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눈
지검장실 밖으로 나온 도윤이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지금 돌아가는 판을 뒤집어엎기 위해서는, 놈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도윤이 휴대폰 자판을 조작하기를 잠시.
잠시 신호음이 울리더니, 곧바로 상대 쪽에서 반응이 온다.
“예, 여보세요?”
“배영준 기자님?”
“예. 제가 배영준입니다만?”
많이 젊은 목소리였지만, 특유의 카랑카랑한 톤은 여전했다.
옅게 미소 지은 도윤이 입을 열었다.
“내일 뵙기로 약속한 강도윤이라고 합니다.”
“…강도윤 씨?”
이내 손뼉을 짝 하고 친 배영준이 말한다.
“아! 서울 중앙지검의 그 검사님이시라는?”
“예.”
“얘기 들었습니다. 그런데… 높으신 분이 부산 촌 동네에 있는 저 같은 초임 기자는 대체 어떻게 알고……?”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배영준의 이런 점이 좋다.
일반인이라면 검사라는 직함만 내밀어도 대부분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배영준은 그런 게 전혀 없다.
“단골집이 동래 골목길에 있는, 할매네 포장마차 아니에요?”
“엇… 그걸 어떻게……!?”
“저도 거기 단골이었습니다. 원래 집이 부산이거든요.”
“아…….”
이제야 알았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리던 배영준이 순간 고개를 갸웃한다.
“제가 기자라는 건 어떻게 아셨죠?”
이번에도 도윤이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혼자 술 마시면서, 취하면 아무나 붙잡고 맨날 신세 한탄하시잖아요? 스트레스 때문에 이 나이에 아침에 텐트도 못 친다든가, 벌써부터 밤에 마누라가 무섭다든가…….”
배영준은 또래보다 결혼을 상당히 이른 나이에 했다.
스무 살에 사고를 치는 바람에, 벌써 애까지 딸린 유부남이었다.
자신이 습관처럼 내뱉는 말을 얘기하자, 배영준이 제 입을 탁탁 친다.
“…이놈의 입, 입, 입.”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미소를 입에 문 채 도윤이 말한다.
“부탁이 있습니다. 내일 직접 만나서 할 얘기였지만…….”
“부탁요?”
고개를 끄덕인 도윤이 말한다.
“기삿거리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어지는 도윤의 말에 배영준이 멈칫한다.
“물론, 어떤 식으로 기사를 써 달라는 부탁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기삿거리만 제공해 드릴 뿐, 기사를 내시는 건 기자님 입맛대로. 그거면 족합니다.”
“…….”
배영준이 잠시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잠시 시간이 지나, 배영준이 말한다.
“검사님이나 되신 분이 경력도 없는 초임 기자 따위에게 이렇게 직접 연락을 해서 주실 기사가 보통 건수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
“진흙탕 싸움에 이용할, 아무것도 모르는 글쟁이가 필요하신 거라면 번지수 잘못 짚으셨습니다.”
“…….”
“뭐, 굳이 그게 아니라도 데스크를 통과할 일도 없겠지만요.”
초임 기자들은 대개 데스크, 즉 편집부 지휘자의 오더에 따라 기사를 작성한다.
특히 논란이 될 만한 악의적인 기사들은 데스크의 허락 없이는 그대로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통화를 끊으려던 배영준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도윤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언제부터 기자 배영준이 그런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다 따졌습니까?”
“예?
배영준이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내 자식에게만은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눈을 물려주겠다. 외압에 굴복하지 않고, 내 소신껏 행동하여 스스로 자식에게 떳떳한 아버지가 되겠다.”
“……!”
배영준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기자님의 꿈 아니었습니까?”
“…….”
배영준이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자, 도윤이 옅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확인조차 하지 않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몸을 사리는 것.”
“…….”
“배 기자님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휴대전화를 쥔 배영준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배영준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일단은…….”
잠시 말끝을 흐리던 배영준이 말을 잇는다.
“들어나 봅시다.”
도윤의 미소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 * *
며칠이 훌쩍 지나고, 부산 동부지청 소회의실.
“…서류는 이게 전부다.”
책상 위에 쌓아 놓은 산더미 같은 서류 더미를 가리키며, 윤만석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한 박봉준이 수사관들에게 힐긋 시선을 돌리며, 턱짓한다.
그와 동시에 수사관 2명이 재빨리 책상 위의 서류 더미를 나르기 시작했다.
“나참, 그렇게 고집 피우지 말라고 노래를 불렀건만… 쯧.”
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2부장검사, 이한성이 낮게 혀를 찼다.
“일밖에 모르는 놈아, 답답하다, 답답해. 사건은 새파란 후배 놈한테 뺏겨, 위에는 찍힐 대로 찍혀. 속 터진다, 속 터져!”
제 가슴을 탕탕 두드린 이한성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박봉준을 힐긋 노려본다.
“…….”
분명히 자신의 시선을 느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 더미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박봉준을 보며 이한성이 중얼거린다.
“독한 놈…….”
잠시 후, 이한성이 ‘에잉!’하고 혀를 차더니, 소회의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이후에도 한참을 분주히 움직이던 수사관들에 의해 마침내 마지막 서류까지 옮겨졌을 때.
“다 옮겼습니다.”
마지막까지 뒷정리를 하고 있던 수사관 한 명이 박봉준에게 말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박봉준이 윤만석을 돌아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내 몸을 돌리는 박봉준을 보며 윤만석이 입을 열었다.
“…박봉준이.”
윤만석의 부름에 박봉준이 멈칫한다.
“그렇게까지 위로 올라가려는 이유가 뭐냐?”
“무슨 말씀이신지…….”
