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토끼몰이
전통 시장 안에 자리한 자그마한 2층 건물.
1층은 반찬 가게, 2층은 가게 주인의 집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20세기파의 수많은 사무실 중 하나였다.
그곳 거실 한가운데 둥근 테이블을 두고, 몇몇 남녀가 둘러앉아 있었다.
순간 출입문이 덜컥 열린다.
“…뭐 한다고 이제 왔냐? 고객님 기다리시는 것 안 보여?”
도윤이 지금 막 들어서는 호식과 남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 미안. 차가 너무 막혀서.”
호식이 짐짓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이내 황보신혜를 향해 고개를 돌린 호식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장호식이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자그마한 변호사 사무실을 하고 있습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변호사님. 황보신혜라고 해요.”
“…아, 이름이…….”
호식이 잠시 말끝을 흐리자, 황보신혜가 옅게 미소 지었다.
“조금 특이하죠? 황보가 성이에요.”
“아, 그렇군요.”
호식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미소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조금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일 얘기부터 하자고.”
도윤이 눈짓으로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종이 더미를 가리켰다.
도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호식이 말한다.
“대략적인 얘기는 들었습니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네, 맞아요.”
“현재 업소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 녀석에게 전부 들었는데… 아마, 업소의 관계자들을 처벌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마약까지 쓴 놈들이니, 굳이 제가 나서지 않아도 국가에서 모조리 다 잡아들여 줄 거예요.”
잠시 뜸을 들이던 호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하지만… 그뿐이겠죠.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그 점은 신혜 씨도 알고 계시죠?”
호식의 물음에 황보신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실장님뿐만 아니라 그 위, 더 높은 사람들을 그저 처벌하는 것만 가지고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겠죠. 아니, 오히려 일부 아가씨들은 그런 걸 원하지 않을 거예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한순간에 직장을 잃게 되는 거니까…….”
황보신혜가 씁쓸한 미소로 말끝을 흐렸다.
호식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신혜 씨, 업소 측 관계자들은 반드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알량한 권력을 이용하여 아가씨들을 마음껏 휘두르는 행동들, 심지어 절대 해서는 안 될 마약이라는 중범죄까지. 일부 아가씨들을 위해 업소 측을 이대로 방치한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저도 알아요.”
“예?”
호식의 반문에 황보신혜가 올곧은 눈빛으로 대답한다.
“그런 사정을 생각했더라면, 이렇게 변호사님을 찾아다니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언젠가는,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니까요.”
“…….”
“저는… 아가씨들. 아니, 제 가족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이 구덩이 같은 곳에서 꺼내 주고 싶고, 아가씨라는 이유만으로 더 이상 사회의 시선과 손가락질에 눈치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
“…언제, 어디서나… 가슴 당당하게 피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제가 도와주고 싶어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을 잇는 황보신혜를 호식이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잠시간의 침묵 뒤, 황보신혜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웃기시죠? 아무런 힘도 없는, 정작 자기 자신도 아가씨인 여자가 이런 허무맹랑한 꿈을 꾼다는 게…….”
“아니요.”
황보신혜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호식이 말했다.
“정말 멋진데요?”
“…네?”
호식이 씨익 웃으며 말을 잇는다.
“아무래도 저랑 같은 꿈을 꾸시는 것 같은데. 그 꿈, 저도 같이 꿔도 될까요?”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황보신혜가 이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네! 물론이죠.”
그 눈부신 미소에 호식이 또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침묵이 조금 길어지자, 옅은 미소를 입에 물고 두 사람을 바라보던 도윤이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아무래도 우리 친구가 사랑에 빠진 것 같은데?”
“무… 무슨 소리를!”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는 도윤의 말에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개진 호식이 버럭 고함쳤다.
“아니면 아닌 거지, 큰소리는…….”
“젊은 게 좋군. 풋풋해. 저 친구, 생긴 것도 풋고추같이 생긴 게, 아주 그냥 아삭아삭 씹어 먹어 주고 싶군.”
도윤의 말을 박판섭이 거들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됐고. 이제부터 역할 분담해 줄게. 중요한 얘기니까 집중들 해.”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외치는 호식을 무시한 도윤이 계속 말한다.
“먼저 판섭이 아저씨.”
“아직 총각인데 아저씨는…….”
“그럼 그냥 판섭이라고 해?”
“아빠뻘인데 그것도 좀… 그냥 아저씨라고 하쇼, 영감님.”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말을 잇는다.
“지금부터 업소와 관련된 예전 망치파의 식구들. 한 놈도 빠짐없이, 모조리 잡아 와 줘. 칼치가 우리 손에 있으니, 아마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뭐, 영감님 말대로 그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그다음은?”
“칼치가 말하는 걸로 봤을 때, 최소 스무 명은 될 거야. 그중에 한 명, 아니 두 명 정도만 꼬셔 봐. 많이 꼬실수록 더 좋아.”
무언가 잠시 고민하던 박판섭이 말한다.
“…배후를 칠 진술을 최대한 확보하겠다?”
“이제 수사관 다 됐는데?”
“기본이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는 박판섭을 보며, 도윤이 또 한 번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다음…….”
잠시 말끝을 흐리던 도윤이 이번에는 황보신혜를 돌아본다.
“신혜 씨, 아가씨들이 보통 언제 출근하죠?”
