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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49화 (49/174)

49화 공판(公判)을 위한 준비

그 시각, 방문 밖에 있던 윤만석이 쩌억 하고 입을 벌리며 길게 하품을 했다.

“하~ 암. 따분하네. 그냥 같이 들어갈 걸 그랬나.”

아직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기다리자니 죽을 맛이었다.

전화나 하면서 시간이나 때울까 휴대폰을 꺼내 들던 윤만석이 순간 눈을 반짝인다.

우우웅, 우우웅.

때마침 휴대폰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타이밍 끝내주는데?”

화면에 떠오른 발신자를 확인한 윤만석이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신보안, 닥터? 뭔가 특이 사항이라도 발견되었는지?”

“통신보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수화기 너머로 부산 동부지검의 공의, 김석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옛날 생각나잖아?”

윤만석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윤만석과 김석환은 군 복무 당시 각각 같은 부대의 군법무관, 군의관이었다.

때문에 윤만석이 종종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곤 했다.

“이상한 게 하나 있어.”

“이상한 거?”

윤만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고개를 끄덕인 김석환이 입을 열었다.

“진료차트가 2개야.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

“차트가 2개라니? 뭐 복사본 같은 거 아니야?”

김석환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바보냐? 분명히 다른 차트야. 나이도 엇비슷하고, 심지어 같은 날짜에 똑같은 수술이 진행된 것 같은데, 두 차트 내용이 상당히 달라.”

“달라?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다르다는 거야?”

윤만석의 물음에 잠시 손에 들린 차트로 힐끔 시선을 돌린 김석환이 말을 잇는다.

“뭐랄까… 공을 들인 정도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알아듣기 쉽게 좀 설명해.”

“너, 의료사고 나면 의사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게 뭔 줄 알지?”

잠시 고민하던 윤만석이 대답한다.

“…차트 조작?”

김석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직접 수사를 한다고 생각하고 들여다봐서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말해 봐. 수사관으로서 니 느낌을.”

“한 차트는 전형적인 보여 주기식 진료차트 같아. 의료 분쟁에 대비해서, 꼭 필요한 내용만 적어 놓는. 그런데…….”

“그런데?”

“다른 한 차트는 그게 아니야. 마치 대통령 주치의라도 되는 것처럼, 매 시간, 매 분마다 사소한 몸의 변화까지 하나하나 다 체크해서 기록해 뒀어. 마치 애가 잘못되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음…….”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윤만석이 묻는다.

“분명히 똑같은 수술이라고 했지?”

“차트상으로는.”

김석환의 말에 윤만석이 턱을 쓰다듬으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심장이식 수술은 성명과 같은 초대형 병원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심장이식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은 많았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수술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큰 수술이 같은 날, 두 개나 진행되었다.

‘심지어 나이까지 비슷하다고 했지.’

구리다 못해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애 이름이 뭐…….”

“개자식아!!!!!!”

순간 방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윤만석이 눈을 크게 떴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고성이었지만, 이 목소리는 분명히 도윤의 것이었다.

“잠깐만. 일단 그 차트 따로 챙겨 둬. 있다가 내가 다시 전화할게.”

통화를 끊은 윤만석이 곧바로 출입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와 동시에 눈앞으로 보이는 광경에 윤만석이 흠칫한다.

도윤이 의사를 향해 갑자기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마치 휘두르려는 듯, 주먹을 등 뒤로 당기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안 돼!!!!!!”

버럭 고함친 윤만석이 도윤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도윤에게 다가선 윤만석이 주먹을 힘껏 당긴 채,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도윤의 뒤를 감싸 안았다.

“당장 주먹 내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도윤을 보며 윤만석이 재차 외친다.

“빨리!”

도윤이 힘없이 팔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박환영이 성난 표정으로 말한다.

“썅! 검사면 사람 멱살 함부로 잡고, 주먹 휘둘러도 되는 거야!?”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박환영이 도윤을 노려본다.

“이거 폭행죄로 내가 무조건 고소할 거야!”

“이 개…….”

“자, 자.”

도윤의 입을 급히 틀어막은 윤만석이 그대로 박환영과 거리를 벌렸다.

“아직 주먹 휘두른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쯤 합시다.”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한 윤만석이 입을 열었다.

항상 옅은 미소를 입에 물고 있어, 온화한 느낌을 주던 박환영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 표정의 변화만으로 사람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입고 있던 와이셔츠 위쪽 단추를 거칠게 풀어헤친 박환영이 도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래고래 고함친다.

“미친 새끼라고? 미친 새끼는 바로 너겠지! 니가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줄 알아!?”

“뭐?”

도윤이 으득 이를 갈았다.

발끈한 도윤이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

삐리리리리, 삐리리리리.

때맞춰 박환영의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울리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도윤을 노려보던 박환영이 순간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심호흡한다.

그리고 곧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박환영입니다.”

박환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명성호텔에서 기자회견?”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는 박환영을 보며, 도윤과 윤만석의 두 눈이 마주친다.

“…그래?”

