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성명병원 인수
“마지막 아랫부분에 서명하시면 서류 작성은 끝입니다.”
KS그룹 법무 팀에서 나온 남자 직원이 도윤 앞으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남자가 힐끗 도윤 옆의 호식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보면 아시겠지만, 인수하는 데 필요한 투자 금액은 생각보다 많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희 외에 다른 투자자도 없을 뿐더러, 명성 쪽에서도 편의를 많이 봐줬거든요.”
“고생하셨습니다.”
호식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때? 국내 최대 규모의 병원이 1,700억. 이 정도면 거의 날로 먹는 거라 생각하는데?”
“음…….”
서류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도윤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물가를 기준을 고려해도 성명을 인수하는 데 드는 비용이 1,700억이라면 매우 싼 것이었다.
‘그런데, 이 찝찝한 기분은…….’
잠시 미간을 찌푸린 도윤이 다시 한 번 서류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법적인 하자 또한 전혀 없었다.
이내 한숨을 내쉰 도윤이 KS그룹의 법무 팀 직원을 돌아본다.
“고생하셨겠네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짧게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던 도윤이 이윽고 펜을 집어 들었다.
사각, 사각, 사각.
사무실 내부에 도윤이 펜을 끄적거리는 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여기 있습니다.”
도윤이 내민 서류를 찬찬히 훑어보던 법무 팀 직원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끝났습니다. 이제 저희 선에서 마무리만 하면 됩니다. 성명병원의 주인이 되신 것을 정식으로 축하드립니다.”
법무 팀 직원의 말에 도윤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잠시 말끝을 흐리던 법무 팀 직원이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대외적으로는 저희 KS그룹 산하 의료 재단에서 병원을 인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아마 눈에 띄는 대외 활동은 자제하시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원래 선장은 배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안 보이는 곳에서 키만 열심히 조정하면 되는 거야. 직원 복지나 좀 신경 써 주고. 어차피 너도 의료 쪽 일은 영 젬병일 테니.”
법무 팀 직원의 말을 호식이 받자,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난 앉아서 돈이나 쓸어 담을게.”
“진짜 재수 없다.”
호식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뭘?”
“그 큰돈이 갑자기 어디서 생겼는지.”
“…….”
호식의 물음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도윤이 이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궁금해?”
“어. 궁금해 미칠 것 같으니까 빨리 말해.”
“한국의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이 바로 나거든.”
“…….”
호식이 입을 다물자, 도윤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묻는다.
“하나 알려 줘?”
“뭘?”
“조금 있으면 대박 칠 만한 투자처.”
빠직.
호식의 얼굴 근육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한다.
“됐거든! 필요 없거든! 나도 호식이로 대박 쳐서 빌딩 하나 세울 거거든!”
호식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 *
촤아아아악!
“끄… 끄으윽.”
의식을 잃고 있던 남자가 얼굴 위로 느껴지는 물세례에 이내 침음을 내뱉으며 정신을 차렸다.
남자의 이름은 박태봉.
십수 년을 성명병원에서 근무한 전문 외과 의사였다.
“정신이 드나?”
눈 아래의 칼자국이 상당히 인상적인, 날카로운 인상의 30대 남자가 물었다.
“누… 누구…….”
남자의 잇새로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물, 물 좀…….”
“물? 당연히 드려야지.”
피식 웃음을 터뜨린 남자가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남자에게 턱짓한다.
“컵 하나 가져와.”
“예, 형님.”
거구의 사내가 짧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빠르게 뛰어갔다.
잠시 후, 사내가 가져온 컵을 건네받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좌측 양동이에 있던 물을 그대로 떠올렸다.
“마시고 싶나?”
컵 안에서 물이 출렁일 때마다, 박태봉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물을 들이켜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의자에 손발이 완전히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제, 제발…….”
박태봉이 간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사내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주르르르륵.
컵 안에 담긴 물을 그대로 박태봉의 머리 위로 들이부었다.
잠시 갈등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박태봉이 이내 혀를 내밀어 입 주위로 흐르는 물을 미친 듯이 핥아 대기 시작했다.
“큭큭큭큭, 그러고 있으니까 꼭 개새끼 같군. 그래도 명색이 대한민국에서 먹물 좀 먹어야 될 수 있다는 의사 양반이 말이야.”
“푸하하하하하핫!”
사내의 말에 장내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대, 대체 누구기에 나한테 이러는 거요? 왜…….”
박태봉이 여전히 갈라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냐고?”
남자가 박태봉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성명의 장기매매 리스트. 가지고 있지?”
사내의 말에 박태봉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다.
리스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정치인 누구누구의 리스트 따위의 말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 용어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언론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지곤 한다.
독박을 쓴 정계 인사가 벼랑 끝까지 내몰렸을 때, 독심을 품고 마치 유서라도 되는 것처럼 뇌물을 수수한 유력 권력자들의 리스트를 남긴다든가.
혹은 정권이 바뀌면서 현 정부가 전(前) 정부의 각종 비리 권력자 리스트를 파헤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종류의 리스트들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수사의 단서가 되는 가장 중요한 자료들 중 하나였다.
“그, 그게 무슨…….”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우리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런 무식한 일을 벌였을 거라 생각하나?”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
피식 미소 지은 남자가 옆을 향해 외친다.
