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음모와 모략
일반인들에게 사과 박스가 뇌물 전달의 아이콘으로 처음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은, 1996년도였다.
당시 검찰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던 도중, S양회 경리 창고에서 1만 원권 지폐가 가득 든 사과 상자들이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1997년 한보그룹 사태 때는 회장이 부도를 막기 위해 정치인들에게 현금이 든 사과 박스들을 전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사과 박스는 곧 뇌물이라는 인식이 마치 공식처럼 되어 버렸다.
한 박스에 2억 5천만 원짜리 금싸라기 사과 박스를, 무려 5박스나 트렁크에 가득 실은 장문식이 뒤를 돌아본다.
“10억이 적은 돈은 아닐 텐데… 정말 괜찮나? 논란거리를 만들려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오성춘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해야죠. 까보니까 진짜 사과만 들어 있으면, 얼마나 김빠지겠어요?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기자들에게 찬물을 끼얹을 순 없죠.”
“…상자에 대한 수사도 분명히 진행될 거다. 뇌물은 받은 놈도 나쁘지만, 준 놈도 똑같이 나쁜 놈이라는 거, 너도 잘 알 텐데?”
순간 오성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그렇죠! 다 나쁜 놈이지! 뇌물수수죄가 있듯이, 뇌물공여죄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누가 뇌물을 줬나요?”
“뭐?”
“저는 이 사과를 받을 놈이 누군지는 알겠는데, 준 놈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네요.”
오성춘의 너스레에 장문식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그냥 명절 선물용 사과잖아요. 아니에요?”
“…….”
장문식이 입을 다물었다.
피식 미소 지은 오성춘이 말한다.
“배달, 확실히 부탁드립니다. 배송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전적으로 기사님 책임이잖아요. 뭐,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겠지만…….”
오성춘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오성춘의 말에 장문식이 입술을 꽈득 깨물었다.
굳이 저렇게 말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번 작업에 실수 따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문제가 생기면 성호동은 미련 없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것도.
물론 가만히 앉아 독박 쓸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싸늘하게 대답한 장문식이 홱 몸을 돌려, 차량에 올라탔다.
“지검장님 식구들 거 3박스, 연출용 2박스. 잊지 마십쇼.”
“너 말이야.”
장문식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자 오성춘이 고개를 갸웃한다.
“…예?”
“너무 건방 떨지 마라. 명성이라는 이름 하나만 믿고 설쳐 대면, 후회하게 될 거다.”
“…….”
장문식의 말에 멈칫한 오성춘이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명심하겠습니다, 선배님.”
깊이 허리를 숙이는 오성춘을 잠시 노려보던 장문식이 그대로 가속페달을 확 밟았다.
부와아아아앙!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장문식의 차량이 빠르게 사라져 갔다.
차량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참이나 허리를 숙이고 있던 오성춘이 그때서야 몸을 바로 했다.
“주제도 모르는 등신이…….”
낮은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오성춘이 힐끗 시계를 확인한다.
“얼마 남지 않았구나, 강도윤. 큭큭큭.”
오성춘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처음 성호동의 계획대로였다면, 사과 상자에 현금까지 채워 넣는 계획은 포함되지 않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차량 주인조차 알지 못하는 사과 상자와 그 안에 든 거액의 현금 다발.
검찰 입장에서는 당연히 현금 다발을 압수하여 수사를 진행할 테고, 성호동의 입장에서 국고에 환수될 걸 뻔히 아는 돈을 구태여 뿌려 댈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성호동의 목적은 정승만을 후보자 자리에서 사퇴시켜 검찰총장이 되는 것이지, 정승만의 옷을 벗기려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강물에 파장을 일으킬 돌멩이 하나면 충분했다.
물론 그 돌멩이는 사과 상자다.
민감한 시기에 검찰총장 후보자의 차량에서 빈 사과 상자가 발견된다?
