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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31화 (31/174)

31화 첫 번째 투자 (2)

“스읍~ 하아~ 역시 아메리카는 공기 자체가 다르구만?”

호식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말했다.

“…여기가 보스턴.”

보스턴로건 국제공항(Boston’s Logan International Airport)에 지금 막 도착한 도윤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매사추세츠만 연안에 자리한 뉴잉글랜드 최대의 중심지, 보스턴.

18세기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굵직한 사건들이 대거 발생한 역사적 현장이자, 미국의 정신적 중추.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도 바로 이 도시에서 발생했다.

“저… 도련님.”

호식이 이번 미국행을 위해 미리 섭외해 온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남자는 KS그룹 해외영업부 소속으로 자신의 이름을 박 대리라고 밝혔다.

“아니, 형! 나보다 나이 많죠? 도련님, 도련님 하지 말고 그냥 호식이라고 부르라니까요? 존댓말도 집어치우고!”

“하지만 제가 감히 어찌…….”

박대리가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자 호식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오! 진짜 이름처럼 행동할 거예요!?”

“…….”

“감히는 무슨, 지금이 뭐 중세 시대예요? 내가 대리 형 직장 상사도 아니고, 오히려 사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입장인데 나이 많으면 형이고, 나이 적으면 동생이지!”

“…….”

“안 그냐, 친구야?”

호식의 넉살에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도윤은 호식의 이런 점이 좋다.

“인정.”

도윤의 짧은 대답에 호식이 박대리를 돌아본다.

“들었죠?”

“그… 노력할게… 요, 호식… 님.”

매우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흐리는 박 대리를 보며 호식이 버럭 화를 낸다.

“반말!”

“어, 응!”

화들짝 놀라 대답하는 박 대리를 보며 호식이 씨익 미소 지었다.

“그래서, 뭐라구요?”

“그… 흠, 관광 차원에서 봐도 이곳 보스턴은 볼거리가 많… 아. 미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도시, 미국의 아테네로도 불리는 곳이니까.”

“오~”

호식이 낮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특히 바다가 인접해 있어서 신선한 해산물도 쉽게 구할 수 있어. 가령 속이 꽉 찬 랍스터라든가…….”

잠시 혀로 입술을 핥은 박 대리가 계속 말을 잇는다.

“보스턴에서 목적지까지 1시간 정도면 도착하니까, 약속 시간만 넉넉하다면 조금 둘러봐도…….”

“그렇다는데?”

호식이 다시 도윤을 돌아봤다.

‘개인적으로 펜웨이 구장(Fenway Park)의 그린몬스터는 꼭 한번 실제로 보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오자 메이저리그 광팬이기도 한 도윤도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를 꼭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만나고자 하는 사람과 사전에 약속을 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재학 중인 학교가 어디인지만 알고 있을 뿐,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길 수 있기에 일분, 일초가 소중했다.

이윽고 도윤이 호식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쉽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네. 지금 바로 출발하자.”

“…….”

호식이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자 도윤이 마지막 말을 잇는다.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Phillips Exeter Academy)로.”

* * *

미국 뉴햄프셔 주에 위치한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1778년 조지워싱턴 대통령의 친구이자 미국의 판사인 새뮤얼 필립스가 설립한, 미국 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립 기숙학교.

총학생수는 1,000여 명에 달하지만 학급당 학생 수는 고작 10명 안팎이며, 소위 말하는 중학교 성적 최상위권 엘리트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명문 중의 명문 사립학교다.

졸업생들 대다수가 미국 8대 사립대학이라는 아이비리그(Ivy League)를 포함한 명문 대학교에 진학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유명한 댄 브라운(Dan Brown)도 이 학교 출신이라고 했나?’

도윤이 학교 전경을 둘러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캬~ 역시 천조국 명문은 뭐가 달라도 달라. 여기가 고등학교인지, 대학교 캠퍼스인지 구분이 안 간다니까?”

호식도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도윤도 호식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식의 말대로 중세풍 느낌의 건물들과 넓은 잔디 캠퍼스는 상당히 고풍스러운 느낌을 줬으니까.

“자, 이제 얘기해 봐. 대체 누구길래 천하의 강도윤 님이 이 먼 곳까지 돈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만나러 왔는지.”

“…….”

도윤이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자 호식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제는 얘기해 줘도 되잖아?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숨기는 거야?”

“일단은… 가자.”

말을 마친 도윤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아~ 아쉬운 놈이 따라나서야지, 쩝.”

잠시 도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식도 빠르게 도윤을 뒤따랐다.

멈칫.

한참 걸음을 옮기던 호식이 제자리에 우뚝 선 도윤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뭐야? 갑자기 왜 멈춰?”

“…….”

여전히 제자리에 멈춰 있는 도윤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호식이 순간 알겠다는 듯 씨익 미소 지었다.

“아항~ 너, 길 물어보고 싶은데 잉글리쉬가 안 되니까 당황했구나?”

“…….”

“걱정 마! 이럴 줄 알고 내가 우리 대리 형한테 미리 부탁한 거라니까!? 그렇죠?”

“아, 네… 아니, 응. 그렇지.”

호식의 말에 박 대리가 한발 앞으로 나선다.

“저, 도윤 군. 의사소통은 걱정…….”