“공구 가져와!”
“여기 있습니다.”
사내의 부하로 보이는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품 안에서 밴찌(플라이어)를 꺼내 내밀었다.
“손기술로 먹고사는 의사 양반이, 손가락이 병신이 되면 어떻게 되려나?”
“잠… 잠깐만! 대체 무슨……!”
“중간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일단 왼쪽부터.”
혀로 입술을 핥은 남자가 묶여 있는 박태봉의 왼손을 움켜쥐었다.
덜컹, 덜컹, 덜컹!
플라이어가 천천히 왼손을 향해 다가가자, 박태봉이 미친 듯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안, 안 돼!”
“안 되긴.”
플라이어로 박태봉의 왼쪽 검지 손톱을 단단히 그러쥔 남자가 그대로 힘을 줘 확 잡아 당겼다.
뿌드드득!
마치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박태봉의 손톱이 그대로 뜯겨 나간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박태봉이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위치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밀실에, 박태봉의 비명 소리가 가득 들어찼다.
“워따, 다 죽어 가던 양반이 기차 화통을 삶아 드셨나, 목소리 한번 우렁차네.”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든 남자가 그 양말을 그대로 박태봉의 입에 쑤셔 박았다.
“끄어어억, 끄어어어어억…….”
억눌린 신음 소리와 함께, 사내의 입에 물린 양말이 침으로 젖어 들어간다.
“잘 생각해 봐. 리스트, 정말 없어?”
박태봉의 얼굴이 점차 공포로 물들어 갔다.
“대답을 안 해, 시벌놈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박태봉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가 또다시 박태봉의 중지 손톱을 뜯어냈다.
“꺽, 꺽, 꺽.”
박태봉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신음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있는 박태봉을 보며, 남자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차! 이것 때문에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겠네. 미안, 미안.”
사내가 박태봉의 입안에 있는 양말을 곧바로 빼냈다.
“끄어어억, 끄으으…….”
박태봉이 침을 질질 흘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런 박태봉을 보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
“얼마 전에 있었던 그 눈물 어린 양심선언? 그거 한 번만 해.”
“끄… 무… 슨…….”
“니가 가지고 있는 장기매매 수요자 리스트. 이름 좀 있는 권력자들은 모조리 넣어서 언론에 터뜨려.”
“……!”
박태봉이 눈을 크게 떴다.
“아! 물론 양심선언이니까, 어떠한 외부의 압력도 없는, 오로지 니 개인적인 양심에 따라 행동한 거라 말하는 건 기본이겠지?”
“당… 신들, 설, 설마…….”
박태봉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명성에서, 명성에서 나온 사람들이오?”
박태봉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벌인 불법 장기수술에 대한 보복이라 생각했다.
뒤탈 없는 납치 대상자들만 선정해 작업을 진행했지만,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때문에, 그 관계자들이 보낸 사람들인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진 말라고.”
“어떻게… 어떻게 명성에서 나한테 이럴 수가 있소! 십수 년을… 십수 년을 명성을 위해 충성을 다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남자가 미소 지었다.
“잘됐네. 그럼, 끝까지 충성하라고. 그 명성을 위해서.”
“그런 일을 벌였다간, 여기서 나가도 내가 무사할 것 같소!?”
고통도 잊은 박태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수술 대상자는 전직 장관의 아들은 물론이고 현직 국회의원 조카에, 재벌집 자식도 있었소! 그따위 짓을 했다간……!”
“그래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잖아.”
“……!”
박태봉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설마… 나 혼자 뒤집어쓰라, 이 말이오?”
“역시 의사 양반, 머리가 아주 그냥 최신형 모토급으로 잘 돌아가시네.”
“개소리!”
박태봉이 악에 받쳐 고래고래 고함쳤다.
“내가 그런 짓을 할 거라 생각하시오? 차라리 여기서…….”
“데려와.”
순간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몇 명의 남자가 빠르게 어디론가 뛰쳐나간다.
그리고…….
“아악! 아아악!”
하이톤의 여자 비명이 잠시 들리는가 싶더니, 잠시 후 장정 네 사람이 두 여자의 머리채를 질질 끌며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 여보!”
이내 비명을 지른 여자의 정체를 확인한 박태봉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아, 아빠!”
그 옆에 있는 여자의 목소리에 박태봉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지수야!!!!”
팔다리가 결박된 자신의 딸이 이쪽으로 끌려오고 있었다.
낮은 웃음을 흘리며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큭큭큭, 나가서 뒈지나, 여기서 뒈지나 매한가지라 생각한다고 했지?”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얼굴이 시뻘개진 박태봉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선택해. 눈앞에서 니 소중한 가족들이 험한 꼴 당하는 거 감상하면서 뒈질지, 아니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할지.”
“이… 이…….”
“흐흐, 멀쩡한 남의 자식들 각막 심장 췌장 다 떼어 낸 놈이 지 가족은 걱정되나 보지?”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박태봉을 보며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위에서는 최대한 짧고 안전한 옥살이와 가족들의 생계는 책임져 준다니까,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이… 씨발!”
“우리 이미 나와 있는 답을 가지고 질질 시간 끌지 맙시다.”
“씨바아아아아아아아아알!!!!!!!!!!!!!!”
박태봉의 욕지거리가 밀실 내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