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흑막(黑幕)
“차 키?”
정승만이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월간점검 받는 날입니다.”
“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정승만이 순간 고개를 갸웃한다.
“니가 직접 할 거야? 나중에 실무관이 할 텐데…….”
“안 그래도 제가 나가면서 실무관한테 바로 맡기려고 합니다. 저번에 보니까 차가 한쪽으로 쏠리는 게, 휠 얼라이먼트도 손 좀 봐야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
정승만이 대수롭지 않게 자동차 열쇠를 꺼내 내밀었다.
개인적인 일정이 있을 때는 항상 정승만이 운전해 갔기 때문에,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 찝찝한 기분은…….’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자동차 열쇠를 건네받은 장문식이 한차례 허리를 숙였다 펴고는, 이내 몸을 돌려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쿵!
짧은 소음과 함께 출입문이 닫히자, 도윤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응? 너는 왜 일어나?”
“아, 저 그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도윤이 이내 말을 잇는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
묘하게 변해 가는 정승만의 표정을 보며 도윤이 재빨리 말을 덧붙인다.
“급해서요.”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듯 도윤을 잠시 바라보던 정승만이 손을 휘휘 저었다.
“얼른 다녀와.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으니까.”
“…예.”
짧게 고개를 숙인 도윤이 빠르게 출입문을 나섰다.
쿵!
다시 한 번 출입문이 닫히는 소음을 들으며, 정승만이 테이블 위에 있는 차를 홀짝였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정승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지검장실 내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지검장실 밖으로 나온 도윤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이미 저만치 장문식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하게, 신중히.’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장문식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한참 걸음을 옮기던 장문식이 지검 1층 출입문 앞에 이르렀을 때, 멈칫한다.
장문식을 조용히 뒤따르던 도윤도 빠르게 로비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도윤이 모퉁이 밖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자, 장문식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눈을 빛낸 도윤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청각의 비술.”
순간 도윤의 눈빛 사이로 녹색 광채가 스쳐 지나간다.
그와 동시에 정승만이 나누는 대화 내용이 하나하나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 기자, 지금 오면 될 것 같은데…….”
‘기자?’
도윤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응. 30분 뒤에, 일전에 봤던 지검 앞의 커피숍에서 보지. 하나밖에 없으니까 찾기는 쉬울 거야.”
이즈음 도윤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까지 캐치해 내기 위해 청각을 최대한 집중했으나, 목적은 이룰 수 없었다.
‘어렴풋이 들릴 것도 같은데… 아직 레벨이 부족해서 그런가? 만약 통화 상대방 목소리까지 들리는 수준까지 오르면…….’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통신영장도 필요 없는 완벽한 감청(監聽)이 가능하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도윤이 곧이어 들려오는 장문식의 목소리에 상념을 지워 냈다.
“나? 나도 금방 갈 거야. 일 있으면 천천히 오라고.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그래.”
이내 장문식이 전화를 끊는 것을 확인한 도윤이 모퉁이를 돌아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휙!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장문식이 다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을 발견한 도윤이 재빨리 모퉁이 뒤로 다시 숨어들었다.
“박 기자님, 서울지검 장문식 검사입니다. 오늘 만나기로 한 것, 기억하고 계시죠? …예, 예. 30분 뒤에 거기서 뵙겠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기자?’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반 검사가 한 번에 기자 여럿을 불러 모은다?
‘무슨 짓을 꾸미는 거냐, 장문식.’
썩은 냄새가 난다.
장문식이 두 번째 통화도 끝을 냈다.
곧바로 움직일 거라 생각했던 장문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참이나 누군가를 기다렸다.
약 5분 뒤.
한 명의 젊은 사내가 장문식에게 다가온다.
한차례 짧게 고개를 숙인 사내가 장문식에게 무엇인가를 건네받는다.
“실수 없이 잘해.”
“걱정 마십쇼.”
도윤이 최대한 안력을 돋우어 건네받는 물건이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거리가 제법 있어 보이지 않았다.
“젠장…….”
도윤이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장문식이 손을 휘휘 내젓자 젊은 사내가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도윤이 젊은 사내가 이동하고 있는 방향을 힐끗 바라본다.
‘장문식이가 가는 장소가 어디인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지금 해야 할 선택은…….’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사내의 미행은 어렵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길이 아닌, 일반적인 통로만을 이용했기에 도윤도 마음 편히 사내를 뒤따랐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사내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지하 주차장?’
지하 주차장 입구에서 잠시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사내가 상의에 달린 후드를 푹 눌러썼다.
그 상태로, 젊은 사내가 지하 주차장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도윤이 커다란 SUV 차량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지하 주차장 내부엔 인적이 거의 없었다.
일과 시간 중이라 차량을 움직일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리라.
이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사내가 새까만 승용차량 뒤로 다가간다.
그리고…….
트렁크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기 시작하자 도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매직박스……?”
이내 사내가 트렁크에서 꺼내 든 사과 상자를 발견한 도윤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내가 집어 든 사과 상자를 그대로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세단 트렁크에 옮겨 싣기 시작했다.
‘지검장 차량!’
도윤의 눈이 더욱 커졌다.
