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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63화 (63/174)

63화 망치파 해체, 코리안 매직 박스

빠르게 다가온 박판섭이 불곰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봐, 불곰! 괜찮아?”

“…끅. 참… 을 만해. 칼빵은… 오… 랜만이라.”

불곰이 말을 내뱉으며 몸을 뒤틀 때마다, 핏물이 꿀렁거리며 흘러나왔다.

“말하지 마.”

박판섭이 심각한 표정으로 불곰의 상처를 살핀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은지, 손가락 틈 사이로 끊임없이 핏물이 꿀렁거리며 흘러나왔다.

“젠장.”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박판섭이 주머니에 욱여넣어 둔 넥타이를 꺼내 들었다.

자상(刺傷)이 생겼을 때는 상처 부위를 압박하여신속히 지혈해야 한다.

출혈이 시작되고, 몸속 혈액의 10퍼센트 이상이 빠져나가게 되면 전신의 조직이 저산소 상태가 되어 쇼크사까지 이어질 수 있다.

칼침을 맞고 적지 않은 출혈이 있는 상태에서 마구 날뛰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출혈이 지속되면, 점차 의식이 흐릿해지고, 종국에는 실신 상태에 이르게 된다.

“됐다.”

빠르게 응급처치를 마친 박판섭이 뒤쪽을 향해 큰 소리로 고함친다.

“이쪽으로 와 봐! 빨리!”

박판섭의 외침에 대기하고 있던 두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차 가지고 지금 바로 가까운 병원으로 이 친구 데려가!”

“예, 형님!”

두 사내가 불곰의 커다란 덩치를 양쪽에서 들쳐 업으려고 하자, 불곰이 손을 내저었다.

“…불곰?”

작게 중얼거리는 박판섭을 일별한 불곰이 옆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형… 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멈칫한 장춘만이 멍하니 불곰을 바라본다.

“불곰…….”

“제가 한 말… 잊지 마십쇼.”

“……!”

“외부의 세력에 의존해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

“저는… 언제나 형님을… 지지… 쿨럭, 죄송…….”

조금씩 목소리가 작아지던 불곰이 이내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빨리 옮겨!”

박판섭의 재촉에 불곰을 부축하고 있던 두 사내가 빠르게 움직였다.

사내들에게 부축되어, 차량으로 옮겨지는 불곰의 뒷모습을 장춘만이 멍하니 바라봤다.

“젠장…….”

장춘만이 낮게 뇌까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같은 시각.

박판섭이 불곰의 응급처치를 하고 있을 때, 도윤은 긴박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뒈져라!”

나이프를 휘휘 돌리던 칼치가 짧게 고함치며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도윤이 침착하게 바라본다.

야심한 밤, 예리한 칼날이 번뜩이자 적당한 긴장감이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당겼다.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감…….’

이런 경험은 충분히 많다.

차가운 날붙이에 몸을 관통당해, 이미 죽어 본 경험도 있다.

지나친 긴장감은 몸의 움직임을 방해할 뿐이다.

쉬익!

귀 바로 옆으로 나이프가 지나가면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귀청을 때렸다.

어느새 다가온 칼치가 내지른 나이프를 고개를 젖혀 피해 낸 도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눈알은 제대로 달고 있는데?”

한차례 썩은 미소를 지은 칼치가 화려한 손동작으로 나이프를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쉬익!

칼치의 나이프가 이번에는 도윤의 우측 옆구리를 향해 찔러 들어간다.

그 순간 도윤이 눈을 반짝인다.

‘지금!’

살짝 몸을 틀어, 나이프를 옆구리 사이로 흘린 도윤이, 겨드랑이를 이용하여 칼치의 왼팔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

칼치가 눈을 크게 떴다.

우드득!

도윤이 손목 관절을 붙잡아 그대로 비틀자, 마치 뼈가 부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챙강!

비명 소리와 함께 칼치가 쥐고 있던 잭나이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씨발!”