“이 마당에 시치미는 떼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얘기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박봉준이 몸을 돌려 윤만석의 두 눈을 바라본다.
그 상태로 잠시 서 있던 박봉준이 말한다.
“사람이 배가 고픈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뭐?”
“배가 고프면 밥이 먹고 싶고, 잠이 오면 그대로 뻗어 버리고 싶고, 매력적인 이성을 보면 같이 자고 싶죠.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욕구니까요.”
박봉준이 다시 출입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에게 출세란 그런 겁니다. 이유가 필요할까요?”
윤만석이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말씀 다하셨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박봉준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박봉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윤만석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빌어먹을…….’
단 한 번도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 후회해 본 적이 없건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뼈에 사무칠 정도로 후회가 되는 윤만석이었다.
이렇게 명성을 놓치면, 또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생길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눈물을 흘릴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할수록 심장이 죄어 와 미칠 것만 같았다.
바로 그 순간.
벌컥!
지금 막 출입문을 나서려던 박봉준이 움찔했다.
아까 나간 2부장검사, 이한성이 헐레벌떡 소회의실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만, 만석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더듬더듬 말을 잇는 이한성이 떨리는 손으로 소회의실 한쪽 구석에 있는 TV를 가리킨다.
“티… 티브이.”
눈치 빠른 수사관이 재빨리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눌렀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곧바로 TV 화면이 떠올랐고.
“……!”
이한성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항상 켜 놓는 뉴스 채널의 속보 자막.
거기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발견한 것이다.
“저, 저…….”
윤만석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자막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명성의 수사 개입 정황 포착! 오춘화 회장과 부산지검장의 녹음 파일 공개돼. 충격!>
* * *
검찰청 대회의실.
긴급히 마련된 참모회의에 십수 명의 사람이 자리하고 있음에도,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대회의실의 가장 상석.
얼굴 전체에 감도는 선홍색 빛에, 큼직큼직한 이목구비와 짙은 눈썹.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를 연상케 하는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검찰청 참모진 모두가 알고 있다.
눈앞의 인물이 부러질지언정 꺾이지는 않는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이며, 한번 화가 나면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콰앙!
순간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에 참모진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원목으로 된 책상을 강하게 내려친 상석의 남자가 옆을 돌아본다.
“차장.”
“예, 옙. 총장님.”
대검의 2인자라는 차장검사 이용완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한다.
“언젠가 자네가 한 번 얘기했지? 이준석이, 자네가 아끼는 능력 있는 대학 후배라고.”
“그, 그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이용완을 현 검찰총장, 김관우가 서늘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잠시 후, 김관우가 성난 목소리로 말한다.
“그 새끼, 지금 당장 직위해제 하고 지검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해.”
김관우의 말에 참모진들이 화들짝 놀란다.
“총, 총장님. 아직 사실관계도 확인 안 됐습니다. 설령 저게 사실이라도 일단 절차를…….”
“절차?”
이용완이 말끝을 흐리자 김관우가 반문했다.
“절차 좋지. 지금부터 이준석이와 명성의 관계, 그거 한번 제대로 파헤쳐 보자고. 전 검사가 다 달라붙어서 말이야. 뭐라도 나오면 옷부터 벗기고, 필요하면 구속도 시키고. 그림 좋지?”
이용완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이용완을 노려보며 김관우가 말을 잇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러고 싶지만, 더 급한 일이 있어서 참는 거야. 이준석이와 명성의 관계, 내가 모를 줄 아나?”
“…….”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참모진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언론에 그따위 소문이나 흘리고 다닌 순간부터, 지검장으로서 자격 박탈이야. 공무원 품위유지의무가 괜히 있는 줄 알아? 당장 직위 해제시켜.”
“알… 알겠습니다.”
“그리고!”
김관우가 이용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또박또박 힘주어 말한다.
“이준석이한테 이번 일 끝나는 대로 내가 직접 그 책임을 확실히 물을 거라고 전해.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니, 그따위 헛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예, 예.”
김관우가 이번에는 반대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형사 1과장.”
“예! 총장님.”
검사치고는 상당히 큰 체구를 가진 중년 사내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관우가 마치 모두 들으라는 듯이 말을 잇는다.
“얼마 전에 명성에서 내 쪽으로 연락이 왔었다. 어쭙잖은 정계 얘기 지껄이는 게 같잖았는데, 그 새끼도 뇌물공여죄로 말아 넣어.”
뇌물공여죄는 대상자에게 직접적으로 뇌물을 공여했을 때뿐만 아니라, 약속이나 의사를 표시한 것만으로도 처벌받을 수 있다.
몇몇 참모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공개 석상에서 총장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알아서 처신 잘 하라는 뜻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형사 1과장의 말에 김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만약 이준석이 외에 또 명성이랑 붙어먹은 놈이 있다면…….”
또다시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김관우를 보며 몇몇 사내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책임지고, 변호사 사무실 차릴 수 있게 도와주지. 무슨 말인 줄 알지?”
“예!”
참모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리고 차장은 이준석이 건 마무리되는 대로, 언론에 공개된 녹음 파일에 대해 한번 알아봐.”
“알아보라는 말씀은…….”
슬쩍 미간을 찌푸린 김관우가 버럭 고함친다.
“녹음 파일에서 거론된 인물들, 목소리 주인공. 모조리 다 내 눈앞에 데려오라고!”
“알, 알겠습니다!”
한차례 깊게 숨을 들이마신 김관우가 참모진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다들 먼저 나가 봐.”
드르륵, 드르륵.
기다렸다는 듯 전원 제자리에서 일어난 참모진이 빠르게 대회의실을 빠져나간다.
이윽고 커다란 회의실에 김관우 홀로 남게 되었을 때.
“하아~”
김관우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