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잡는 회귀검사-67화 (67/174)

67화 파종(播種)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서울고검장실 내부에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생했어, 고생했어! 장문식이!”

성호동의 말에 장문식이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별일도 아니었습니다.”

“별일도 아니라니! 니가 아니면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일 아니냐! 정말 고생했어!”

TV에서는 서울지검장 정승만의 뇌물수수 의혹에 대한 보도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결과까지는 예상 못 했는데… 이쯤 되니 정승만이, 목석같은 그놈 얼굴 한번 구경해 보고 싶네. 큭큭큭.”

“이제 첫걸음일 뿐입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렇지. 끝날 때까지 방심할 순 없지. 그런데… 혹시, 상자를 직접 날랐나?”

고개를 저은 성호동이 대답한다.

“기자들에게 약을 치는 동안, 믿을 만한 놈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우리 직원이나 내부 인사는 아니겠지? 혹시라도 말이 새어 나가면…….”

“전혀 상관없는 인물입니다. 확실한 인질까지 붙잡고 있으니, 아마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성호동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 유능한 참모가 있는데 걱정은……. 노파심에 하는 말이야.”

“당분간 그놈 신병도 제가 확보하고 있겠습니다. 혹여 낌새가 보이면… 적당한 죄 하나 말아 넣어서, 집어넣어도 되고 말입니다.”

성호동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나는 자네가 좋아. 나랑 너무 잘 맞거든.”

“감사합니다.”

“뭐 그 건은 됐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

성호동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장문식이 곧바로 대답한다.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이 시기에 저런 의혹에 휩싸인 후보자를 가만히 놓아두진 않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후보자 자리에서 물러날 확률이 높으니, 지금은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말을 아끼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시기다?”

성호동의 말에 장문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기자들이 이쪽으로도 제법 올 겁니다. 대외적으로 고검장님은 정승만 지검장의 유일한 경쟁자시니까요. 민감한 시기인 만큼, 이번 건도 말을 아끼시는 게…….”

“아니, 아니야.”

“예?”

성호동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장문식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헐레벌떡 달려온 기자들을 매몰차게 내치기에는, 너무 인정머리가 없지 않나?”

“그 말씀은…….”

“아직 이쪽으로 온 기자는 아무도 없지?”

“…예. 지금은 아마 서울중앙지검 쪽에 다 몰려가 있을 겁니다. 눈치가 조금 있는 친구들은, 조만간 이쪽으로 오겠죠. 그게 아니면 신문사 차원에서 이중으로 기자들을 파견할지도…….”

“우리가 먼저 선수 치지. 딱 한 곳하고만 인터뷰하자고.”

“한 곳, 말씀이십니까?”

장문식의 반문에 성호동이 씨익 미소 지었다.

“여우 같은 늙은이들이 자주 쓰는 방법, 그거 있잖아?”

“…아!”

이내 묘한 감탄사를 터뜨리는 장문식을 보며 성호동이 말을 잇는다.

“보수 신문사 쪽에 잘 아는 기자, 있나?”

“아마…….”

잠시 생각에 잠겨 드는 장문식을 보며 성호동이 말한다.

“됐어. 내가 하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든 성호동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황 기자, 나야. 그래, 잘 있었나? 한창 바쁠 때 내가 전화한 것 아닌가 모르겠군. 뭐?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어? 하하하!”

잠시 인사를 주고받던 성호동이 순간 눈을 빛낸다.

“황 기자, 말 나온 김에, 잠깐 차나 한잔하겠나? …그래, 내 사무실로. 기다리지.”

이내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성호동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장문식을 보며 성호동이 말한다.

“조금 기다려 보자고.”

성호동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이내 서울고검장실 사무실 내부에 고요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수 시간 뒤, 조국일보에서 단독 보도라는 이름의 기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 면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글자들의 가장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큼지막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서울고검장 성호동, “서울지검장 뇌물수수 의혹에 유감. 의혹 해소에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

* * *

협박과 회유.

비단 정치판뿐만 아니라, 권력자들이 사람을 부리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물론 도윤도 이 방법을 이용했다.

젊은 남자를 덮치기 전, 도윤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

하나는, 증거로 사용할 사진을 이미 확보하였으니, 곧바로 남자를 붙잡아 놈의 뒤를 털어 낼 것인가.

‘심문의 달인’이라는 사기적인 스킬을 가지고 있는 도윤이었기에, 꼬리 자르기 따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굳이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뒤에 누가 버티고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스킬만 잘 활용해도 충분히 좋은 그림이 그려지겠지만, 무언가 2퍼센트 부족한 느낌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기다리기만 해도 더 극적인 효과를 연출할 수 있는데, 굳이 성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었지.’

어떤 일이든 항상 터지고 나서 논란이 불거진다.

스킬이라는 무기가 있다지만, 아직 언론에 알려지기도 전의 일을 입맛대로 그려 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두 번째.

일단 사내를 붙잡지 않고 하는 대로 두는 것이었다.

이번 일로 정승만은 향후 검찰 생활의 운명을 걸어야 할 정도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그 위기를 대신 해결해 준다면?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그토록 원하던 검찰총장 자리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게 된다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다 주고 싶겠지. 바로 나한테.’

도윤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이봐, 친구.”

“예, 예. 검사님.”

도윤의 부름에 소파에 앉아 있던 젊은 사내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김… 김재규입니다.”

“그래, 재규. 준비는 됐나?”

