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대포통장 (2)
“지금 덮쳐야 하는 것 아니야?”
도윤에게 상자를 건네받은 퀵서비스 직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부산 진구의 어느 허름한 아파트 앞.
끈질기게 미행해 온 퀵서비스 직원이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발견한 호식이 다급한 목소리로 묻는다.
“일단 따라 들어가자.”
말을 마친 도윤이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차량에서 내렸다.
“같이 가!”
호식이 아파트 입구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도윤을 뒤따랐다.
복도식으로 되어 있는 아파트는 한 층에 6가구나 되는 구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층, 한 층이 상당히 넓었다.
“안 가?”
“쉿.”
호식의 물음에 도윤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댄다.
스르륵, 쿵.
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도윤이 호식을 향해 움직이자는 듯 손짓한다.
“아까 움직였어야 하는 것 아니야? 퀵이 어느 집에 들어갈 줄 알고…….”
엘리베이터 상단의 숫자가 하나씩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호식이 불안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괜찮아, 지금은 층수만 확인하면 돼.”
‘내 생각이 맞다면.’
뒷말을 삼킨 도윤이 엘리베이터 상단의 숫자에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
그런 도윤을 잠시 바라보던 호식도 이내 엘리베이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땡.
짧은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상단의 숫자가 11층을 가리켰다.
“가자.”
말을 마친 도윤이 움직이는 방향을 발견한 호식이 묻는다.
“계단으로?”
“퀵 직원이랑 안 마주치려면 계단으로 가는 게 나을 거야. 우리가 11층에 도착할 때쯤, 직원은 내려오겠지.”
“직원이 가고 나면 어느 집에 상자를 전달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
“아마 상자는 집 앞에 놓아 뒀을 거야.”
“뭐?”
도윤의 말에 호식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일단 올라가자.”
도윤이 입을 다문 채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가자, 호식도 마지못해 뒤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뚜벅.
“헉, 헉.”
도윤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너. 너무 체력 저질 아니야?”
“말 걸지 마라, 돌아가시겠다.”
“…이러니 검사, 변호사들이 사무실에서 펜대만 굴릴 줄 안다고 욕을 하지.”
“헉, 헉.”
여전히 헉헉거리는 호식을 보며 도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혹시 아침에 텐트도 못 친다든가 그런 건 아니지? 청바지 하나 구해다 줘?”
“즐.”
지친 표정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추켜세우는 호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아, 형님. 죄송, 같이 좀 갑시다!”
호식이 도윤을 뒤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를 잠시.
마침내 11층에 도착한 호식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때려죽여도 더는 못 움직인다.”
“진짜 못 움직이는지 일단 한 대 때려 볼까?”
말을 마친 도윤이 주먹을 움켜쥐자 호식이 움찔 몸을 떨었다.
“빨리 가자.”
“늬예늬예.”
입을 삐죽 내민 호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곧이어 11층 첫 번째 코너를 돌았을 때, 호식이 눈을 크게 떴다.
“상자!”
1102호라고 적힌 출입문 앞에 도윤이 퀵 서비스 직원에게 건네줬던 상자가 놓여 있었다.
호식이 도윤을 향해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저 집 주인이 대포통장을 매입하는 놈이야? 그냥 여기서 죽치고 있으면 되는 거냐고?”
“전자는 틀렸고, 후자는 맞아.”
“뭐?”
호식의 반문에 도윤이 코너 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일단 저쪽으로 이동하자. 가서 얘기해 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호식이 도윤과 함께 11층 엘리베이터 맞은편에 위치한 비상계단으로 몸을 숨겼다.
“이제 얘기해 봐. 전자는 틀렸고 후자는 맞다고? 그게 무슨 말인데?”
“말 그대로야. 1102호 집 주인은 아마 대포통장을 매입하는 놈이 아닐 거야.”
“아니다? 후자는 맞다며? 집 주인이 대포통장을 매입하는 놈이 아닌데, 여기 있으면 놈을 잡을 수 있다는 거야? 대체 어떻게?”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는 호식에게 진정하라는 듯 손짓한 도윤이 말을 잇는다.
“던지기 수법이야.”
“던지기 수법?”
호식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인 도윤이 계속 말한다.
“보통 인터넷으로 필로폰 파는 놈들이 많이 쓰는 수법이지. 물건을 구매자와 판매자만 아는 곳에 말 그대로 던져 놓는 거야. 던지는 수법은 다양해. 아파트 에어컨 실외기에 테이프로 붙여 두기도 하고, 단지 내 화분에 묻어 두기도 해. 심지어 공중화장실 변기통 안쪽에 붙여 두기도 하지.”
“저기는 그냥 일반 가정집이잖아?”
“장소만 바뀌었을 뿐, 수법은 같아. 법원 등기부 떼 보면 아마 1102호는 빈집으로 나올걸?”
“니 말이 사실이라면, 다른 곳에서 저 물건을 가지러 오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얘기네?”
호식의 물음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나타날걸?”
도윤이 말을 마치는 순간 엘리베이터 쪽에서 ‘땡!’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화들짝 놀란 호식이 도윤을 바라본다.
“설마…….”
뚜벅, 뚜벅, 뚜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1102호가 있는 방향으로 조금씩 멀어져 간다.
코너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호식이 이윽고 상자를 주워 드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를 발견했다.
“……!”
도윤이 호식의 뒷덜미를 확하고 잡아당겼다.
