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첫 번째 투자 (4)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을 무렵,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인근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박 대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박 대리가 뒤를 돌아보자 도윤이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Hello?”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미스터 강.”
이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마크의 목소리에 도윤이 씨익 웃었다.
“연락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생각은 해 보셨나요?”
“예. 그 일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늦었지만 지금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마크의 물음에 도윤이 흔쾌히 대답한다.
“물론이죠.”
“그럼 프론트 스트리트에 있는 오티스 레스토랑에서 볼까요? 거기 디저트가 예술이거든요.”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예,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이윽고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도윤이 박 대리를 돌아본다.
“오티스 레스토랑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잠시만요.”
박 대리가 숙소 내에 비치된 인터폰을 들어 안내 데스크 직원과 무어라 말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잠시 뒤 인터폰을 내려놓은 박 대리가 도윤에게 말한다.
“프론트 스트리트 4번가에 있네요. 걸어서도 15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예요.”
말을 마친 박 대리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회장님 아들인 장호식에게도 결국 말을 놓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도윤에게는 말을 놓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말을 놓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존대가 나온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더 어렵단 말이지…….’
도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박 대리가 순간 화들짝 놀란다.
어느새 도윤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 아닙니다.”
당황한 박 대리가 재빨리 대답했다.
“뭐야, 대리 형. 갑자기 왜 그래? 설마…….”
호식이 후다닥 뒤로 물러난다.
“그런 취향…….”
호식이 몸을 움츠리며 말끝을 흐렸다.
“아니야!!!!!!”
순간 박 대리의 고함 소리가 숙소 내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 *
도윤 일행이 오티스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청바지에 케쥬얼한 차림의 마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을 맞이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크의 말에 도윤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제가 할 말을 하시는군요.”
“그런데 이분들은……?”
마크가 호식과 박 대리를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묻자, 도윤이 곧바로 소개한다.
“아, 제가 미국은 초행이라 여기 있는 이분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박 대리라고 합니다.”
도윤의 말에 박 대리가 유창한 영어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도윤이 호식을 가리키며 무어라 소개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자, 호식이 입을 열었다.
“장호식이라고 합니다. 이쪽에 있는 강도윤하고는 친구이고, 마크 씨의 프로그램 공동 투자자입니다.”
호식의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오자 도윤이 잠시 눈을 크게 뜬다.
‘하긴, 있는 집 자식에 사시까지 패스한 놈인데…….’
이내 수긍한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예? 공동 투자자요?”
마크가 조금 놀란 어투로 반문하자 쓰게 웃은 도윤이 대답한다.
“마크 씨의 기술에 관심이 많아서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같이 동석할 수 있을까요?”
“괜찮긴 합니다만, 미스터 강.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가볍게 머리를 긁적인 마크가 도윤을 보며 말을 잇는다.
“지금 미스터 강은 제가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에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기술을 응용하겠다는 미스터 강의 생각은 잘 알겠지만, 그 기술을 응용하여 만들 프로그램은 아직 초안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
“투자 금액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에서 공동 투자자라니… 애꿎은 피해자만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제가 이 친구가 잃은 돈까지 모두 물어 줘야죠.”
도윤의 말에 마크는 물론이고 호식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그게 무슨 소리…….”
진정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은 도윤이 마크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애초에 제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들입니다. 이 친구는 마크 씨가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
“그저 저 하나만 믿고 따라와 줬을 뿐이죠.”
“미스터 강은 왜 그렇게까지…….”
마크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도윤이 대답한다.
“마크 씨의 기술에서 제 꿈을 봤으니까요.”
“……!”
도윤의 대답에 마크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꿈을 위한 이런 제 행동이 이상한가요?”
도윤의 물음에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미스터 강은 멋진 사람입니다.”
“그 말은 제 제안에 대한 긍정의 의미로 봐도 될까요?”
마크가 옅게 웃으며 대답한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미스터 강과 똑같은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들이 있었다면, 그와 관련된 동아리를 만들었을지도 모르지요.”
‘페이스매시(facemash)라는 이름으로 말이지.’
도윤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마크가 계속 말을 잇는다.
“프렌드스터(Friendster)라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있습니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 주고 있죠. 서비스 시작과 동시에 이미 회원 수가 수백만에 육박할 정도로요.”
마크의 말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렌드스터라면 도윤도 알고 있다.
SNS 역사의 시초이자, 한때 회원 1억 1,500만 명, 월 방문자 수가 최고6,1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촉망받는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였으니까.
“하지만 프렌드스터는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
순간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짐짓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도윤이 묻는다.
“왜죠? 마크 씨의 말대로, 그 정도 상승세라면 사용자수가 조만간 수천만, 아니 수억이 될 수도…….”
“그래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
“아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 그 많은 이용자들을 받아들이기엔 현재의 프렌드스터 기술력으로는 역부족이에요. 아마 조만간 서버 부족으로 페이지 하나를 로딩하는 데 수십 분이 걸릴 거예요.”
“…….”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회원이 사이트를 떠나겠죠.”