“…….”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져드는 김재규를 보며, 도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잘 생각해. 장문식, 그 양반이야 고작 상자나 나르는 가벼운 심부름이라 말했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우리나라 형법상으론 엄연히 ‘제3자뇌물공여죄’라는 게 있어. 너한테 이따위 일을 시킨 장문식이는 이제 피의자라는 말이지. 널 도와주지 못해. 그리고…….”

도윤이 품 안에서 카메라를 꺼내 흔들었다.

“그런 일을 도와준 너는? 과연 어떻게 될까?”

김재규가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동생을 조금이라도 일찍 만나고 싶어서 그런 일을 했다고 했지. 내가 도와줄까? 둘 다 교도소 안에서 만나게 해 줄 수도 있는데.”

“그건…….”

김재규가 말을 잇지 못하고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참이나 말을 못 하는 김재규를 보며 도윤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눈앞에 있는 김재규가 장문식의 심부름을 했던 이유.

알고 보니 얼마 전에 있었던 대규모 곗돈 사기 사건의 공범이 김재규의 친동생이었다.

물론 사건 담당 검사는 장문식이었고 말이다.

‘협박도, 회유도 쉬웠겠지. 동생은 책임지고 잘 봐주겠다든가, 적당히 좋은 말로 구슬리면, 감동의 눈물을 흘릴 테니까. 동생이 제 손안에 있는 이상, 혹시나 상자 내용물을 알게 되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을 테고.’

기본적으로 검사라는 놈들은 다른 사람은 물론, 가족조차 함부로 믿지 않는다.

워낙 많은 사건, 사고를 접하다 보니 의심병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굳건히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어느 정도 보험을 들어 놓고 움직이는 것이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구나, 장문식. 이 정도 보험쯤은…….’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여전히 떨고 있는 김재규를 바라본다.

“대답은?”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 김재규를 보며,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적당한 협박, 다음은…….’

“선물 하나 주지.”

“예?”

도윤이 턱짓으로 책상 옆을 가리켰다.

도윤이 기동성을 위해 따로 빼놓은 사과 상자였다.

“니가 내 차 밑에 놓으려고 한 저 사과 상자, 널 주마.”

“……!”

도윤의 말에 김재규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게 무슨…….”

“곗돈 사기. 아무리 조직 단위의 전국구 사건이고 니 동생이 총책(총책임자)이라도 형량을 때리는 데는 한계가 있어. 설령 장문식이 뒤에 법무부 장관이 있어도, 내가 생각하는 최대치는 5년이야.”

“5년…….”

멍하니 중얼거리는 김재규를 보며 도윤이 말을 잇는다.

“저 상자, 이제는 잘 알겠지만, 1만 원권 지폐로 가득 들어차 있어. 2억은 훨씬 넘을 거야.”

구체적인 액수까지 나오자 김재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김재규를 보며 도윤이 쐐기를 박는다.

“동생이 빵에서 나오면 뭐 해 먹고 살 거지? 건실하게 살아 보고 싶어도, 돈이라도 있어야 뭐라도 해 볼 것 아닌가?”

“…….”

“선택해. 동생이랑 사이좋게 교도소에서 만날지, 아니면 저 돈 받고 이대로 묻을지.”

“…….”

도윤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한참 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대략 찻물이 두 번 끓어 오르는 시간이 지났을 때쯤, 이윽고 김재규가 입을 열었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도윤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잠깐만.”

휴대전화를 꺼내 든 도윤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간 신호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수화기 너머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검사님?”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도윤이 입을 열었다.

“배 기자님, 잘 계셨습니까?”

“예, 저야 뭐……. 인사 한 번 드리려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늦어졌네요. 죄송합니다.”

“인사요?”

도윤의 반문에 수화기 너머로 잠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먼젓번에, 검사님 덕분에 제가 보너스를 두둑하게 받았거든요. 흐흐흐.”

“명성 건 말씀이시군요.”

한차례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말을 잇는다.

“말 나온 김에……. 특종거리가 하나 더 있는데, 혹시 관심 있으십니까?”

“…예? 특종거리요?”

배영준 기자가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잠시, 잠시만요. 주변이 조금 시끄러워서…….”

수화기 너머로 후다닥 뛰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조금의 시간이 지나 배영준 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헉, 헉. 요즘은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차서…….”

“나이도 아직 젊으신데… 다른 곳에 너무 힘쓰셔서 그런 것 아닙니까?”

도윤이 장난스럽게 반문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신혼도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집에 가면 마누라가 예뻐 보이니…….”

잠시 말끝을 흐리던 배영준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잇는다.

“그나저나, 강 검사님이 주실 특종거리라니… 정말 기대가 되는데요?”

“아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지금 한창 이슈 되고 있는 사건이니까요.”

“지금 이슈 되고 있는 사건이라면…….”

배영준이 설마 하는 목소리로 묻자, 도윤이 곧바로 대답한다.

“차량에 사과 상자를 싣는 과정을 촬영한 사진.”

“……!”

“그거,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십니까?”

이제는 사진을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도 묻지 않는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주소를 불러 주자, 배영준이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잠시 휴대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던 도윤이 중얼거린다.

“성격도 급하네.”

“…검사님, 그럼 저는 지금 그 기자를 만나서 얘기하면 되는 겁니까?”

“아니.”

“…….”

“이것도 약을 치는 과정일 뿐이야. 본격적인 파종(播種)시기는… 사진이 세상에 뿌려지고, 여론의 반응이 가장 뜨거울 때.”

“…….”

“그때를 노린다.”

도윤의 미소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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