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진흙탕 레이스 (1)
오길태의 제1심 판결이 끝이 난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세기의 재판이 끝이 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 무렵, 사람들은 또 하나의 신드롬에 열광을 했는데, 인기 대하드라마 야인시대가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리며 연일 역대급 시청률 갱신하게 된 것이다.
배우들의 대사들은 곧바로 유행어가 되었고, ‘긴또깡, 빠가야로’ 같은 일본어나 ‘날래날래 하라우’와 같은 북한 말투를 따라 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야인시대의 방영 시간에는 거리에 사람이 없다고 하여 ‘귀가 시계’라는 별명마저 붙었을 정도였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몽골 대통령에게 국빈 자격으로 초청까지 받았을 정도였으니, 그 인기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이 인기도 조금 더 지나면 반토막이 나겠지만…….’
한참 TV에 방영되고 있는 야인시대 재방송을 시청하던 도윤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최고 시청률 57퍼센트, 평균 30퍼센트 시청률을 기록하던 이 대박 작품은 2부 시작과 동시에 시청률이 반토막이 난다.
‘주인공이 중년 배우로 바뀌면서 시청률이 귀신같이 떨어지기 시작했지.’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늘어져라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어느새 드라마의 재방송도 끝이 나고, TV에서는 ‘내가 버린 생활하수, 내 아이가 마십니다.’라는 공익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일이 정식 발령…….’
성명병원 사건으로 특검에 참여하면서, 미루어졌던 정식 발령이 바로 내일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사실 발령식이 조금 더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 사이 갑작스레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본청 단위로 비상이 걸려, 조금 더 미루어진 참이다.
“처음 시작은 꼼짝없이 지게꾼이겠지?”
도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발령식이 끝나자마자 자신이 근무할 자리 또한 정해진다.
아마 경찰에서 넘어온 사건들을 마무리하여 법원에 넘기는 역할을 할 확률이 높았다.
“특별한 날이니까,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몸을 일으킨 도윤이 침대를 향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 * *
서울중앙지검 지검장실.
커다란 책상 위에는 지검장 정승만이라는 명패가 놓여 있었다.
그곳 최상석.
“혁수야.”
분명 얼굴은 많이 쳐줘야 마흔 안팎 정도 되어 보이는데, 머리가 새하얗게 새 그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예, 지검장님.”
옆 소파에 앉아 있던 사내가 재빨리 대답한다.
올해 꼭 마흔 살에 접어든 사내는 강혁수라는 이름을 가진, 서울중앙지검의 검사였다.
물론, 현 서울중앙지검장인 정승만의 라인이었다.
“3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 이제는 확실히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아.”
정승만의 말에 강혁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지검장이 말한 선택.
분명히 해야 한다.
하지만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정권이 바뀌게 되면, 여러 기관장들의 얼굴도 당연히 바뀐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검찰도 예외는 없다.
실패 따위는 있어서는 안 된다.
이번 선택에 따라,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된다.
“이제는 어떤 줄을 잡는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 뒤를 캐내어야 할지 고민할 때다. 니 생각을 얘기해 봐.”
상념에 빠져 있던 강혁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지금 불고 있는 바람. 분명 보통은 아닙니다. 부드럽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아닌, 거칠게 휘몰아치는 태풍이죠. 시장 선거에도 낙선한 그가 설마 당내 경선에서 이길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답답한지 잠시 넥타이를 살짝 내린 강혁수가 말을 잇는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지검장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바로 직전 대선의 결과를요.”
“음…….”
정승만이 침음을 삼켰다.
물론 정승만도 잘 알고 있다.
분명 큰 차이도 아닌, 불과 40만 표도 채 나지 않는 차이로, 결과가 판가름 났다.
상실감에 좌절했을 거라 생각했던 그가, 마음속에 칼을 갈고 다시 대선 레이스에 발을 들였다.
즉 강혁수의 선택은…….
“애초에 시장 선거 낙선자와 대선 낙선자의 싸움입니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지만, 저는 그 어르신이 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
“아마 이번 대선에서는 반드시 야당의 어르신이 이길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쪽 줄을 잡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강혁수가 말을 마치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정승만이 말한다.
“…문식이는 지금 어디 있지?”
“아마 지금쯤 이곳저곳 발품 팔고 다니며, 정보를 끌어모으고 있을 겁니다.”
“문식이 생각도 혁수 너랑 같아?”
“…예. 아마 정 부장 생각도 저랑 같을 겁니다.”
“끙…….”
이윽고 정승만이 앓는 소리를 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런 고민 따윈 전혀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더 골치 아파진 것 같아. 차라리 당내 경선이 예상대로 흘러서, 불사조 그 양반이 올라왔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야.”
길게 한숨을 내쉰 정승만이 강혁수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일단 다른 후보자들은 제외하고서라도, 가능성이 있는 세 후보자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모아 둬. 선택과 동시에 물밑 작업 시작해야 하니까. 아마 많이 바쁠 거야.”
“알겠습니다.”
“결정은 이번 주중에 회의에서 마무리하자고. 문식이 의사도 확실히 들어 보고, 혁수 너도 마지막까지 고민해 봐.”
“예.
“나가 봐.”
말을 마친 정승만이 손을 휘휘 내젓자 강혁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참!”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정승만이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강혁수의 물음에 정승만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내일이 신임 정식 발령식이라고 했지?”
강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내일 오전 중에 있습니다.”
“누구 데려다 쓸지는 고민 좀 해 봤나?”
