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사건을 병합하겠다고?
눈부신 광채가 방 안을 가득 뒤덮기를 잠시.
이윽고 강렬한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도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멈춰 선 주사위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첫날 이 게임 같은 능력을 접한 이후, 두 번째로 보는 다이아 빛 주사위.
도윤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묘한 흥분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때,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다이아 등급의 주사위를 획득하였습니다!]
[주사위를 한 번 더 굴려 주세요.]
홀린 듯 주사위를 바라보고 있던 도윤이 바닥에 떨어진 다이아 주사위를 그대로 집어 들었다.
“SSS등급 스킬……!”
지식의 대가 이후 처음으로 얻게 될 SSS등급 스킬이다.
기대감이 없다면 거짓이리라.
도윤이 지체 없이 손에 쥔 다이아 주사위를 바닥에 굴렸다.
툭, 데구르르르.
[다이아 등급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능력은 대상자의 운에 따라 랜덤하게 결정됩니다!]
주사위가 도윤의 손을 떠남과 동시에 새로운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이윽고 주사위가 완전히 멈추어 섰다.
[SSS등급, ‘공감의 대가’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공감의 대가(SSS) - 패시브(lv.1)
상대방의 감정을 스스로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이 신체의 특정 부분에 각각의 색깔로 옅게 표시됩니다.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의 깊이가 깊을수록 색깔이 짙어집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함에 따라 추가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현재 사용자님의 레벨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기쁨과 악의, 두 가지입니다.
기쁨 - 파란색
악의 - 보라색
모든 설명을 읽은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대박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니?
상상에서나 나올 법한 능력이 아닌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볼 법한 일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한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은, 이 사람이 과연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저 사람의 감정을 내가 느낄 수만 있다면, 그런 능력이 있다면…….
스킬의 활용법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도윤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일견 심문의 달인 스킬의 하위개념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공감의 대가는 패시브 스킬이다.
따로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눈앞에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 보인다는 말이다.
스킬 사용 실패는 물론, 재사용 대기시간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게 바로 패시브 스킬이니까.
“공감의 대가…….”
작게 중얼거리는 도윤의 미소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 * *
새로운 스킬을 얻은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주말 이른 아침부터 부산으로 내려온 도윤이 눈앞에 자리한 커다란 건물을 바라본다.
“부산지방검찰청.”
도윤이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옛 일제 강점기 건물풍의 잔재가 남아 있던 기존의 건물에서, 작년부터 새롭게 이전한 눈앞의 건물은 그 크기부터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각 지역에 있는 검찰지청의 경우에는 대부분 법원이 바로 옆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민원인들의 편의뿐만 아니라, 재판에 참여하는 법조인들의 빠르고, 효율적인 업무 처리를 위해서다.
심지어 그 높이마저 똑같았는데, 법원과 검찰 간, 힘의 균형이 평등하다는 의미로 초기 공사부터 설계 자체를 그렇게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부산지방검찰청은 바로 옆에 부산고등검찰청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는데, 도윤은 그 모습이 마치 쌍둥이 빌딩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윤이 잠시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고 있자, 누군가 톡 하고 어깨를 두드린다.
“왔냐?”
도윤이 고개를 돌리자 초췌한 얼굴의 윤만석이 서 있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뭐, 일이 일이다 보니까. 들어가자.”
“…들어가기 전에 말씀부터 해 주셔야죠.”
“응?”
“왜 저를 여기로 불렀는지요.”
“아, 아…….”
윤만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일과 관련해서, 높으신 분이 한번 보자고 해서 말이야. 같이 수사했는데, 당연히 같이 가야지?”
“예?”
도윤이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밖에서야 검사랍시고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지, 안에서는 줄 없으면 허리도 못 펴고 다니는 게 이쪽 바닥이니까.”
“…….”
잠시 침묵을 지키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그 높으신 분이 누군데요?”
“부산지검장님.”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짓는 도윤을 보며 윤만석이 말을 잇는다.
“인맥은 많을수록 좋아. 니 입장에서 이득이면 이득이지, 절대 손해는 아니라니까?”
‘아무래도 오해하고 계신 것 같네.’
재빨리 말을 잇는 윤만석을 보며 도윤이 쓰게 웃었다.