정확하다.
순간 도윤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이 사람도 회귀자라거나…….’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도윤을 보며 마크가 계속 말한다.
“플랫폼은 성장시키되 성능은 저하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규모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기술력을 강화시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용자 수를 제한해야 합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도윤의 눈치를 살피던 마크가 마지막 말을 잇는다.
“아마 많은 돈이 들어갈 겁니다. 개인 차원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요. 미스터 강의 나이에 그 정도 돈은…….”
“500만 달러.”
“예?”
“제가 이번 사업에 대해 마크 씨에게 투자할 돈은 500만 달러입니다.”
“……!”
마크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5, 500만 달러요? 아니, 그보다 그런 돈을 미스터 강이 가지고 있다구요?”
“참고로 제가 마크 씨보다 훨씬 나이가 많습니다. 마크 씨는 저보다 어린 나이에 더 많은 돈을 벌었을 텐데요?”
“뭐, 그야…….”
이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인 마크가 말을 잇는다.
“하지만 500만 달러는 과합니다. 아직 초안조차 잡히지 않은 사업에 500만 달러라니요?”
“필요하면 돈을 다른 곳에서 구해서라도 더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
이번에는 옆에 앉아 있던 호식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스터 강은 혹시 저한테 단순히 기술에 대한 판매만을 원하시는 건가요?”
마크가 조금 가라앉은 눈빛으로 묻자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기술에 대한 소유권은 물론, 사업에 대한 일체의 운영권도 모두 마크 씨가 소유입니다.”
도윤의 단호한 대답에 마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그로 인해 미스터 강이 얻는 것은요? 새로운 사업의 대주주가 되기를 원하나요? 그에 따른 경영권을…….”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경영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지분도 5퍼센트, 아니 단 1퍼센트면 충분하구요.”
“야, 강도윤!”
순간 옆에 있던 호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
“……?”
“훗날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올랐을 때 한국 서버에 대한 사업권과 관리권은 저한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서버가 아닌, 한국에 대한 서버만을 원한다.
잠시 고민하던 마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그리고 훗날 사업이 성공했을 때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내키지 않으시면 거절하셔도 무방하구요.”
부탁이라는 말에 멈칫한 마크가 이어지는 도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부탁이라는 게 더 무섭군요. 미스터 강의 부탁이라…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는데요?”
“제 꿈을, 마크 씨의 꿈을 꼭 이루고 싶습니다.”
힘 있는 도윤의 말에 마크가 잠시 도윤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쉰 마크가 입을 열었다.
“제가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는 제안이군요. 단, 당장 500만 달러는 한 번에 받지 않겠습니다. 천천히 시범 운영부터 해 보고 본격적인 사업을 준비하고 싶거든요.”
“물론입니다.”
“우선 올해 하반기에 제가 대학에 입학한 뒤, 서버를 시범 운영할 계획입니다. 그 전까지는 서버 구축과 프로그램 제작에 신경을 써야겠죠.”
“마크 씨 뜻대로. 저는 그저 뒤에서 서포트만 하겠습니다.”
“…….”
올곧은 눈빛의 도윤을 잠시 바라보던 마크가 말을 잇는다.
“지분 얘기는… 결과에 따라 분배해드리겠습니다. 500만 달러나 싸들고 온 분에게, 나오지도 않은 결과를 가지고 5퍼센트니, 1퍼센트니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마크의 말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도윤이 이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미스터 강에게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
도윤이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마크가 말한다.
“Will you be my friend?”
도윤이 씨익 미소 지었다.
“Sure.”
* * *
“성군 납셨네, 성군 납셨어. 아주 자원봉사자야? 수십억이나 되는 돈을 다 퍼 주네, 다 퍼 줘.”
“…….”
묘하게 비꼬는 말을 한 귀로 흘린 도윤이 박 대리를 돌아본다.
“박 대리님, 혹시 출국 예정일 변경할 수 있나요?”
“예? 아, 예. 항공 티켓 날짜만 변경하면 되는데,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서 가능합니다.”
“야! 기껏 이 먼 아메리카 땅까지 와서 볼일만 보고 그냥 돌아가게? 최소한 자유의 여신상 정도는 봐 주고 가야지?”
호식이 다급히 말했다.
“그럼 내일 곧바로 출국 가능할까요?”
“야, 야!”
울상을 짓는 호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윤이 계속 말했다.
그런 호식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던 박 대리가 입을 열었다.
“항공편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좌석이 없을 수도 있어서…….”
“야, 이유나 알자. 왜 이렇게 급하게 가려고 하는 건지. 나야 그렇다 치고, 너는 귀국하면 얼마 안 있어서 곧바로 발령이잖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라고!”
“그래서 일찍 가려는 거야.”
“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호식을 보며 도윤이 말을 잇는다.
“올해는 큰일이 있을 예정이잖아?”
“그러니까, 뭐! 큰일이 뭔데?”
가슴을 탕탕 치며 말하는 호식을 보며 이윽고 도윤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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