“예. 김영재라는 아이를 쓰면 될 것 같습니다. 지검장님 대학 직속 후배라 명분도 좋고, 연수원 성적이 차석이었으니 어느 정도 머리도 있는 아이일 겁니다. 무엇보다 형사 4부장의 조카라는 점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형사 4부장? 석두?”
“예.”
“음…….”
잠시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져 있던 정승만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석두도 나쁘진 않지만, 너무 한쪽밖에 생각을 못 한단 말이지. 이쪽으로 너무 트여 있지 못해. 지금 상황에서 석두 조카라는 점은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단 말이지. 그보다는…….”
잠시 말끝을 흐리던 정승만이 말을 잇는다.
“나머지 한 녀석이 신경 쓰인단 말이야.”
“강도윤이 말씀이십니까?”
정승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듣기로, 이번에 성명 사건. 활약이 대단했다고 하던데? 저 대단하신 총장님이 직접 명성을 칠 칼로 사용했을 정도니까.”
“예. 확실히 신임임에도 눈여겨볼 만하긴 합니다. 고졸 출신임에도 엘리트들만 모인 연수원에서 수석을 한 것만 봐도 난놈은 난놈이지요.”
“호오, 고졸인데 수석이라?”
정승만이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번 카드로 사용하기에는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지 않다? 왜지?”
“지금 저희는 조커보다는 말 잘 듣는 졸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강도윤이라는 카드는 그 메리트만큼이나 리스크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리스크가 큰 만큼 메리트도 크겠지.”
“…….”
강혁수가 입을 다물자 정승만이 옅게 미소 지었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던 정승만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일단 내일 발령식 끝나는 대로 두 사람 다 내 사무실로 데려와 봐.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하지.”
“알겠습니다.”
“나가 봐.”
정승만이 손을 휘휘 내젓자 짧게 고개를 숙인 강혁수가 이내 출입문을 나선다.
쿵.
작은 소음과 함께 출입문이 닫혔다.
“강도윤이라…….”
홀로 남은 정승만이 옅게 미소 지은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영재야.”
“예, 부장님.”
“어허, 그렇게 안 불러도 된다니까.”
서울중앙지검 형사 제4부장검사, 김석두의 말에 김영재가 자못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안 좋게 생각할까 봐요.”
“뭐? 허허헛. 우리 영재, 속도 참 깊다. 괜찮다, 니가 불편하다면 호칭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우리 둘뿐이잖니?”
너털웃음을 터뜨린 김석두가 김영재를 다시 부른다.
“영재야.”
“예, 삼촌.”
김영재의 대답에 흡족한 듯 미소 지은 김석두가 계속 말한다.
“몇 주 동안 이 삼촌 밑에서 이것저것 배우느라 고생 많았다.”
“예? 그 말씀은…….”
“내일이 발령식이라며? 그거 끝나는 대로 아마 정식으로 니 자리도 정해질 거다.”
“제 자리는 삼촌 옆이 아니었나요?”
김석두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좋지만, 영재 너는 더 높은 곳을 바라봐야 하지 않겠니?”
“더 높은 곳이라면…….”
“지검장님 옆자리 말이다.”
“……!”
김영재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은 삼촌이 무척 높아 보이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너도 알게 될 게다. 아마 영재 너라면 금방 이 삼촌보다 높은 곳까지 올라갈 테지.”
“가당치도 않습니다, 삼촌. 삼촌보다 높은 곳이라니요?”
김석두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니가 어서 올라가서 이 삼촌도 좀 끌어주고 하면 될 것 아니냐? 자고로 사내라면 야망이 있어야 한다.”
“…….”
김영재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김영재를 보며 김석두가 말을 잇는다.
“지금 우리 지검장님이 차기 검찰총장 자리의 유력한 후보자인 것은 알고 있지?”
“예. 대단하신 분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아마 지검장님이 어떤 줄을 잡느냐에 따라, 총장이 될지, 시골 한구석으로 좌천될지 결정될 것이다.”
“줄이라면…….”
“대선.”
짧게 대답한 김석두가 계속 말한다.
“대충 짐작은 간다만… 아마 지검장님과 함께 일하게 되면, 앞에서 보이는 우리 검찰 본연의 업무가 아닌, 같은 검사들도 잘 알지 못하는 일을 많이 하게 될 거다. 뒤가 구린 일이 대부분일 테지.”
“…….”
“아마 그 밑에서 일하다 보면 수십 번, 아니 수백, 수천 번도 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만 잘 버티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절대 쉽게 끊어지지 않을 단단한 줄이 생긴다.”
“…….”
“만약 니가 원한다면, 이 삼촌이 힘껏 밀어주마. 나도 마음 같아서는 너를 내 곁에 두고 싶지만… 이왕이면 니 미래를 위해 다른 선택을 해 줬으면 좋겠구나.”
“…….”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김영재를 보며 김석두가 묻는다.
“고민되면 조금 생각해 보고 오늘 중으로…….”
“하겠습니다.”
김영재가 결연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겠다?”
김영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라면 야망이 있어야 한다. 지극히 맞는 말씀입니다. 저는 나중에 검찰총장은 물론, 그보다 더 높은 곳에도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
“지검장님 옆자리에, 꼭 앉고 싶습니다.”
이윽고 김영재가 말을 마치자 김석두가 씨익 미소 지었다.
“나만 믿거라.”
“…….”
“내가 널 그렇게 만들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