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전부 내 거야!
한참 종이 뭉치들을 들여다보고 있던 오춘화 회장이 책상 위에 설치된 내부 인터폰을 손에 쥐었다.
“건우, 지금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확인한 오춘화 회장이, 인터폰을 내려놓는다.
잠시 후, 곧바로 오춘화 회장의 오른팔, 박건우가 개인 집무실로 들어온다.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회장님.”
한차례 깊게 허리를 숙인 박건우가 대답했다.
“보여 줄 게 있어서 불렀다.”
오춘화 회장이 손에 쥔 종이 뭉치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한번 보라는 듯 눈짓한다.
빠르게 다가온 박건우가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박건우가 눈을 크게 떴다.
겉표지 최상단에는 ‘명성건설 투자운용 및 전략’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박건우가 빠르게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박건우의 두 눈은 더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비밀리에 매입한 일산 일대 10만 평이야. 물론, 아직도 매입 중이지. 주변 일대까지 다 합치면 매입한 땅보다 몇 배는 될 거야.”
“하지만 일산은…….”
박건우가 잠시 말끝을 흐렸다.
일산은 이미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다.
알 만한 사람들, 특히 투기꾼들 대부분이 그곳에 땅을 매입해 놓은 상황이다.
그 때문에 이미 땅값이 오를 대로 올랐지만,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박건우가 종이 뭉치 위에 표시된 지도 중, 빨갛게 표시된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이곳은 주민들에 대한 토지 보상 문제로 하루에도 몇 번씩 집회·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곳입니다. 주변 소상인들도 절대 땅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 곳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왜 굳이 이곳을…….”
박건우가 말을 잇고 있을 때, 오춘화 회장이 입을 열었다.
“건우야.”
“예, 회장님.”
“내가 왜 너를 신임하는 줄 알고 있느냐?”
“…….”
자신의 물음에 입을 다무는 박건우를 보며 오춘화 회장이 말을 잇는다.
“30년, 아니. 니 아비 시절까지 합치면 벌써 너희 집안이 나한테 충성한 지가 50년이 넘는구나. 내가 그 때문에 너를 이렇게 신임한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박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는 오춘화 회장은 고작 그따위 이유로 누군가를 신임할 만한 인물이 결코 아니다.
기본적으로 오춘화 회장은 다른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가진 자본, 그 엄청난 돈의 힘으로 권력을 휘두르고, 사람들을 부릴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부리지 못할 사람은 몇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오춘화 회장이 누군가를 믿고, 일을 맡긴다?
자신의 아들도 믿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도 더 놀랍지만, 만약 오춘화 회장이 그런 일을 맡긴다면, 둘 중 하나다.
최소 수백억은 오고 가는 초대형 규모의 일이거나 혹은, 외부에 유출되었을 시 그룹 전체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만한 일.
앞선 불법 선거자금 조달은 둘 모두에 해당한다.
5년에 한 번 있는 그 대선이라는 괴물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이라도 붓는 것처럼 끊임없이 돈을 집어삼켰으니까.
뿐만 아니라 만약 명성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조달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박건우가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정도 규모의 일을 맡기면서, 저 철혈의 거인인 오춘화 회장이, 단지 충성한 햇수만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박건우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저 북녘의 뽀글이 위원장이 오늘 당장 정권을 포기한다는 말이 더 신빙성 있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박건우를 보며, 오춘화 회장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신임하고, 일을 맡기는 이유는 하나야.”
오춘화 회장이 박건우의 두 눈을 바라본다.
“지 주제를 가장 잘 아니까.”
“……!”
박건우가 눈을 크게 떴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거, 상당히 힘들어. 당장 내 자식들만 봐도 알 수 있지.”
“…….”
“길태 놈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 하고, 제 자리 하나 믿고 설치고 다니다가 결국 감옥신세에, 오창원이 는 벌써 명성이 제 회사라도 되는 것처럼 회장 노릇을 하고 있지.”
“…….”
“하나를 가르치면 둘은 아는 그놈은 특히나 더 그래.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치고, 나중에 잘되는 놈 하나도 못 봤어. 제일 똑똑한 놈이 그럴진대, 다른 자식 놈들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물로 목을 축인 오춘화 회장이 말을 잇는다.
“건우, 너는 아니야.”