같은 사실로도 기자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에 따라, 내용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빈 사과 상자가 발견된 사실만으로도 정승만에게 타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
그런 성호동의 계획이 마지막 판에 변경되었다.
“돈도 내가 구해다 주겠다, 예상되는 파장도 빈 상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겠다, 성호동이 입장에서는 더더욱 땡큐거든.”
야릇한 미소를 지은 오성춘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나한테도 땡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오성춘의 미소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 * *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던 도윤이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휴대폰 진동에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발신자를 확인한 도윤이 입을 열었다.
“응, 호식아.”
“야! 너, 진짜 나한테 월급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무슨 니 부하인 줄 아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호식의 고함 소리에 도윤이 잠시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소고기 산다니까…….”
“그놈의 소고기는 썅! 니가 벌구냐? 어? 맨날 말만 산다, 산다 하면서 한 번도 사지를 않냐!”
“…벌구?”
“벌리면 구라, 이 새끼야!”
“아…….”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말한다.
“정말 요즘 바빠서 그래. 이번 일만 끝나면 꼭 살 테니까…….”
“아, 됐고요. 브리핑 받으셔야죠, 사장님? 이 비서는 벌써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호식의 비아냥거림에 잠시 콧등을 긁적인 도윤이 대답한다.
“그래, 얘기해 봐.”
“이런, 씨 발라 먹을 십색 볼펜…….”
“여자.”
욕지거리를 내뱉던 호식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도윤의 목소리에 멈칫한다.
“…뭐?”
“이번 일 끝나면, 이쁜 아가씨 하나 소개시켜 줄게.”
“…….”
잠시 침묵을 지키던 호식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허, 강 사장님이 이제 약을 파시네? 검사 되시더니 혓바닥도 길어지셨어? 강도윤이 여자? 야! 니가 여자가 어디 있어!? 지난 몇 년 동안 여자는커녕, 소개팅 하는 것도 못 봤…….”
“믿기 싫으면 말든가.”
“…….”
호식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 호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짜야?”
“리얼, 팩트.”
“…….”
“싫어?”
호식이 재빨리 대답한다.
“아니, 해. 할게. 감사합니다, 도윤 형님. 충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잠시 말끝을 흐리는 호식을 보며 도윤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다음 나올 말이 충분히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10대든, 20대든, 30대든, 40대든… 나이를 불문하고 남자가 이성을 처음 소개받을 때 가장 먼저 묻는 말.’
수화기 너머로 도윤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말이 들려온다.
“…예쁘냐?”
“단순한 놈.”
“…뭐라고?”
“아니, 아니야.”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은 도윤이 말을 잇는다.
“예뻐. 진짜로.”
“콜. 무조건 콜.”
“큭큭, 그래. 그럼 이제 얘기해 봐.”
“넵. 알겠습니다, 사장님.”
절도 있게 대답한 호식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우선 성명병원 투자 및 인수 건. 개인은 불가능하지만, 니 말대로라면 충분히 가능은 해.”
“그래?”
도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의료법상 개인이나 비영리법인이 성명병원을 인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업 차원에서 병원에 대한 투자나 인수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명성 또한 성명병원에 투자하지 못했을 테니까.
“명성은 사실상 손아래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의료법인, 의료 재단을 이용했어. 그 방법을 똑같이 이용하면, 우리 쪽에서도 성명을 먹는 게 가능은 해.”
“…도와줄 거야?”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호식의, 아니 KS그룹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물론 호식 선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일단 도윤이 호식을 설득하더라도, 다시 호식이 집안 웃어른들을 설득해야 한다.
도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태도도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던 호식이 입을 열었다.
“…사실 명성에서 한 짓을 생각하면, 니가 이렇게 따로 얘기하지 않더라도 내 스스로 나서서 놈들을 무너뜨리고 싶어. 그 쓰레기들, 언론이 잠잠해지면 또다시 그따위 미친 짓을 벌일지도 모르니까.”
“그럼……!”
