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월드컵
“연락 왔습니다.”
번개의 말에 박판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번개, 실력 아직 살아 있는데? 현역으로 뛰어도 되겠어?”
“…이제는 늙어서요.”
“세월이 흘러도 번개는 번개지. 사람들이 괜히 니 손동작을 보고 번개라고 부르겠나?”
“…….”
“캬~ 번개표 스데끼(낱장치기)가 참 예술이었는데, 나도 같이 갈 걸 그랬나?”
낱장치기는 위에 있는 패를 섞으면서 제일 아래로 보내는 기술을 말한다.
“오빠!”
순간 빼액 고함치는 정 마담을 보며 박판섭이 귀를 틀어막았다.
“아, 농담이야, 농담. 가씨나, 귀청 떨어지겠네.”
팩 하고 고개를 돌리는 정 마담을 일별한 박판섭이 다시 번개를 돌아본다.
“스코어 맞추기에 첫 골을 때려 넣는 주인공 맞추기라… 토토랑 경마를 합쳐 놓은 새로운 시스템인가?”
“망치파 위에서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겠지.”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박판섭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랑 장소는?”
“망치파가 관리하고 있는 하우스 중, 영등포에 있는 하우스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한 것 같습니다. 시간은 일주일 뒤, 월드컵 경기 날짜에 맞춰서 하우스를 개장할 겁니다.”
“영감님, 어쩔 거야?”
박판섭이 이번에는 소파에 몸을 묻고 있는 도윤을 돌아봤다.
“뭘?”
“설마 모든 판에 다 낄 생각은 아니지?”
박판섭의 물음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니지.”
“…….”
“판돈을 거는 건, 가장 큰 한 경기면 충분해.”
“가장 큰 한 경기라… 우리나라가 뛰는 경기가 판돈은 가장 클 테고, 그중에서도 특히 큰 판이라면… 폴란드전인가?”
도윤이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자, 긍정의 의미라고 생각한 박판섭이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가장 해볼 만한 전력이고, 첫 경기라는 메리트도 있으니까…….”
“만약에.”
도윤이 박판섭의 말을 끊고 짧게 말했다.
“……?”
“우리나라가 16강에 간다면?”
박판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어디가 뭘 가?”
“우리나라가, 16강.”
순간 박판섭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크크크크.”
“…….”
“푸하하하하핫! 영감님, 보기랑 다르게 유머 감각이 있는데? 올해 들은 얘기 중에 가장 웃긴 얘기였어.”
“…….”
여전히 말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도윤을 보며 박판섭이 말을 잇는다.
“어린 영감님, 영감님이 애국심에 하는 말인지, 아직 어려서 잘 몰라서 하는 말인진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16강에 갈 일은 절대 없어.”
“…….”
“우리나라가 처음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1954년 스위스에서부터 바로 직전인 1998년 프랑스 월드컵까지, 본선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어.”
“…….”
“오죽했으면 이번 대표팀 목표가 1승일까? 16강? 홈이라는 이점을 감안해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야.”
박판섭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영감님, 목적을 잊지 마. 냉정하게 생각해야 해. 망치파를 무너뜨리는 건 내 목표이기도 하다고.”
“…….”
“워낙 자신감에 차 있어서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는 줄 알았는데, 큰일이군. 판을 지배하지 못하면 대가리는커녕, 중간 관리자급도 만나기 힘들 텐데…….”
박판섭이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잇는다.
“지금이라도 전문가를 섭외할게. 토토에 환장해 있는 놈들을 몇 알고 있거든. 월드컵이라는 게 워낙 변수가 많아서 큰 의미는 없겠지만, 생초짜들끼리 머리 맞대고 끙끙 앓는 것보다는…….”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도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기 하나 할까?”
“뭐?”
내기라는 말에 박판섭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사실 돈에는 그리 큰 욕심이 없었거든. 망치파의 뒤만 캐내면, 하우스들은 모조리 쓸어 버릴 생각이었어. 물론, 도금은 모조리 압수하고 말이야.”
법적으로 압수한 도금은 모조리 국고로 환수 조치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박판섭이 발끈한다.
“그럼 우리가 뿌린 돈은……!”
“뭐, 그 돈이야 복구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
생각이 바뀌었다는 도윤의 말에 박판섭이 멈칫한다.
“무슨…….”
“나랑 내기 하나 하자.”
“……?”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박판섭을 보며 도윤이 말한다.
“우리나라가 8강, 그 이상까지 진출한다는 데 내 돈 30억을 걸지.”
“……!”
박판섭이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추가적으로, 내가 내기에서 지면 니 소원도 하나 들어주겠어.”
“…….”
“어때? 니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진심이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정도면 내 의견에 따를 텐가? 30억이라면 뿌린 돈을 충분히 메꾸고도 남을 정도고, 검사 소원 하나면 전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나?”
“아직도 나를 모르겠나?”
도윤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올곧은 도윤의 두 눈빛을 바라보던 박판섭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뭐, 좋아. 그런 조건이라면, 니 말대로 내가 손해 보는 장사는 전혀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조건이지.”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박판섭이 묻는다.
“니 의견이라는 게, 뭐냐?”
“간단해. 판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다가, 가장 커졌을 때 올인.”
“가장 커졌을 때라면…….”
도윤이 씨익 미소 지으며 짧게 대답한다.
“16강.”
* * *
드디어 2002 한일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거리는 온통 붉은악마들로 가득했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한 목소리로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쳐 댔다.