칼치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도윤과 확 거리를 벌렸다.

이게 무슨 추태인가!

나이가 들고 부두목 자리에 오르며, 실전에서 은퇴한 지는 꽤 되었지만, 자신은 명색이 망치파의 부두목이 아닌가?

그에 비해 눈앞의 놈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애송이다.

‘방심? 아니야, 방심했다고 하기엔 놈의 움직임이…….’

뿌득 이를 간 칼치가 마치 스트레칭을 하듯, 잠시 앉았다 일어났다.

“죽인다!”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칼치가 도윤의 주변을 천천히 맴돌기 시작했다.

마치 빈틈을 찾는 듯한 그 행동에 도윤도 살짝 자세를 낮췄다.

어느새 도윤의 3미터 앞까지 접근한 칼치가 갑작스레 도윤의 얼굴을 향해 손바닥을 확 하고 펼쳤다.

“개새끼!”

“……!”

순간 눈 안으로 파고드는 모래 알갱이들을 느끼며, 도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퍼억!

둔탁한 충격과 함께 칼치의 발차기에 그대로 복부를 가격당한 도윤이 뒤로 한 바퀴 몸을 굴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몸의 충격을 최소화하는지, 도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몸의 감각에 의존한 채, 깔끔한 낙법(落法)을 펼친 도윤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휘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어렴풋이 보이는 시야 사이로 칼치가 오른쪽 주먹을 날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오른팔이 앞으로 나오면, 오른발도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도윤이 그대로 몸을 좌측으로 반바퀴 회전시켰다.

“……!”

자신이 내지른 주먹이 도윤의 귀 옆을 허무하게 스치고 지나가자, 칼치가 순간 눈을 크게 뜬다.

덥석!

내밀어진 오른팔을 왼손으로 단단히 움켜쥔다.

오른팔은 상대의 멱살을 틀어쥐어, 몸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긴다.

그와 동시에 오른 다리를 상대 허벅다리 바깥쪽을 향해 강하게 차올린다.

“으랴아아아!”

기합성을 내지른 도윤이 허리 위쪽으로 붕 하고 떠오른 칼치의 몸뚱이를 그대로 흙바닥에 메다꽂았다.

쿠웅!

“…컥!”

둔중한 충격음과 함께 깨끗한 허리후리기에 당한 칼치가 바닥에 떨어지며 거친 신음성을 토해 냈다.

단단한 흙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져 내려서인지, 잠시 몸을 떨던 칼치의 몸이 추욱 하고 늘어졌다.

“이 개새끼가……!”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망치파의 남은 부두목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한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만!”

순간 터져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나머지 부두목도, 마주 걸음을 옮기던 20세기파 식구들도 걸음을 멈췄다.

“그만해라, 춘배야.”

“형님……!”

춘배라 불린 망치파의 부두목이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부로 망치파는 해체한다.”

“……!”

장춘만의 충격적인 선언에 모두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형님!”

“그만해. 어차피 눈앞에 있는 이 돈들, 모두 빼앗기면 명성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무어라 항변하려던 춘배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놈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돈을 빼앗기지 않으면 된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현 상황을 고려하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만약 이 돈을 빼앗기면, 여기 있는 수뇌부뿐만 아니라, 자신들만 바라보고 있는 수백 명의 식구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

명성과 20세기파.

그들에게 안팎에서 공격을 당하게 될 테니까.

우두머리 입장에서, 장춘만의 선택은 최선이다.

자신이 속한 망치파는… 끝났다.

“젠장…….”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거리는 춘배를 일별한 장춘만이 시선을 돌린다.

“박판섭.”

“…예, 형님.”

박판섭이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사업장은 모두 넘기겠다. 단, 밑에 있는 우리 애들은 니가 책임지고 보호해 다오. 이미 일부 애들이 그쪽으로 붙은 걸로 알고 있다.”

장춘만의 말에 박판섭이 쓰게 웃었다.

장춘만은 잘못 알고 있다.