“…….”
“너는 내 핏줄이 아니라는 점만 제외하면, 내 자식 놈들보다 떨어지는 게 없어.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놈이, 제 주제도 잘 알지. 욕심이란 걸 부리지 않아. 그러면서 어떤 상황에서 자기가 무얼 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말을 마친 오춘화 회장이 박건우를 빤히 바라본다.
“이러니, 내가 어찌 너를 신임하지 않을 수 있겠나?”
“…과찬이십니다.”
“다시 묻지. 이 상황에서 니 역할이 뭐지?”
박건우는 이제 확실히 깨달았다.
오춘화 회장은 자신에게 의문을 표하라고 이 종이 뭉치를 던져 준 것이 아니다.
계획서를 들여다보고, 끊임없이 생각하라.
스스로 분석하고, 판단을 내려라.
그렇게 해서,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니가 직접 얘기하라.
상념에 빠져 있던 박건우가 이윽고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아마 회장님은 어르신이 이번 대선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가정하에, 이 계획을 세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후에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내 원하는 대답이 흘러나오자 오춘화 회장이 씨익 미소 지었다.
“얘기해 봐.”
“…콩고물을 노리고 모여든 투기꾼들은 생각보다 쉽게 떨쳐낼 수 있을 겁니다. 작은 찌라시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족속들인 만큼, 신빙성이 높은 미끼 하나만 던져지면, 너도, 나도 서로 땅을 팔기 위해 아우성칠 겁니다.”
“…….”
“강물에 돌멩이를 던지면 파장이 일어나고, 그 파장이 가장 커졌을 때. 저희는 그 틈을 노리면 됩니다.”
“헐값으로 떨어진 투기꾼들의 보유분을 우리가 모조리 쓸어 담는다?”
오춘화 회장의 말에 박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헐값까지 떨어지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값은 떨어뜨릴 수 있는 만큼만. 갑작스레 땅값이 폭락해 버리면,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쪽으로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뭐, 버러지들 몇몇이 의심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겠지만… 계속해 봐.”
잠시 머뭇거리던 박건우가 이내 굳은 눈빛으로 말한다.
“그리고… 주변 주민들이나 소상인들은, 오성춘 이사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누구? 오성춘이?”
오춘화 회장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자, 박건우가 빠르게 말을 잇는다.
“회장님, 힘없는 서민들은, 때로는 법보다 눈앞의 주먹을 더 무서워합니다.”
“오성춘이 밑에 있는 깡패 새끼들을 이용하자는 말이군.”
오춘화 회장이 굳은 얼굴로 말하자, 박건우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혹시 걱정되신다면, 굳이 그쪽을 이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따로 한번 알아보겠…….”
“아니, 아니야.”
오춘화 회장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기회를 한번 줘 보지.”
“…….”
“이번 일로, 우리도 큰 피해를 입었어. 놈들 상황은 직접 보지 않아도 눈에 훤해. 그 쥐새끼들, 아마 벼랑 끝까지 몰렸겠지.”
“…….”
“한낱 쥐새끼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어. 만약 그런 놈들의 머리 위로 동아줄이 내려온다면…….”
잠시 말끝을 흐리던 오춘화 회장이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그 줄을 잡기 위해 미친 듯이 발악을 하겠지. 그게 설령 썩은 동아줄일지라도.”
말을 마친 오춘화 회장이 박건우를 바라본다.
“대선 전에 해 놓아야 될 건 뭐지?”
“땅은 적정선에서 매입할 수 있는 만큼만 매입해 놓고, 주변 분위기만 잘 조성해 놓으면 될 것 같습니다. 더불어…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계획을 위해, 선거자금 지원 건은 아끼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지. 그 건은 건우 너한테 맡기지. 탐욕스러운 아가리에, 밀어 넣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밀어 넣어 줘. 어차피…….”
오춘화 회장의 비릿한 미소가 한층 짙어진다.
“수백 배로 뻥튀기해서 돌려받을 돈이니까. 뭐, 그 돼지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은 아니겠지만, 우리야 이익만 최대한 창출해 내면 되니까. 안 그래?”
“옳으신 말씀입니다.”
“고생 좀 해 줘.”
“예, 회장님.”
한차례 깊게 허리를 숙인 박건우가 몸을 돌렸다.
