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잡는 회귀검사-80화 (80/174)

80화 재개발단지

“고생했어. 역시 건우 니 일 처리가 가장 마음에 들어.”

오춘화 회장이 흡족한 미소로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도련님 공이 컸습니다.”

“누구, 오성춘이?”

짐짓 인상을 찌푸린 오춘화 회장이 되묻자 박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기도 말이 있어야 둘 수 있으니까요.”

“…오성춘이, 그 쓸모없는 놈이 장기짝 노릇은 제대로 했나 보군.”

‘아차!’

오춘화 회장의 목소리가 묘하게 변한 것을 느낀 박건우가 속으로 아차 했다.

회사에 대한 욕심이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인물.

더불어 자신의 핏줄에 대한 자부심도 그에 못지않게 엄청난 사람이 바로 눈앞의 오춘화 회장이다.

그 사실을 상기한 박건우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제 말은…….”

순간 오춘화 회장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뭘 그렇게 긴장하나?”

“…예?”

“장기짝 노릇조차 제대로 못 하던 놈 아니냐? 그게 좀 놀라웠을 뿐이야.”

“…….”

입을 다문 박건우를 잠시 바라보던 오춘화 회장이 말을 잇는다.

“…건우야.”

“예, 회장님.”

부동자세로 대답하는 박건우를 오춘화 회장이 믿음직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나는 너를 내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

“명성은… 누구든지 주인이 될 수 있다. 아무리 내 친자식이라도, 나는 그 자격조차 되지 않는 놈에게 이 회사의 시멘트 가루 한 톨도 물려줄 생각이 없다.”

“…….”

“내 회사, 명성이 지금 이곳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너라면 잘 알고 있지 않느냐?”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던 박건우가 주먹을 꽈악 움켜 쥐었다.

굳이 오춘화 회장이 뒷말을 하지 않아도, 지금의 명성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어 왔는지, 박건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민족 내부의 최대 비극 중 하나인 6.25 전쟁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황폐화된 국토를 복구하는 데 한창 주력하고 있을 당시.

자신의 할아버지와 눈앞의 오춘화 회장은 고작 삽 한 자루만 가지고, 그 전쟁의 불씨가 채 꺼지지 않은 땅들을 파내고, 건물들을 쌓아 올렸다.

전쟁의 여파로 먹을 게 부족해, 아사(餓死)하는 사람들이 수십만도 훌쩍 넘던 시절이었다.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 가며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하는 극에 달한 굶주림 속에서도, 두 사람은 ‘젊음’이라는 무기 하나만 가지고 꿋꿋이 버텨 냈고, 작은 시멘트 회사로 시작해 결국 지금의 명성에 이르렀다.

물론, 그 과정에서 회사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어려웠던 순간도 많이 있었다.

그런 순간들을 눈앞의 오춘화 회장은 회사와 함께 겪어 온 것이다.

회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 또한 그 유명한 일화들은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기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박건우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 회장님이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멍한 표정을 짓던 오춘화 회장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건우 너는 너무 진지해서 재미가 없단 말이지.”

작게 중얼거린 오춘화 회장이 힐끗 TV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네모난 스크린 안에서는 한창 ‘전 성명병원 의사의 양심고백’이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기력이 아주 좋군. 배우 선정이 훌륭했어. 박태봉이라… 자리에 맞지 않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언젠가는 처리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꿩도 먹고, 알도 먹게 되는군.”

손가락으로 잠시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오춘화 회장이 묻는다.

“지금부터가 적기인 것 같은데… 일은 시작했나?”

“예. 이미 도련님이 직접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성춘이가 직접…….”

박건우의 뒷말을 따라하던 오춘화 회장이 작게 미소 지었다.

“뭐, 나쁘지 않군. 건우 니가 마지막까지 잘 도와줘.”

“알겠습니다, 회장님.”

박건우가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TV 속 박태봉의 입에서 마침내 장기밀매 리스트가 전부 폭로되었을 때.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 봐라.”

오춘화 회장이 한층 짙어진 미소를 지은 채, 누군가에게 말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 * *

일산 신도시 얘기가 한참 나오고 있는 재개발 단지.

한쪽에서는 건물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시장 장사에 여념이 없었다.

재개발 얘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10평이 채 되지 않는 구멍가게에서 안 파는 물건이 없는 아저씨부터,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고추, 마늘 따위를 팔고 있는 할머니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 도시 안의 작은 시장에서 생업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자, 자! 오늘 삼겹살 쌉니다! 목살도 싸요!”

“고등어 한 마리 천 원! 한 마리 천 원에 줍니다!”

“새댁! 부추 한 단만 사 가. 오늘 부추가 아주 싱싱해. 한 번 도와줘, 응?”

그 외에도 트럭에 물건을 싣고 있는 아저씨부터, 가족들의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나온 아주머니,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시장에,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일단의 무리가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응?”

가장 먼저 그 무리를 발견한 정육점 김씨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인 직장인들이라면 한창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을 이 시간에, 어림잡아도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일시에 나타났다.

“…뭐야, 저 사람들은?”

하나같이 덩치깨나 있는 사람들이, 빠짐없이 새하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자못 위압감까지 줬다.

김씨가 순간 알 수 없는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 때, 마침내 일정 지점에 그 무리가 모두 모여들었다.