마치 10년 지기 친구라도 되는처럼,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동무를 했고, 실점에 같이 울고, 득점에 같이 웃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이 2승 1무로, 월드컵 16강행을 확정 지었을 때 전 국민이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 속에, 하나가 되었다.
서울 시민들이 서울시청광장 앞 붉은악마들을 보며, ‘서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나’ 놀라고 있을 때, 망치파 식구들은 ‘서울에 이렇게 많은 돈이 있었나’로 놀라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어마어마하게 쌓인 현금 다발을 보며, 망치파 하우스 총 책임자, 독사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크크크크크. 준호야, 우리 이러다가 때부자 되는 것 아니냐?”
독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자동차 열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외제차 열쇠였는지 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은 현금뿐만이 아니었다.
금목걸이나 각종 귀금속은 물론이고, 자동차 키까지,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모두 다 있었다.
준호라 불린 성 실장이 짧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다.
“부자, 되실 겁니다.”
“이월돼서 쌓인 판돈을 제외해도, 이 정도면 수백억은 되겠군. 이게 다 우리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말이지. 크하하하하하!”
독사가 광소를 터뜨렸다.
망치파에서도 하우스 관리 및 운영비 명목으로 일정 수수료를 도박꾼들에게 뜯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남는 이윤이 상당했다.
“한철 장사인데, 더 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지. 설마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할 줄이야. 크크크크크.”
독사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준호야, 16강 배당율은 얼마나 될 것 같냐?”
독사의 물음에 무언가 생각하던 성 실장이 대답한다.
“지금까지의 흐름, 이월된 판돈, 추가적으로 유입될 호구들까지, 전부 포함하여 계산하면…….”
“계산하면?”
독사가 눈을 초로초롱 빛내며 되묻는다.
“승률이 높은 이탈리아 쪽에 걸어도 최소 수백 배는 나올 겁니다. 그 반대라면 수천 배까지도 나오겠죠.”
“판돈이 최소 1억부터 시작하는 도박판에 수천 배라… 미치겠군.”
독사가 자못 설렌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몇 시라고 했지?”
“밤 8시 30분입니다.”
“어쩌면 큰돈을 먹을 수 있는 마지막 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준호 니가 마지막까지 준비 철저히 해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예, 형님.”
“아참! 그리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짝 하고 손뼉을 친 독사가 성 실장을 바라본다.
“16강부터는 승부가 안 나면 연장전까지도 간다고 했지? 그 연장전에서 1골이라도 넣는 순간, 게임도 끝나는 거고.”
“예. 골든골 방식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독사가 말을 잇는다.
“이번 판은 룰을 조금 바꾸지. 꾼들이 판돈을 먹어야 우리도 합법적으로 수수료를 뜯어낼 수 있을 테니까.”
“바꾸라 하심은…….”
씨익 미소 지은 독사가 성 실장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내 모든 설명을 들은 성 실장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독사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그래. 믿는다, 준호야. 이만 나가 봐.”
독사의 말에 허리를 숙인 성 실장이 몸을 돌려,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울에 있는 돈이 이쪽으로 다 모이는 것 아닌가 모르겠군. 크하하하하하!”
밀실 내부에 홀로 남은 독사의 광소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 *
이탈리아전 16강 경기 시작 30분 전.
“혹시 판돈 거는 건 처음이라 긴장하고 있는 건 아니지?”
“설마.”
김석두의 물음에 도윤이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잠시 후, 대형스크린에 화면이 들어옴과 동시에 단상에 성 실장이 걸어 나온다.
마개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은 성 실장이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 아. 하우스를 찾아 주신 손님들에게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순간 하우스 내부의 웅성거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생각보다 결과를 맞춰 내기가 어려운 건지, 제법 많은 판돈이 이월된 상태입니다. 해서, 룰을 조금 바꿀까 합니다.”
성 실장이 말을 마치자 다시 하우스 내부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웅성거림 속에 한 중년 사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성 실장! 경기 시작 30분 남았는데, 갑자기 무슨 룰을 바꾸겠다는 거야!?”
“혹시 장난질 할 생각이라면 가만 안 둘 거야!”
싱긋 웃은 성 실장이 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단지, 판돈을 거는 시점을 전반전이 끝난 이후로 할까 합니다.”
다시 하우스 내부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전반전이 진행되는 동안 경기를 충분히 즐기시고, 경기가 끝난 이후에 판돈을 걸어 주시면 됩니다. 아! 첫 골이 전반전에 터질 수도 있으니, 두 번째 조건은 마지막 골을 넣는 주인공으로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성 실장이 큰 소리로 외친 남자를 바라보며 묻자, 그 남자가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조건이라면야…….”
“아! 한 가지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만…….”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짝 하고 손뼉을 친 성 실장이 말을 잇는다.
“지금까지 이월되어 쌓인 판돈은…….”
성 실장이 말끝을 흐리자 하우스 내부가 더욱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 대부분이 지역에서 한가락 하는 거물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어림잡아 수십 명도 아닌, 수백 명.
최소 판돈인 1억씩만 배팅했다고 쳐도, 1게임에 쌓이는 돈이 수백억이다.
다른 나라 경기까지 포함하면, 그런 억대 게임이 수 십 경기.
몇몇 사내들이 꿀꺽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마치 이 분위기를 즐기기라도 하듯 잠시 뜸을 들이던 성 실장이 마침내 마지막 말을 잇는다.
“약 2,700억입니다.”
성 실장이 말을 마치는 순간 하우스 내부가 완전히 침묵으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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