인맥?
썩은 동아줄이 아닌, 굳세고 단단한, 쉽게 끊어지지 않는 동아줄이라면 물론 도윤도 움켜쥘 마음이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높은 사람의 소환이라…….’
좋지 않다.
“기다리시겠다. 일단 올라가자.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생각은 아니잖아?”
윤만석이 도윤을 이끌어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도윤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지검장실에 도착한 윤만석과 도윤을 맞이한 것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었다.
가운데만 깊게 벗겨진, 일명 모 게임에 나오는 헤이아치 머리에, 번들거리는 개기름.
쫙 찢어진 두 눈과 얇은 입술이 상당히 간사해 보이는 느낌을 주는 중년 남자.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윤만석과 도윤의 두 눈이 동시에 크게 떠졌다.
“봉준이, 니가 왜…….”
윤만석이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왔나?”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몸을 묻고 있던 현 부산지검장, 이준석이 입을 열었다.
“아,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검장님.”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만석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누구야?”
이준석이 턱짓으로 도윤을 가리켰다.
“아, 아. 이번에 서울중앙지검에 발령받은 강도윤 검사입니다. 이번 수사에 많은 도움을 줘서, 지검장님께 인사라도 시킬까 해서…….”
“강도윤? 아
, 아…….”
이내 알겠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린 이준석이 도윤을 바라본다.
“그 천둥벌거숭이가 너야?”
도윤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이준석의 가슴 한구석에 옅게 떠오른 보랏빛을 도윤은 놓치지 않았다.
도윤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강도윤이라고 합니다.”
“인사는 됐고.”
손을 휘휘 내저은 이준석이 윤만석에게 시선을 돌린다.
“지금 하고 있는 사건, 봉준이한테 넘겨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준석이 한쪽 귀를 손가락으로 틀어막았다.
“아, 귀청 떨어지겠다. 살살 얘기해, 살살.”
“…지검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두 번, 세 번 얘기하게 하지 마.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잘 알잖아? 지금 하고 있는 성명병원 사건, 그거 봉준이한테 넘겨.”
“말도 안 됩니다!”
“왜 말이 안 돼?”
이준석이 서늘한 눈초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부하의 공적이 탐이라도 나나?”
“예? 그게 무슨…….”
“애초에 봉준이가 잡은 그 뽕쟁이 놈한테서 쭉 이어져 온 사건이잖아. 아니야? 봉준이가 사건을 병합하여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윤만석이 충격으로 입을 다물었다.
“애당초 이 상황, 웃기지 않아? 붙잡은 뽕쟁이 놈한테서 압수한 통장, 그 통장을 통해 추가 인지한 사건이잖아? 둘로 떼어 놓고 볼 수 없는 범죄란 말이야. 한줄기라고.”
이준석이 안 그래도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말을 잇는다.
“같은 사건에 두 명의 검사? 그건 아니지. 고구마가 크다는 이유로, 그 고구마만 뚝 떼어 낼 생각은 아니겠지? 본인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말이야.”
일부 검찰이나 경찰이 보통 범죄자들, 특히 마약사범들을 줄줄이 엮어 넣을 때, 고구마 줄기 캐듯 잡아들인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고구마 줄기를 땅에서 뽑았을 때, 줄줄이 딸려 나오는 고구마들을 보며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윤만석을 보며 이준석이 마지막으로 말을 잇는다.
“오늘 당장 봉준이한테 사건 넘겨. 또 기자들한테 이리저리 물어뜯기지 말고. 한 번 피 봤으면 됐지, 두 번 피 볼 필요는 없잖아?”
말을 마친 이준석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박봉준을 돌아본다.
“봉준이 너는 오늘 만석이한테 사건 받는 대로 확실히 수사 마무리하고. 전 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는 사건이니,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할 거야.”
은근히 ‘확실히’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이준석을 보며 박봉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차질 없이 수사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박봉준이 입을 열자,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윤만석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실수다.
당연히 예상했어야 할 반응이다.
애초에 이 시기에 부산지검장이라는 자리에 앉은 사람의 연락을 받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냥 모른 척, 공판 준비를 빠르게 마무리 지었어야 했다.