3분가량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박환영이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이윽고 모든 통화가 끝이 났는지, 박환영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도윤을 향해 시선을 돌린 박환영이 비릿한 미소를 그대로 입에 문 채 입을 열었다.

“이것 봐. 바뀌는 건 없잖아?”

“뭐?”

“세상은 오히려 너같이 나서기 좋아하는 놈들이 가장 먼저 도태되고, 뒈지는 거야.”

“이 새…….”

“에헤이, 진짜!”

윤만석이 도윤을 급히 출입문 밖으로 끌어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숙인 윤만석이 그대로 출입문을 닫았다.

* * *

도윤을 끌고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인근의 공원까지 데리고 나온 윤만석이 조금 화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똑똑한 놈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도윤을 보며 윤만석이 말을 잇는다.

“검사가,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법으로 조져야지! 주먹질이라니! 너, 독직폭행이 얼마나 귀찮은 놈인지 몰라서 그래!?”

윤만석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어휴, 평소 안 그러던 놈이 이러니까 더 답답…….”

“선배님.”

“왜, 인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여는 도윤을 보며 윤만석이 빼액 하고 고함쳤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도윤이 말을 잇는다.

“오늘 당장 공소장(公訴狀)써서 기소(起訴)하시죠.”

“너, 진짜……!”

“절대 감정적으로 생각하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아…….”

윤만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똑똑한 놈이, 오늘따라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좋아. 니 말대로 오늘 공소제기 한다고 치자. 이미 증거가 확보된 망치파 애들은 제외하고, 또 누구를 기소할 건데?”

잠시 뜸을 들이던 도윤이 대답한다.

“박환영.”

“너, 진짜!”

역정을 내려는 윤만석을 보며 도윤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오길태.”

도윤의 말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윤만석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뭐, 오길태? 설마 내가 아는 그 오길태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

서로 간의 침묵이 얼마간 지속되었을까?

“…진짜 미치겠군.”

윤만석이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명성의 오길태. 절대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거, 검사로서의 경력이 전무한 너도 잘 알잖아?”

“…….”

“설령 망치파의 뒤에 명성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치더라도, 오길태를 기소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야.”

“…….”

“어지간한 증거로는 모조리 빠져나올 거다. 아니, 심하면 검찰의 강압 수사라며 역풍이 불 수도 있겠지.”

“…….”

“오길태가 갑자기 미쳐서 스스로 자기 죄를 분다면 모를까… 아니, 그것도 안 되겠군. 자백보강법칙이 있으니까.”

자백보강법칙.

피고인이 임의로 한 증거능력과 신용성 있는 자백에 의하여 법관이 유죄의 심증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자백에 대한 다른 보강증거가 없으면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

형사소송법뿐만 아니라 헌법으로도 보장하고 있는 이 법칙은, 검찰과 경찰의 고문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마련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윤만석의 말에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공범인 공동피고인의 진술은 자백에 해당하지 않는다.”

“…뭐?”

“즉, 해당 피고인이 아닌 다른 공범의 진술은 충분히 피고인의 증거가 될 수 있죠.”

말을 마친 도윤이 품에서 정사각형 모양의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

“설마…….”

이미 도윤의 녹음 파일로 톡톡히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는 윤만석이 눈을 크게 떴다.

도윤이 재생 버튼을 누르자, 박환영과 도윤이 나눈 대화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녹음 파일이 재생되는 동안, 윤만석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 가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서 경악으로, 경악에서 분노로.

이윽고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대화가 끝났을 때.

윤만석의 두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이 파일과 지금까지 선배님이 수사한 내용과 증거.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

도윤이 말을 마쳤음에도 윤만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쯤 되니 범죄자들이 도윤의 앞에만 서면 스스로 회개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믿을 수가 없군.”

“…….”

“나는 이 빌어먹을 쓰레기 놈들이 스스로 회개했다고 믿지 않아. 아까 박환영이가 너한테 하는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지.”

윤만석의 도윤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도대체 무슨 마술을 부린 거지?”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영업상 비밀입니다.

“뭐?”

윤만석이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까마득한 후배의 밑천까지 털어먹으려고 하시는 건,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헛!”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윤만석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소, 되겠습니까?”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도윤이 재차 묻는다.

“지금 이 녹음 파일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들어야지.”

도윤의 표정이 밝아진다.

“돌아가는 즉시 재판 준비한다. 예의 갖춰서 출석 요구서부터 보내 드리고, 필요하면 체포영장 발부받아서 강제로라도 끌고 와야지.”

“…….”

“구속영장은 필수고. 오랜만에 소설 한번 써 봐야겠어. 내 별명이 명작가 윤만석이거든.”

말을 마친 윤만석이 한쪽 눈을 찡긋한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됐어.”

손을 휘휘 저은 윤만석이 도윤을 바라본다.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될 만한 사건인 만큼, 일단 기소를 하게 되면 재판은 매우 빨리 진행될 거다. 아마 너도 법원에 꼭 출석해야 할 거야.”

“오지 말라고 해도 갈 겁니다.”

윤만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시겠지. 둘이서 나쁜 놈들 작업 한번 제대로 해 보자고.”

도윤이 힘차게 대답한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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