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개국공신
기적의 해도 저물어, 2003년이 되었다.
계미년이라고도 불린 이번 해에는 초부터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다.
국외에서는 같은 달에 이스라엘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연이은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전 세계 사람들이 중동 국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국내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슬래머 웜 공격으로 전국의 인터넷망이 마비되는 1.25 인터넷 대란 사건이 발생하더니, 약 한 달 뒤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고작 휘발유를 담은 패트병 2개로, 3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는 도윤 스스로도 상당한 자괴감에 빠졌었다.
분명 미래를 미리 알고 있었으나, 사고가 발생할 정확한 날짜까지는 기억하지 못했고, 결국 사건은 터지고 말았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그날이 왔다.
* * *
“지검장님, 나옵니다!”
지검장실 내부에 강혁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옅게 미소 지은 정승만이 강혁수가 가리키는 TV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침 TV에서는 지금 막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위대한 선택으로, 저는 대한민국의 새 정부를 운영할 영광스러운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뜨거운 감사를 올리면서, 이 벅찬 소명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완수해 나갈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특별히 이 자리를 빌려,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 여러분의 명복을 빌면서, 유가족 여러분께도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 다시는 이런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게, 재난관리체계를 전면적으로 점검하고 획기적으로 개선해 안전한 사회를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중략
우리에게는 수많은 도전을 극복한 저력이 있습니다. 위기마저도 기회로 만드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 지혜와 저력으로 오늘 우리에게 닥친 도전을 극복합시다. 오늘 우리가 선조들을 기리는 것처럼, 먼 훗날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기억하게 합시다.
우리는 마음만 합치면 기적을 이루어 내는 국민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모읍시다.
평화와 번영과 도약의 새 역사를 만드는 이 위대한 도정에 모두 동참합시다.
항상 국민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내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사가 끝이 나자, 정승만이 테이블 위에 있는 리모컨을 집어 들더니 그대로 TV를 꺼 버렸다.
“아니 좀 켜 놓고 이 순간을 즐기시지…….”
강혁수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정승만이 피식 미소 지었다.
“아직 할 일이 많아.”
“정말 믿기지가 않습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상황은 절망적이었는데…….”
야당 제1후보자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될 정도로 점쳐지고 있을 때, 그의 가장 강력한 두 라이벌인 여당 후보자와 국민통합21 후보자가 후보 단일화를 선언했다.
두 인물의 표가 합쳐지자, 대선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고, 후보자의 당선을 점치고 있던 야당 인사들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당연히 야당에서는 두 후보자를 떼어 놓기 위해 끊임없는 물밑 작업을 벌였고, 대선 선거 바로 하루 전, 여론조사에서 진 국민통합21 후보자의 ‘단일화 후보 지지 철회’라는 결과를 얻어 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결정이 국민들의 표를 하나로 모으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하루 전날 그따위 장난질을 벌여, 손도 못 써 보고 질 거라 생각했는데…….”
잠시 말끝을 흐리던 강혁수가 씨익 웃는다.
“설마, 그 장난질에 분노한 국민들의 표심이 완전히 돌아서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원래 세상일이란 알 수가 없어 재미있는 것 아니겠나.”
정승만이 옅게 미소 지은 채 중얼거렸다.
“그런데 우리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은 어디 갔습니까?”
강혁수가 순간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오늘 연가야. 한 일주일 쉬고 오겠다는데,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막겠나?”
“갑작스러운 일주일 휴가라… 설마 저희 모르게 아가씨를 만난다든가…….”
정승만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한창 혈기왕성할 때 아닌가.”
“하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강혁수가 순간 멈칫한다.
“그런데… 그 친구, 이제 대외적인 임무는 모두 끝이 났는데 어디로 발령 낼 생각이십니까?”
강혁수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정승만이 곧바로 대답한다.
“특수부로 보낼까 하네.”
“특수부요?”
강혁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검찰 내에서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검찰의 꽃이라 불리는 특수부. 그중에서도 특히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와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국가 중요 사건이나 경제인·정치인 사건은 물론, 권력형 비리 수사 등 크고 굵직한 사건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엘리트 부서였다.
같은 검사들 내에서도 급이 있듯, 소위 일머리가 잘 돌아가는 엘리트 검사들이나 뒷배가 좋은 검사들만이 갈 수 있는 부서였다.
정승만은 그런 곳에 초임 검사나 다름없는 도윤을 보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그 친구 능력이야, 충분히 봐서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큰 물고기는 큰물에서 놀아야지.”
“…….”
“놈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 날아오를 거다. 창공을 나는 새. 아니, 어쩌면 찌들대로 찌든 나와는 달리 훗날, 봉황이 될 수도 있겠지.”
“……!”
순간 강혁수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친구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봉황은 좀…….”
정승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안 될 건 또 뭔가? TV 속의 저 대통령님도 고졸 출신의 사시합격자 아닌가?”
“…….”
강혁수가 입을 다물었다.
“크게 될 놈이야, 놈은.”
“…….”
“뭐, 키워 놓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정승만이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강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 친구가 없었다면 지금 저희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음.”
“결국에는 이렇게, 차기 집권 여당에 줄까지 댈 수 있었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강혁수의 말에 정승만의 미소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 * *
“억……!”
개인 집무실에서 TV를 바라보던 오춘화 회장이 결국 뒷목을 부여잡았다.