“박 대리님은 잠시 학교 좀 둘러보고 계실래요?”

캠퍼스 한구석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도윤이 마침내 몸을 돌려 말한다.

“…응?”

“의사소통은 걱정 말고요.”

박 대리가 힐긋 호식의 눈치를 살핀다.

분명히 도윤의 말을 들었음에도 아무런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

그런 호식을 발견한 순간 박 대리는 등골이 오싹했다.

‘거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회장님의 아끼는 막내 손자가 직접 가이드를 부탁했다.

편하게 대하라고 말은 하지만, 허락도 없이 자리를 떴다가는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른다.

대한민국에서 재벌이라는 족속만큼이나 변덕이 심한 존재는 많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속으로 중얼거린 박 대리가 주변을 휘휘 둘러본다.

누군가 멀리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재벌집 자제의 비밀호위 따위라든가 말이다.

‘만약 그런 사실이 회장님 귀에 들어갔다가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던 박 대리가 이내 확실히 거절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도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

순간 도윤과 딱 하고 시선이 마주쳤다.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눈빛.

마치 자신을 믿어 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도윤을 보며 박 대리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치솟아 올랐다.

‘거절하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의 실망한 표정을 보고 싶지 않다.

박 대리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봤다.

“그렇게 하세요.”

순간 옆에서 들려오는 호식의 목소리에 박 대리가 눈을 크게 떴다.

박 대리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간다.

“애초에 초기 계획부터 지가 다 세운 건데, 지가 알아서 다 하겠지, 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중얼거리는 호식을 보며 이내 박 대리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식이 너도.”

“응? 나?”

도윤의 말에 호식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도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래. 박 대리님이랑 같이 캠퍼스라도…….”

“그건 안 되겠는데.”

“……?”

도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호식을 바라본다.

“나도 엄연히 공동 투자자잖아? 그 정도 권리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

이어지는 호식의 말에 도윤이 입을 다물었다.

‘이런…….’

도윤이 속으로 아차 한 표정을 지었다.

호식의 말이 맞다.

호식의 입장에서는 한두 푼도 아닌 수십억이 들어가는 대투자다.

그런 상황에서 투자자가 피투자자의 얼굴조차 모르고 돈을 투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내 실수다.’

호식을 너무 편하게 생각했다.

친한 친구 사이라는 것, 이미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

그 특수성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세상에 당연한 권리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속으로 자책한 도윤이 곧바로 호식에게 사과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 걸 떠나서, 우리는 친구잖아?”

“……!”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난 너를 제외하면 마음 툭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어. 딱히 너한테 숨기고 싶은 일도 없지만, 가능하면 내 이야기를 전부 너한테 해 주고 싶은 마음이야.”

순간 도윤의 머릿속에 호식의 어머니에 대한 대화 내용이 스쳐 지나간다.

“세상 이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마음 툭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1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뭔가 서글플 것 같지 않아?”

“…….”

“그런 사람, 서로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 1명쯤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이, 그렇게 큰 욕심이야?”

서글픈 눈빛으로 도윤을 바라보던 호식이 이내 천천히 몸을 돌리려고 했다.

“미안하다.”

도윤의 말에 호식이 멈칫한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당연한 권리인 줄 안다는… 그런 안일하고 썩은 마음가짐이었나 보다. 절대 너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서 숨기려 했던 건 아니야.”

“…….”

“전에도 말했지만… 넌 내 파트너이자 몇 안 되는 소중한 친구야.”

이내 말을 마친 도윤이 호식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내 홱 하고 몸을 완전히 돌린 호식이 씨익 웃는다.

“그냥 해 본 말인데, 뭘 그렇게 오글거리게 진지 빨고 있냐? 뭐, 소중한 친구? 푸핫.”

순간 도윤의 얼굴이 옅게 달아오른다.

“저 사람이지?”

호식이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묻는다.

그쪽에 있던 사내도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가 170센티미터가 조금 넘을까?

서양인치고 상당히 작은 키에, 곱슬머리가 유난히 눈에 돋보이는 앳된 얼굴.

이윽고 시선을 돌린 도윤이 그 사람과 눈을 마주한다.

“다녀와. 기다릴게.”

“…….”

“난 니가 알아서 내 돈 많이 불려 줄 거라고 믿음.”

말을 마친 호식이 도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추켜세웠다.

그 모습에 도윤이 피식 미소 지었다.

“같이 가도 돼.”

“일없네. 김빠졌어. 뭐, 토킹 실력이 부족해서 저 코쟁이랑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안 될 것 같으면, 그때 부르라고.”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

“호오?”

호식이 묘한 감탄사를 터뜨렸다.

“다녀올게.”

말을 마친 도윤이 사내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뚜벅, 뚜벅, 뚜벅.

거리가 조금씩 좁혀짐에 따라 사내도 몸을 완전히 돌려 도윤을 바라본다.

불과 세 발자국 거리를 남겨 두고, 제자리에 멈춰 선 도윤이 가까이에서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다.

이윽고 조금 앳된 얼굴일 뿐 기억 속의 인물이 확실하다고 판단한 도윤이 입을 열었다.

“Excuse me. Mr…….”

사내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끝을 흐리던 도윤이, 마침내 그 사람의 이름을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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