최대한 어수룩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그러세요, 고객님. 실례지만 저희가 하는 사업이 조금 많아서요. 어떤 전단지를 보고 전화주셨나요?”

“통, 통장을 팔고 싶어서요.”

“잠시만요. 주변이 조금 시끄러워서 제가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좀…….”

“아, 네, 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소란스러움이 조금씩 잦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을 때 다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통장을 팔고 싶으시다구요?”

“네, 네.”

“장당 매입가는 10만 원, 어떤 은행이든 상관없구요. 가족 명의의 통장까지 일괄 판매하시면 12만 원 쳐드립니다. 괜찮으세요?”

사내의 물음에 도윤이 짐짓 아무 말 없이 뜸을 들이기 시작한다.

“…고객님?”

“저, 생각해 보니까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제 통장이 혹시나 불법적인 일에 쓰일지도 모르는 거고… 그냥 통장은 안 파는 걸로 할게요. 죄송합니다.”

“잠… 잠시만요, 고객님!”

도윤의 말에 사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친다.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저희가 매입한 통장들은 고객님이 걱정하시는 그런 일에 쓰이는 게 아닙니다.”

“…….”

통화가 끊기지 않은 것을 확인한 사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잇는다.

“사업 실패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통장이나 재산이 모조리 압류당한 사람들,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그 불쌍한 사람들이 은행이라도 이용할 수 있게 도와주고자 저희가 통장을 매입하고 있는 겁니다. 그 외 다른 용도로 쓰이기도 하지만, 고객님이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전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마치 준비라도 해 놓은 듯 사내의 입에서 부연 설명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속으로 감탄한 도윤이 잠깐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그쪽에서는 뭘 먹고사나요?”

“하하, 저희 걱정도 다 해 주시다니 참 선량하신 분이군요. 나름 좋은 일을 하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지원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범죄자들로부터 말이지.’피식 웃은 도윤이 짐짓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럼… 팔게요.”

“아주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통장은 몇 장이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명의자가 같지만 않으면 개수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매입하겠습니다.”

‘물량을 많이 확보할수록 돈이 되니까, 말이지. 애간장 한번 태워 볼까?’

생각을 마친 도윤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희 가족들 통, 통장까지 총 5장 정도를 가지고 있는데요.”

도윤의 말에 순간 사내가 눈을 반짝였다.

“5장이요? 모두 매입하겠습니다. 물론 프리미엄까지 붙여서 장당 12만, 아니 13만 원에 매입하겠습니다. 한 번에 5장이나 파시는 분은 흔치 않거든요.”

순간 도윤이 멈칫한다.

사내의 말 중에 상당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도윤이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은 통화에 집중할 때다.

“13만 원이라면…….”

떨리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는 도윤을 보며 사내가 승부수를 던졌다.

“65만 원, 빳빳한 배춧잎… 아니, 현금으로 모두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사내의 말에 도윤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수화기 너머의 사내는 도윤이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다 와서 망칠 순 없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도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쪽으로 가면 되나요?”

“전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괜찮으신 시간만 말씀해 주시면 사람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사내의 말에 도윤이 거실 한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오늘은 특별히 어디 나갈 계획은 없는데요.”

“그럼 오후 2시 이전에 퀵으로 사람을 하나 보내겠습니다. 통장은 그쪽 편으로 부탁드립니다. 아! 죄송하지만 통장들은 박스나 비닐봉지에 싸서 건네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퀵이다 보니 분실 위험이 있어서요.”

“그럴게요.”

“하하하, 좋은 거래 감사드립니다. 주소를 불러 주시겠어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

도윤의 말을 빠르게 메모한 사내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통장은 개수나 기간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매입하고 있으니, 24시간 언제든지 이쪽으로 연락주십시오. 다시 한 번 좋은 거래 감사드립니다, 고객님.”

“네, 수고하세요.”

이내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도윤이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도윤의 옆에 바짝 붙어 귀 기울이고 있던 호식이 손을 번쩍 들었다.

“강도윤 선생님!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기각.”

“엥?”

예상치 못한 도윤의 말에 호식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가 너무 건방짐.”

“…….”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호식이 애써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허리를 곧게 편 상태에서 한쪽 팔을 귀 옆에 바짝 붙인 호식이 다시 한 번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해.”

“아, 예.”

들었던 팔을 내려 머리를 한차례 긁적인 호식이 말한다.