쿵!
출입문이 닫히는 작은 소음과 함께, 이제는 홀로 남게 된 오춘화 회장이 힐끗 종이 뭉치의 한 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계적 규모의 컨벤션 센터를 낀 신도시라…….”
오춘화 회장의 낮은 웃음소리가 개인 서재 내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깊은 밤, 서울 외곽이 위치한 폐공장 앞.
일단의 무리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빨리빨리 실어.”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사내들을 재촉했다.
“아, 니미. 형님, 이걸 왜 저희가 옮긴대요? 운전만 하라더니 왜 짐 나르기까지 시킨대요.”
폐공장에서 네모난 물건을 한 아름이나 부둥켜안고 나오던 사내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자꾸 투덜거릴 거야!?”
우두머리 남자가 빼액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짜증 나서 그라요, 짜증 나서. 씨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옆에 비서 끼고 고상하게 돈이나 세고 있었는데, 이 짬밥에 택배 배달이라니!”
“누가 투덜이 아니랄까 봐, 가씨나 가슴 주물럭거리면서 돈 냄새나 맡고 있었으면서, 지랄은…….”
지금 막 탑차 적재함에서 빠져나오며 중얼거리는 사내의 말에, 불만스러운 표정의 사내가 발끈한다.
“뭐, 이 새꺄!?”
“그만! 시간 없으니까 빨리 옮겨 실어! 작업 끝나는 대로 바로 출발해야 해!”
우두머리 사내가 또 한 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휴, 내 팔자야.”
불만스러운 표정의 사내가 입을 삐죽 내밀며, 적재함 내부를 한차례 힐끗 바라본다.
“…형님, 근데 저게 다 얼마래요?”
사내가 손에 쥐고 있던 손전등을 적재함 내부로 비추며 물었다.
그 순간, 탑차 적재함 내부가 환히 드러났다.
말 그대로 온통 초록빛.
세종대왕이 그려진 초록색 지폐가 탑차 적재함 내부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사내가 보기에, 지금 탑차에 실린 돈만 최소 100억 원은 훌쩍 넘어 보였다.
그 어마어마한 위용에, 불만스러운 표정의 사내가 한차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형님, 그냥 이 돈 우리가 갖고 째면…….”
사내가 몸을 돌리며 말하자, 손전등 빛이 우두머리 사내를 잠시 비춘다.
그리고 드러나는 얼굴은…….
“야이 새끼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일 안 해!?”
우두머리 사내, 장춘만이 버럭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따, 형님. 귀청 떨어지겠네. 농담이요, 농담. 설마 내가 배탈 날 거 뻔히 아는 돈에 욕심이라도 낼까 봐…….”
한차례 구시렁댄 사내가 이내 폐공장 안으로 사라지자, 장춘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사이에 몇 년은 늙은 기분이다.
물론, 장춘만도 사내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망치파는 1두목, 3부두목 체제이다.
수백 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부두목급 인사 3명을 고작 물건을 나르는 일에 동원시켰으니, 불만이 나올 만도 하다.
하지만, 이번 일에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보안 유지가 생명인 만큼,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 필요했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속으로 중얼거린 장춘만이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모두 되돌릴 것이다.
아니, 이번 일을 발판으로 자신의 망치파는 한차례 더 도약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조직을 건드린 놈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히 응징할 것이다.
입술을 깨문 장춘만이 소리친다.
“자, 빨리……!”
“동작 그만!”
순간 눈앞을 덮치는 밝은 빛에 장춘만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뭐야!?”
한참 돈을 나르고 있던 사내가 순간 귀청을 때리는 낯선 목소리에 폐공장 안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누구냐!?”
사내가 고함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손전등을 비췄다.
폐공장으로 들어서는 길목.
일단의 사내들이 그 길목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젊은, 아니 새파랗게 어린놈이 두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온다.
손전등을 쥐고 있던 사내가, 빠르게 그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밝은 빛과 함께 이내 어린놈의 얼굴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짙은 눈썹에 오똑한 콧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유독 눈에 띄는 사내, 도윤이 큰 소리로 외친다.
“손에 든 그 돈, 다 내려놔!”
“뭐, 뭐라고?”
손전등을 쥔 사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도윤이 씨익 미소 지었다.
“그거, 전부… 내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