“싹 쓸어버려. 말로 해서 안 듣는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라고.”

가장 선두에 선 젊은 남자가 마스크 뒤로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작게 중얼거리자 뒤에 버티고 선 무리들이 일시에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저벅.

지지직, 지지직.

백여 명의 남자들이 한 번에 움직이는 것만 해도 충분히 위압적이었는데, 남자들의 손에는 각목, 야구방망이 등 충분히 흉기가 될 만한 물건들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순식간에 주변에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시장에 있던 몇몇 사람이 마른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그 순간.

가장 먼저 시장 입구에 도착한 선두의 남자가 손에 쥔 야구방망이를 상가 유리창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와장창!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유리창이 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삽시간에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상가 안쪽 방에 있던 아저씨가 부리나케 뛰쳐나왔다.

“너, 너 이 새끼! 이게 무슨 짓이야!?”

깨어진 유리창과 마스크를 쓴 정체 모를 남자의 손에 쥐어 진 야구방망이.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아저씨가 격분하여 고함쳤다.

“야, 인마! 너 뭐냐고! 뭔데 남의 집 유리창을 막 부수냐고! 어!?”

자신의 멱살을 와락 틀어쥐는 중년 사내를 보며, 유리창을 깬 남자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거 씨발, 그러니까 적당히 보상금 준다고 할 때 나갈 것이지, 욕심은…….”

“뭐, 뭐라고?”

“분에 맞지 않는 과욕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내가 보여 줄게.”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남자가 눈앞에 있는 중년 사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으윽…….”

멱살을 쥐고 있다가 부지불식간 손목을 틀어 잡힌 중년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순간.

우드드드득.

마치 뼈가 부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시장 내에 울려 퍼진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털썩!

기이한 각도로 꺾인 손목을 보며, 중년 남자가 비명을 지르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끔찍한 모습에 또 한 번 여자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미, 미친 깡패 새끼들……!”

“도, 도망가요! 도망가!”

“신고해, 빨리!”

시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그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던 선두의 남자가 힐끗 옆을 바라본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파악!

남자가 할머니 앞에 놓여 있던 바구니들을 걷어차자, 그 안의 내용물들이 쏟아졌다.

“할망구, 다치기 싫으면 물건 가지고 빨리 사라져. 그리고…….”

남자가 뒤를 힐끗 바라보며 외친다.

“다 때려 부숴! 돈도 받고, 스트레스도 풀고! 마음껏 날뛰자!”

“와아아아아아아!”

사내의 말에 뒤에 밀집해 있던 무리들이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뛰쳐나갔다.

콰직!

쨍그랑! 와장창!

뿌드드드드득!

물건을 팔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가판대, 유리창, 바구니와 의자들…….

누군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건들이, 사내들의 손에 의해 모조리 부서져 나갔다.

일부 사내들은 빨간 락카를 들어 건물 벽면 곳곳에 분사했다.

해골 그림을 그려 넣는다든가, 죽인다든가 하는 살벌한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써 내려가는 사내들.

그런 모습들을 가장 후미에 있는 젊은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용역 깡패들이 일 처리도 화끈하게 하는군요.”

“뭐, 나쁘지 않군.”

옆에 있던 덩치의 말에 짧게 대답한 젊은 남자가 마스크를 벗어던지자, 이내 그 얼굴이 드러났다.

날카로운 인상에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미소가 아주 잘 어울리는 20대 중반의 남자.

오성춘이었다.

“조금 더 서두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위쪽에서야 지금 그 일로 정신없을 테지만, 경찰들은…….”

“짭새들은 걱정할 것 없어.”

“예?”

“한잔하고 오라고 적당히 꽂아 주고 왔거든. 이쪽 서장하고도 얘기가 잘됐고.”

“아…….”

손뼉을 짝 하고 친 남자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 이 소식을 들은 경찰도 이곳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신호위반 딱지를 피하기 위해 상의 주머니에 찔러주는 만 원짜리 몇 장에도 헤벌레 하고 입을 벌리는 시대였으니까.

“기자회견 끝나고 나면 지들끼리 질문하고 답변하고, 난리도 아닐 거야. 우리는 그 전에 치고 빠진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고작 이 한 번으로 여기 있는 소상인들이 이곳을 쉽게 포기할지, 저는 그게 걱정입니다.”

남자의 말에 오성춘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일을 위해 저기 전문가들을 비싼 돈까지 얹어 줘 가며 데려온 거잖아.”

오성춘이 턱짓으로 한창 물건을 때려 부수고 있는 용역 깡패들을 가리켰다.

“장사 밑천이 거덜 날 때까지 부수고, 또 부수면, 제 놈들이라고 별수 있겠어? 윗대가리들, 이번 일 수습하려면… 시간도 넉넉하고 말이야.”

“역시, 대단하십니다.”

남자가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추켜세웠다.

“큭큭… 이번 건으로 자금을 확보하고, 명성은 다시 재도약한다. 그리고…….”

잠시 말끝을 흐리던 오성춘이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으득 이를 갈았다.

“이번에는 기대해도 좋을 거야.”

오성춘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스르륵.

한참 물건을 부수고 있는 무리 사이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무리를 이탈했다.

잠시 눈치를 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내가 이내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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