“왜 같은 명의의 통장은 안 사는 거야? 그놈들 입장에서, 대포통장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야? 많이 팔아먹은 만큼 이윤을 남겨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꼬리 자르기지.”

“꼬리 자르기?”

도윤의 대답에 호식이 고개를 갸웃한다.

“혹시나 같은 명의로 매입한 통장들 중 하나가 수사망에 걸리면, 나머지 통장들도 추적당하기 쉬우니까.”

“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호식이 계속 말한다.

“그럼, 두 번째. 저렇게 대놓고 버젓이 대포통장을 매입하고 있는데, 의심도 하지 않고 통장을 파는 사람이 많이 있어?”

“많지.”

“어째서? 혹시나 범죄에 이용될 수도 있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건가?”

“의심하면?”

“어?”

“돈을 주고받았다는 증거만 남기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통장을 양도한 것만으로는 법적으로 처벌할 방법이 없어. 범죄에 이용된다고 나한테 피해 오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그걸 신경이나 쓰겠어?”

이 시절에는 개인 소유의 통장이나 카드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해도 대가성이 없으면 처벌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지고 있는 통장을 팔아 치우곤 했다.

물론, 증거가 남을 수 있는 계좌이체 방식은 피하고 현금거래 방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다 보니 나중에는 국가에서 단순히 통장을 양도한 사실만으로도 그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인 ‘전자금융거래법’을 제정하였지만, 이는 먼 훗날의 이야기다.

“…….”

호식이 뻥진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호식을 보며 도윤이 말을 잇는다.

“황금만능주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에 말이야.”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면 당사자끼리 직접 거래하는 편이 낫잖아? 왜 퀵으로 보내는 건데?”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퀵을 이용하는 거야.”

“엉?”

“당일 배송에 빠른 서비스, 퀵 서비스를 이용한 것에 대한 아무런 기록조차 남지 않으니까.”

“…….”

이어지는 도윤의 설명에 호식이 입을 다문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궁금증이 모두 해결되었나요, 장호식 학생?”

“항상 느끼는 거지만… 니가 정말 나랑 같은 31기 사법연수생이 맞나 싶다.”

“에이, 너랑 같은 건 아니지. 난 수석이잖아?”

도윤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못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퉤! 재수 짱 없네.”

“재수 없지. 대학도 안 나왔는데 무슨 재수야?”

“…….”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호식이 말한다.

“말을 말자. 그래서, 이제 퀵 서비스 직원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일단은.”

“크크크, 꽁돈 65만 원 생기겠는데? 둘이서 한우 한 번 썰어 볼까?”

호식의 말에 도윤이 피식 웃었다.

“시간 좀 남았으니까 나가서 점심 먹고 스타나 한판 때리고 오자고.”

말을 마친 호식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대답도 듣지 않고 현관문으로 걸음을 옮기는 호식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도윤도 이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뭐, 시간 좀 때워 볼까?”

도윤이 호식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제정신이냐!?”

박봉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마나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는지, 꽉 쥔 주먹 위로 울긋불긋 힘줄이 불거져 올라와 있었다.

“왜 그렇게 흥분을 하십니까?”

“지금 내가 흥분 안 하게 생겼냐!? 니가 한 말은… 범죄란 말이다! 그것도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킬 수 있는 중범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목에 핏대를 세우는 박봉준을 잠시 바라보던 오성춘이 말을 잇는다.

“형의, 아니, 검사 박봉준의 그릇은 고작 그 정도였습니까?”

“뭐?”

“옛부터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당연시되어 왔습니다. 한 사람의 권력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다른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 왔죠. 인물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무슨…….”

“그렇게 만들어진 인물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니 말은 모순이다! 적은 사람들을 희생시켜 많은 사람을 구한다? 인간의 가치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더 드릴 말씀은 없을 것 같군요.”

박봉준의 말을 중간에서 끊은 오성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오성춘을 보며 김영재가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

오성춘의 말에 박봉준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오성춘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형, 아니, 박봉준 검사님이 원하는 위치까지 올라갈 수 없을 겁니다.”

“…….”

“한낱 딴따라 한 명일 뿐입니다. 부디 현명하게 생각해 보시길…….”

꾸벅 고개를 숙인 오성춘이 이윽고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저, 저도 가 보겠습니다.”

김영재마저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이제는 혼자 남은 박봉준이 두 손으로 얼굴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젠장…….”

박봉준의 욕지거리가 고요한 사무실 내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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