일단 일이 시작되면, 사건 하나밖에 보지 못하는 자신의 패착이다.
큰 흐름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윤만석이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지금부터 인수인계하려면 바쁠 테니까, 이만 둘 다 나가 봐. 그리고…….”
이준석이 도윤을 바라본다.
“천둥벌거숭이, 넌 남아.”
도윤이 잠시 멈칫한다.
‘의외의 기회일지도…….’
도윤이 주머니 위로 녹음기를 만져 보고는 짧게 대답한다.
“예.”
“둘은 이만 나가.”
이준석이 말을 마쳤음에도 윤만석은 제자리에 굳은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박봉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자, 도윤이 윤만석을 바라본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도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을 믿으라는 듯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도윤을 바라보던 윤만석이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출입문을 향해 힘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쿵.
작은 소음과 함께 출입문이 닫혔다.
이제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을 때, 이준석이 입을 열었다.
“이봐, 내 길게 얘기하지는 않을게.”
앞에 놓인 차로 목을 축인 이준석이 말을 잇는다.
“초임 검사 마음, 누구보다 잘 알아. 이제 검사도 되었겠다, 세상 나쁜 놈들 다 내 손으로 잡고 싶고, 밖에 나가면 접대도 받고, 평생 쳐다보지도 않던 골프도 쳐 보고. 사람들이 알아서 머리 조아려 주니, 완전히 내 세상 같고 그렇잖아?”
“…….”
“그걸 욕할 생각, 전혀 없어. 나도 그래 왔으니까. 엉덩이 문드러질 때까지 책상머리에 앉아 그 고생을 했는데, 그 정도 보상은 괜찮잖아?”
이준석이 도윤의 두 눈을 바라본다.
“그런데 말이야… 그런 건 밖에 나가서 세상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버러지들한테나 하라고. 지금 밖에 나가 봐. 쟤도 검사고, 얘도 검사야. 눈에 차이는 놈들은 다 검사야.”
“…….”
“그중에 지금 막 발령받은 너보다 낮은 검사가 있을까? 없어. 최소한 이 안은 니 세상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준석이 씹어 내뱉듯 으르렁거린다.
“좀 깝치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라, 건방진 새끼야. 너 같은 꼴통 새끼 때문에 그만 좀 피곤하고 싶다.”
“…….”
지금까지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스킬 사용에 성공하였습니다!’라는 홀로그램을 지워 낸 도윤이 말했다.
“말 잘 듣는 개새끼가 되겠다고 약속한다면, 대답해 주지.”
“…제 말에 대답해 주신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준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건방진 새끼… 그래, 들어나 보자. 얘기해 봐.”
이준석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척 하고 팔짱을 꼈다.
‘언제까지 그 여유로움이 계속되는지 지켜봐 주지.’
주먹을 꽈악 말아 쥔 채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입을 열었다.
“이준석 지검장님, 최근에 명성의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도윤의 질문에 이준석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짓는다.
짧은 시간이 지난 뒤, 이준석이 짧게 대답한다.
“있지.”
스킬 사용은 성공했다.
도윤이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누구를 만나셨습니까?”
“오춘화 회장님을 만났다.”
도윤이 눈을 반짝였다.
길게 시간 끌 것 없다.
도윤이 곧바로 승부수를 던졌다.
“윤만석 검사가 수사 중인 성명병원 사건을 박봉준 검사에게 넘기고자 하는 이유가, 그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성명병원 사건을 박봉준 검사가 처리하게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춘화 회장님의 오더가 있었다. 회사 차원에서도 그 후폭풍이 어마어마할 테니, 회장님 스스로 위기의식을 느끼셨겠지. 독불장군인 윤만석이보다야, 내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는 봉준이가 더 편하니까.”
이윽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했습니다. 제 질문에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
도윤이 멈칫한다.
‘설마……?’
“개새끼가 되겠냐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안 한 것 같은데?”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글세요… 지검장님의 개새끼라…….”
‘과연 누가 개새끼가 될지…….’라는 뒷말을 삼킨 도윤이 짧게 고개를 숙인다.
“집에 가서 천천히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쿵.
작은 소음을 내며 출입문이 닫힌다.
“건방진 놈…….”
이준석의 목소리가 홀로 남은 지검장실 내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