“요즘에는 퇴근 이후에 곧바로 오는 손님들도 있어서… 이른 타임은 저녁 7시 정도면 출근을 할 거예요. 그 외 숙소에서 대기하다가 호출을 받고 오는 언니들도 있고…….”
“혹시 신혜 씨가 오늘 출근하지 않는 인원들까지 모두 불러 줄 수 있을까요?”“그 정도는 문제없어요. 호구 손님들 얘기만 나와도, 아마 따로 말 안 해도 달려올 거예요.”
“들었지?”
도윤이 다시 박판섭을 돌아봤다.
“아가씨들 소지품까지 싹 뒤집어엎으려면… 애들,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겠는데?”
“너무 폭력적인 행동은 안 돼. 아가씨들 진술도 필수적이니까.”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윤이 호식을 돌아봤다.
“놈들 잡아다 처넣는 건 나한테 전부 맡겨 둬도 되니까, 호식이 너는 민사소송 철저히 준비해. 아가씨들 조그마한 바에서 새 출발이라도 하려면… 무슨 말인지 알지?”
“걱정 마시고 증거 잘~ 좀 모아서 그 쓰레기들, 꼭 처벌해 주세요. 그런 기록들 하나하나가 놈들의 밑천까지 털어먹을 원동력이 되니까.”
“걱정 마. 비장의 무기는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까.”
“비장의 무기?”
도윤의 의미심장한 말에 호식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순간 씨익 미소 지은 도윤이 의자 아래에 내려놓은 얇은 책자를 손에 들었다.
“그거, 설마 장부…….”
“뭐, 이쪽 일은 나한테 맡기라고. 자, 그럼…….”
도윤이 말끝을 흐리며 테이블 위로 척 하고 손을 내밀었다.
“파이팅 한 번 하자.”
순간 호식이 기겁했다.
“아니 애도 아니고 뭔 파이팅이야.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저 말은 나도 동감이다. 내 나이가 내일모레 쉰인데…….”
호식의 말을 박판섭이 받았다.
“신혜 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도윤이 시선을 돌리며 묻자, 황보신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요. 저는 좋은데요?”
밝게 미소 지은 황보신혜가 도윤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 모습을 호식과 박판섭이 잠시 멍하니 바라본다.
“커흠, 단체 생활에 혼자 내뺄 수도 없고, 남사스럽게, 거참…….”
이내 박판섭이 먼저 손을 내밀려고 하자, 호식이 급히 황보신혜의 손등 위에 제 손을 포갰다.
“…뭐,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말을 잇는 호식의 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귀여운 놈.’
속으로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이내 힘차게 소리쳤다.
“자, 파이팅!”
“파이팅!!!!”
네 사람의 목소리가 2층 건물 내부에 울려 퍼졌다.
* * *
도윤이 밀담을 나누고 있는 그 시각.
역사상 최악의 참사라는 대구 지하철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한 번 충격적인 소식이 세상을 강타했다.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성명병원의 불법 장기수술 사건.
국내의 수많은 권력자들이 얽힌 그 장기수술 수요자들의 리스트를 폭로하겠다는 의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로지 의사의 개인적인 양심에 따른 사건의 전말을 폭로하겠다는 의사의 발언은 세간의 시선을 더욱 집중시켰다.
얼마 전 또 하나의 양심선언에 대한 그 파급효과를, 국민들이 몸소 체험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일 오전.
대부분 한창 일을 하고 있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TV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직장, 학교, 관공서.
애, 어른 할 것 없이 그 네모난 상자에 눈을 대고 있을 때, 마침내 문제의 그 의사가 화면에 나타났다.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어 나가는 전 성명병원 의사, 박태봉의 말들이 TV 스피커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전 성명병원의 외과의사이자, 죄인인 박태봉이라고 합니다.”
말을 잇는 박태봉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찰칵거리는 카메라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저는… 얼마 전 있었던 성명병원의 불법 장기수술 사건, 그 집도의 중 한 사람입니다.”
TV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박태봉의 말에 사람들이 너나없이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저, 저런 천벌 받을 개새끼.”
“아니, 그런데 저 양반은 어떻게 안 들키고 있었데? 벌써 콩밥 처먹어야 할 양반이…….”
“뭐 뒷배가 있지 않겠어? 저 호래새끼, 저거!”
온 세상이 경악하고 있을 때, 박태봉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스피커를 타고 세상에 울려 퍼진다.
“믿기지는 않으시겠지만… 저는 자수를 하고 싶어,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냥 가까운 경찰서로 갔어도 되었지만… 꼭 세상에 알려야 할 것이 있어 이렇게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박태봉이 꿀꺽 하고 한차례 침을 삼켰다.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박태봉이 마침내 품 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A4 크기의 종이를 몇 번이나 접었는지, 떨리는 손동작으로 연신 그 종이를 펴낸 박태봉이 이내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종이에는, 불법 장기수술을 의뢰한 수요자들. 다시 말해, 국내 유력 권력자들이 모두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카메라 소리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새끼들!”
“한번 들어나 보자고! 어떤 개호래놈이 지 새끼 살리자고 그따위 천벌 받을 일을 꾸몄는지!”
“공개해라! 공개해라!”
대한민국이 또다시 욕설로 뒤덮이고 있을 때.
마침내 박태봉의 입에서 수십 명의 사람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전직 장관은 물론, 현직 국회의원에,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기업 대표이사, 군 고위 장군까지.
이날의 대한민국은…….
또 한 번 분노의 파도가 물결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