“왜?”
입 모양으로 묻는 호식을 바라보며 도윤이 호식의 귀에 빠르게 소곤거린다.
“지금부터 놈을 미행할 거야. 놈의 목적지에 총책이든, 중간책이든 관리자급이 기다리고 있겠지. 너는 지금 바로 1층으로 내려가.”
“너는?”
“혹시나 같은 아파트에 아지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것만 확인하고. 빨리!”
상자를 집어 든 사내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도윤이 다급히 호식의 등을 떠밀었다.
이윽고 최대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 호식을 일별한 도윤이 비상계단 출입문 뒤로 몸을 숨겼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탄 엘리베이터가 아래를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엘리베이터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도윤이 층수를 일일이 확인하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호식이 1층으로 뛰어 내려오는 도윤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한쪽 방향을 가리킨다.
“저기!”
검은색 스타렉스가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빨리!”
호식에게 차량 키를 건네받은 도윤이 빠르게 차량에 올랐다.
호식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도윤이 강하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부와아아아아앙!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도윤과 호식이 탄 차량이 검은색 스타렉스를 뒤쫓기 시작했다.
검은색 스타렉스는 한참을 달려 부산의 끝에 위치한 기장군에 들어서고 나서야 멈춰 섰다.
차량에서 내린 사내가 들어가는 건물의 창문에 적힌 글자를 확인한 호식이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떼인 돈 받아 드립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걸음을 옮긴다.
“미친, 그냥 들어가게?”
기겁한 호식이 재빨리 도윤의 팔을 붙잡았다.
“그럼,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게?”
호식의 팔을 가볍게 뿌리친 도윤이 사내가 사라진 건물을 향해 이동한다.
“아씨.”
머리를 벅벅 긁은 호식도 마지못해 도윤을 뒤따랐다.
콰앙!
도윤이 2층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안에 있던 남자 5명이 동시에 도윤을 돌아본다.
때마침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상자를 뜯어보고 있었고, 아파트에서 봤던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그 옆에 시립해 있었다.
“뭐하는 새낀데 문을 이리 험악하게 여냐?”
테이블에 둘러앉아 트럼프 카드를 쥐고 있던 세 남자 중 하나가 도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넌 뭐냐?”
곧이어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도 도윤을 바라보며 묻는다.
눈이 좌우로 길게 찢어진 것이, 영락없는 쥐상에 일견 보기에도 야비해 보이는 남자다.
“나?”
도윤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그 상자 주인.”
“……?”
도윤의 말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상자 안을 들여다본다.
“…….”
남자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짜악!
옆에 시립해 있던 남자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하나?”
야비한 인상의 남자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통장 뭉치가 바닥을 향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새싹은행이라고 적힌, 보드게임에나 사용하는 놀이용 가짜 통장이다.
“…죄송합니다, 행님.”
퍼억!
야비한 인상의남자가 그대로 옆에 서 있던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니미, 죄송하면 군 생활 끝나?”
제자리에 주저앉아 끙끙 앓는 사내를 잠시 바라보던 야비한 인상의 남자가 도윤을 돌아본다.
“그래, 댁들은 어디서 온 누구실까? 짜바리… 아니, 국가 녹 먹으시는 분들은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도윤의 물음에 힐끗 창밖을 바라본 남자가 말을 잇는다.
“높으신 분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렇게 대굴빡에 피도 안 마른 둘만 보낼 리는 없잖아?”
남자의 말에 도윤이 피식 웃었다.
“뭐, 나쁜 짓 하는 놈들에게 심판을 내리러 온 정의의 사자 정도로 해 둘까?”
“나쁜 짓? 나는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돈으로 통장 사들이는 것도 엄연히 범죄인데 말이지.”
이어지는 도윤의 말에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통장을 사들이는 게 나쁜 짓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남자의 물음에 도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나한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마워했는지 아나?”
“무슨 말이지?”
도윤이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 몇 년 안 된 것 같은데, IMF 때 말이야. 그 당시 회사에서 정리해고당한 가장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동네 놀이터나 PC방 정도였거든.”
“…….”
“부끄러워서, 혹은 걱정할까 봐 집에는 출근한다고 얘기하고 그런 곳에 싸돌아다니는 거지. 퇴근 시간까지 몇 시간이고 말이야. 수십 년 동안 오천 원, 만 원 악착같이 모아 둔 비자금 통장에서 한 번에 몇백만 원이나 되는 돈을 꺼내다 월급이랍시고 집에 갖다 바치니, 통장에 잔고가 남아날 턱이 있나? 라면으로 끼니 때우는 것도 사치지.”
“…….”
“그런 버러지… 아니, 그런 불쌍한 사람들에게서 통장을 사 주는 거야. 내가 얼마나 생명의 은인 같겠나? 가지고 있어 봤자 더 이상 쓸 데도 없는데.”
도윤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야비한 인상의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잇는다.
“그뿐인 줄 아나? 나중에는 그 가장 집에도 직접 찾아가 도움을 줬지. 가족들 명의의 통장까지 싹 매입해 준거야. 물론, 차마 실직했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불쌍한 가장을 위해 내가 친절하게 대신 사정도 설명해 주고.”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도윤이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그것도 애비라고, 질질 짜기 시작하는 애새끼들 보는 재미가 어찌나 쏠쏠하던지.”
남자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개자식이…….”
호식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넌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
도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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