‘지식의 대가’라는 스킬이 있는 도윤은 한 번 본 차량은 물론, 차량 번호까지 절대 잊지 않는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지금 저 사내의 앞에 주차된 차량은 서울지검장인 정승만의 차량이다.
‘이런 시기에 정승만이 뇌물을 받아?’
저 사과 상자에 진짜 사과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나 잠시 생각하던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이 본 정승만이라는 인물은 야망이 매우 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인물이 검찰총장 자리를 눈앞에 두고, 이런 민감한 시기에 뇌물을 받는다?
‘절대 아니지. 돈에 욕심이 있었다면, 몇 달만 참아도 됐어. 검찰총장 자리에 오르면, 지금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로비가 들어올 테니까. 그 정도 참을성도 없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어.’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굳은 표정으로 사내를 예의 주시했다.
‘무엇보다… 장문식이 지검장을 바라볼 때 옅게 빛나던 보랏빛 광채. 그건…….’
대외적으로 장문식은 서울지검장인 정승만의 라인이다.
그런 사람이 정승만에게 호의도 아닌, 악의를 품고 있었다.
이 모든 걸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장문식이 정승만의 뒤통수를 친다. 이러면 모든 게 설명이 돼.’
도윤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사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셔터를 눌러 대던 도윤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지검장의 차량에 사과 상자를 옮겨 싣는 작업을 마친 사내가, 또다시 검은색 차량 트렁크에서 상자 두 개를 한 번에 꺼내 들었다.
자그마한 메모지를 꺼내 들고 무언가를 확인하던 사내가 이내 흰색 승용차량 앞으로 다가간다.
집어 든 사과 상자를 그 차량 뒤 범퍼 바로 아래에 조심스럽게 숨겨 놓은 사내가 이번에는 또 다른 차량에 다가간다.
‘저건……!’
속으로 경악한 도윤의 두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내 차잖아!’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던 도윤의 두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조용히 몸을 일으킨 도윤이, 천천히 사내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 * *
서울중앙지검 정면에 자리한 커피숍.
“김 기자!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장문식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바쁘신 분이 이렇게 초대도 다 해 주시고,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미안하네. 자주자주 연락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네.”
“에이, 바쁘신 것 잘 아는데요, 뭘.”
김 기자라 불린 사내가 손사래를 치자, 옅게 미소 지은 장문식이 자리를 권한다.
“앉지.”
“예. 그런데…….”
김 기자가 자리에 앉으며 잠시 말끝을 흐렸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바쁘신 분이 이 시기에 커피나 마시자고 부르신 건 아닐 테고…….”
장문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성격 급한 건 여전하군. 조금만 기다려. 이제 곧 올 테니까.”
“예? 누가 또 온다구요? 손님이 더 있습니까?”
김 기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마침 왔군.”
장문식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자, 얼떨결에 따라 일어난 김 기자가 고개를 돌린다.
“…저분은 분명…….”
“오랜만입니다, 검사님.”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중년 사내가 장문식을 향해 반갑게 인사한다.
“박 기자님, 오랜만입니다.”
“예, 잘 지내셨습니까? 그런데… 먼저 온 손님이 계셨군요.”
이미 안면이 있는지, 박 기자라 불리는 중년 사내도 김 기자를 보며 묘한 어조로 말했다.
“서로 인사하시죠. 이쪽은…….”
장문식이 자신을 소개하려고 하자, 김 기자가 급히 입을 열었다.
“현장에서 몇 번 뵈었던 것 같은데… 한신신문의 김성필입니다.”
“예, 저도 면이 있네요. 반갑습니다, 경성신문의 박병창입니다.”
그 모습을 옅게 미소 지은 채 바라보던 장문식이 자리를 권한다.
“인사는 이쯤 하면 된 것 같고, 일단 두 분 다 앉죠.”
“…….”
장문식의 말에 두 사람이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을까?
이윽고 장문식이 입을 열었다.
“왜 두 분만 여기 불러냈는지, 어리둥절하신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김성필이 대답하자, 옆에 앉아 있던 박병창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 조중동이라 불리는 조국일보, 중심일보, 동성일보가 보수 성향이 짙은 반면, 한신신문과 경성신문은 진보적인 성향이 강했다.
장문식이 자신들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한 번에 불러냈다는 것은 분명, 사적인 일은 아닐진대, 진보 신문사의 대표 격인 한신과 경성만 불러낸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두 분 일을 조금 도와드리고 싶어, 이렇게 한 번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뭐, 저희야 일거리를 주신다면 환영입니다만, 어떤……?”
캐비넷에 묻어 둔 적당한 사건을 떠올린 장문식이 대답한다.
“별건 아니고… 요즘 한참 증권가에서 돌고 있는 찌라시에 관한 겁니다. 톱스타 A양이 원정 성매매를 했다는…….”
순식간에 두 기자의 눈빛이 변했다.
메인 페이지를 장식할 기삿거리는 언제나 환영이다.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박병창의 말에 피식 웃은 장문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을 보며 장문식이 말한다.
“차에 제 나름대로 정리해 둔 자료가 조금 있어서요. 그걸 드릴까 합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면 제가…….”
“같이 가시죠.”
장문식의 말을 중간에서 끊은 두 기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같이 가실까요?”
말을 마친 장문식이 출입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허겁지겁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하는 두 기자를 보며, 장문식이 말없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