“하지만.”
짧게 한숨을 내쉰 호식이 말을 잇는다.
“우리 집안 어른들 설득 문제야, 내가 어떻게든 하면 돼.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어.”
“더 큰 문제……?”
도윤이 고개를 갸웃한다.
“기업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집단이야. 투자도 마찬가지. 투자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곳에는 절대 돈을 쏟아붓지 않아. 오히려 대기업이 그런 부분은 더 철저해.”
“…….”
“그런 의미에서 성명은 투자가치가 제로에 가까워. 설령 명성이 빠지고, 의료진들까지 모조리 교체된다고 해도 말이야. 한 번 변해 버린 이미지를 뒤집는 건 매우 어려우니까.”
“…….”
“그런 곳에 들어가는 돈이 수천억이야. 지속적인 하락세를 감안해서 잡은 최소치가 그 정도지. 과연 우리 집 어르신들이 그 돈을 내놓을지…….”
“그래서, 돈이 문제다?”
“…그래.”
도윤이 씩 미소 지었다.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뭐라고?”
호식이 멍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 * *
정승만의 호출에 따라, 서울중앙지검장실에 들어서던 도윤이 멈칫한다.
“…먼저 오신 손님이 계셨군요. 제가 나중에 다시…….”
“아니, 아니야. 앉지.”
상석에 앉아 있던 정승만이 손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문식이, 인사해. 저 친구가 저번에 얘기한 강도윤이.”
“…….”
정승만이 이번에는 도윤에게 시선을 돌린다.
“이쪽은 내가 아끼는 장문식이. 니 검찰 선배야.”
정승만의 소개에 자리에서 일어난 장문식이 먼저 몇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서울지검 장문식이다.”
마주 다가선 도윤이 내밀어진 장문식의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신임 검사 강도윤입니다.”
짧게 고개를 숙였다 들던 도윤이 순간 움찔한다.
“두 사람 다 앉지.”
정승만의 말에 도윤과 장문식이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둘 모두를 부른 건… 서로 인사도 시킬 겸, 문식이 얘기도 들어 볼 겸, 겸사겸사. 괜찮지?”
“…….”
도윤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리려고 할 때, 장문식이 대답한다.
“괜찮습니다.”
장문식의 대답에 짧게 한숨을 내쉰 도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정승만이 입을 열었다.
“시간 없으니까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문식이, 이번 대선. 니 생각은 어때? 너도 혁수랑 같은 생각인가?”
잠깐의 고민 끝에 장문식이 곧바로 대답한다.
“…예. 저도 대쪽 어르신 쪽에 붙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유 또한 강혁수 검사랑 같구요.”
“흠…….”
잠시 침음을 흘리던 정승만이 힐끗 도윤을 바라본다.
그 시선에 움찔 몸을 떤 도윤이 살짝 시선을 돌렸다.
다시 장문식에게 시선을 돌린 정승만이 묻는다.
“…한 번 뒤바뀐 흐름을 다시 뒤엎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순간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저 말은…….’
“…예?”
“대한민국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민주당이 여당이 되었네. 그 흐름이 다음 대선에서 곧바로 뒤집어질 거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거야.”
“…….”
장문식이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언가 골똘이 생각하는 듯하던 장문식이 이윽고 대답한다.
“…제 생각은, 이전과 변함없습니다.”
“…그래?”
짧게 한숨을 내쉰 정승만이 손을 휘휘 저었다.
“문식이는 이만 나가 봐. 내 따로 다시 부르지.”
“알겠습니다, 지검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장문식이 한차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장문식을 향해 정승만이 다시 한 번 손을 내젓자, 이내 장문식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출입문을 향해 두어 걸음쯤 걸었을까?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장문식이 갑자기 제자리에 우뚝 섰다.
“지검장님.”
“…응?”
잠시 머뭇거리던 장문식이 이내 형형한 눈빛으로 말을 잇는다.
“차 키,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