“회, 회장님!”
오춘화 회장의 오른팔, 박건우가 급히 소리치며 다가왔다.
“TV… TV 꺼!”
오춘화 회장이 고래고래 고함치자, 박건우가 리모컨을 찾기 위해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리모컨이 대체…….”
“이 빌어먹을!”
순간 욕지거리를 내뱉은 오춘화 회장이 책상 위에 있는 유리컵을 집어 들었다.
와장창!
오춘화 회장의 손을 떠난 유리컵이 그대로 TV에 적중하며, 스크린 화면이 박살이 났다.
파지지직.
스파크 소리가 잠시 조용히 울려 퍼졌다.
“허억, 허억, 허억.”
오춘화 회장이 기력이 다했는지 가삐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박건우가 그런 회장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침착하게 기다리자, 오춘화 회장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명 건으로… 회사 전체 수주가 얼마나 떨어졌다고 했지?”
잠시 머뭇거리던 박건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곤 대답한다.
“30퍼센트 이상 떨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중간 판매처 입장에서, 브랜드 이미지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박건우를 보며 오춘화 회장이 다시 묻는다.
“주가는?”
“…그보다 더 떨어졌습니다. 지금도 계속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 수치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성명 건 이전보다 40퍼센트는 차이 난다고 봐야…….”
오춘화 회장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끄윽…….”
“회장님!”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수그리는 오춘화 회장을 보고 박건우가 놀라 소리쳤다.
손을 휘휘 저은 오춘화 회장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의 약통을 다급히 움켜쥔 오춘화 회장이, 그대로 마개를 열어 입에 약을 털어 넣었다.
눈치 빠른 박건우가 재빨리 생수를 꺼내 새로운 유리컵에 따랐다.
박건우의 손에서 유리컵을 낚아챈 오춘화 회장이 그대로 물을 들이켜 마셨다.
벌컥, 벌컥.
오춘화 회장의 목울대가 거칠게 출렁였다.
타악!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내던지듯 내려놓은 오춘화 회장이 다시 박건우를 바라본다.
“이번… 대선으로 우리가 떠안게 된 손해까지, 모조리 보고해.”
“…우선 선거자금 지원 명목으로 저희가 쓴 돈만 약 1,300억 정도입니다. 대선 이후를 위해 사 둔 일산 지역 땅과 건설 투자금, 여기저기 들어간 돈까지 다 합치면 그 두 배, 아니 세 배까지도…….”
박건우의 말이 이어질수록 오춘화 회장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졌군… 완벽하게.”
오춘화 회장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하고 오도카니 서 있는 박건우를 보며 오춘화 회장이 책상 위의 종이 뭉치를 탁 하고 집어 던졌다.
공중에 흩날리는 종이들 사이로 가장 위의 큼지막한 글자가 박건우의 눈에 박혀 든다.
<신도시 컨벤션 센터 계획. 명성 시티>
“이따위 게 이제 다 무슨 소용이냐… 이제는 한낱 쓰레기 더미인 것을…….”
“…….”
“너무 꿈만 컸던 게야. 주제에도 맞지 않는 욕심을 너무 부렸어. 이전까지의 일만 봐도, 올해는 길(吉)보다 흉(凶), 그것도 대흉(大凶)이 강한 해이거늘…….”
힘없이 중얼거리는 오춘화 회장을 바라보는 박건우의 두 눈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직…….”
“……?”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말을 마친 박건우가 바닥에 흩어진 종이 뭉치를 주섬주섬 주워 들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냐?”
“이 계획, 합법적인 정책으로 밀어붙일 수 없다면, 힘으로 찍어 누르면 됩니다.”
“…….”
“대통령의 임기 첫해. 가장 힘이 강할 때이지만, 가장 바쁠 때이기도 합니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놓고, 이쪽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못하도록 만들면 됩니다.”
오춘화 회장의 두 눈에 점차 초점이 잡혀 가기 시작한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정부 차원의 홍보나 지원, 계획도시 선정 따위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기본적인 터는 모두 닦아 놓았고, 이제부터 우리가 만들어 가면 되는 거니까요.”
“…….”
“속전속결.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일을 진행하되, 관심이 떠난 틈을 타 빠르게 처리하면 됩니다.”
“…계획은 있나?”
오춘화 회장의 물음에 눈을 빛낸 박건우가 무어라 설명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춘화 회장의 얼굴 표정도 조금씩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박건우의 설명을 듣던 오춘화 회장이 이내 가라앉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결국, 성명은 완전히 버려야 되겠군.”
“이미 적자뿐인 병원입니다. 버릴 땐 확실히 버리면서 최대한 큰 이득을 취하는 게 상(上)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오춘화 회장이 잠시 침음을 내뱉었다.
투자 전부터 야심차게 준비했던 성명병원을 버린다?
분명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이미 소생 불가다. 그렇다면…….’
속으로 중얼거린 오춘화 회장이 눈을 빛냈다.
“세부 계획 짜서 나한테 브리핑하고, 진행해 봐.”
“알겠습니다, 회장님.”
“보안 유지는 철저히 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정치권 줄이랑 얼마 전에 충성하겠답시고 찾아온 깡패 새끼들까지, 이용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이용해.”
“예.”
“나가 봐.”
한차례 깊이 고개를 숙인 박건우가 이내 출입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박건우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