일부 충신을 자처하는 지지 세력과 접선하지 못한 인원들을 제외하면, 전체 인원의 절반 가까이 20세기파에 합류했다.

구태여 그 말까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박판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참에 은퇴하고 제대로 한번 살아 보려는 놈들에게도, 퇴직금 두둑히 챙겨 주겠습니다.”

“…고맙다.”

잠시 머뭇거리던 박판섭이 묻는다.

“형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쪽으로 넘어오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만약, 장춘만을 비롯한 수뇌부를 받아들이면, 조직 내부에서 또다시 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명성의 타깃이 이곳, 20세기파로 변경될 것이다.

명성의 입장에서는 20세기파가 아닌, 포스트 망치파 정도로 보여질 테니까.

조직원들을 받는 것과 수뇌부를 받는 것은 상황 자체가 다른 문제다.

장춘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 양심 없이 늙다리 받아달라는 소린 하지 않을 테니까.”

순간 당황한 박판섭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형님. 그게 아니라…….”

“중국으로 갈까 한다.”

당장은 아니지만, 조직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면 모시겠다는 말을 이어 가려던 박판섭이 눈을 크게 뜬다.

“중국, 말씀이십니까?”

“나도, 이놈들도 이미 늙었지만, 죽기에는 너무 젊지 않나?”

장춘만이 쓰러져 있는 칼치와 춘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

무언가 말하려는 듯 머뭇거리는 박판섭을 보며 장춘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박판섭이, 너는 너무 착해. 이쪽 바닥이랑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예? 아닙니다.”

박판섭을 일별한 장춘만이 이번에는 후드를 눌러쓰고 있는 도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위압감.

처음 본 순간부터 장춘만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눈앞에 있는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이곳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라는 것을.

“불곰을… 잘 부탁하오.”

장춘만의 말에 도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장춘만이 이윽고 몸을 돌렸다.

“가자.”

“…예, 형님.”

쓰러진 칼치를 빠르게 들쳐 업은 춘배가 장춘만을 뒤따랐다.

저만치 멀어져 가는 장춘만 일행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박판섭이 입을 열었다.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네. 그 대단한 망치파를 완전히 흡수하는 날이 올 줄이야.”

“너무 김칫국 마시는 것 아닌가?”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뭐, 김칫국이라도 좋아. 그보다…….”

말을 잇던 박판섭이 탑차를 눈짓한다.

“이건 어떻게 할 거야?”

“먹어야지.”

도윤의 대답에 박판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이걸 먹는다고?”

“…….”

“이거… 먹으면 배탈 나는 수준이 아니라, 배가 터져 죽을 수도 있겠는데?”

적재함에 쌓여 있는 어마어마한 지폐 다발을 보며 박판섭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차피, 놈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차떼기를 통한 불법 선거자금. 그걸 털리고 과연 저쪽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아……!”

박판섭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제 놈들이 한 구린 일을 스스로 떠벌리는 셈이겠네.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겠군. 고작 푼돈 몇 푼 아끼자고 그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럼…….”

도윤이 씨익 미소 지었다.

“잘 먹겠습니다.”

* * *

사무실 한쪽에 쌓아 놓은 사과 상자들을 보며, 오성춘이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이게 얼마야?”

이제는 서울고검장 성호동의 라인을 탄 장문식이 물었다.

“2킬로그램짜리 사과 상자 1박스에 만 원권을 가득 채우면, 정확히 2억 5천만 원 정도가 들어갑니다. 그게 5박스니까…….”

“10억은 훌쩍 넘겠군.”

YS 정부 때 금융실명제가 시행되기 전에는, 차명계좌에 현금을 입금하여 그저 통장과 도장을 건네주면 간편하게 자금 전달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 새롭게 등장한 방법이 매직박스라고도 불리는 이 사과 상자였다.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직접 현금을 전달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떼기라는 요즘 트렌드도 좋지만, 가끔은 고전적인 방식도 좋잖아요?”

오성춘의 비릿한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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