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모조리 쓸어버려
“…다시 한 번 얘기해 봐.”
도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박판섭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감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
“아니. 나한테는 이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어. 그러니까, 얘기해. 정말, 전국에 있는 조폭들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려고 했던 사람이…….”
잠시 말끝을 흐리던 도윤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묻는다.
“…명성의, 오춘화 회장이 맞나?”
“…그래. 맞다.”
박판섭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흘러나오자, 도윤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영감님도 잘 알겠지만, 범죄와의 전쟁. 그러니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혼란한 시기를 새 질서로 바로잡는다는 취지로, 우리 같은 깡패들을 전면적으로 소탕할 것을 천명했어.”
“…….”
“그 결과 전국에 있는 조직들이 음지로 숨어들었고, 그걸 계기로 오춘화 회장도 굳이 이쪽 바닥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면서, 전국의 조직을 발아래에 두겠다는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박판섭이 도윤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이쪽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그때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말하곤 해. 만약 그때, 대통령이 그런 선언을 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전국의 조직이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오춘화에 의해서, 말이지?”
도윤의 물음에 박판섭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 회장 정도 되는 인물이, 굳이 조폭들을 하나로 묶어 발아래에 두려고 했던 이유가 뭐지?”
도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윗사람들의 생각이야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알 수가 있나?”
“…….”
“하지만, 짐작하지 못할 것도 없지.”
도윤이 얘기해 보라는 듯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박판섭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우리나라 정치. 그 과거를 들여다보면 우리 깡패들과 따로 떼어 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어. 조선시대 후기 도진회사부터 그 역사가 쭉 이어져 왔으니까.”
“…….”
“광복 이전,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시절의 깡패들을 1세대 주먹들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이때 그 유명한 김두한이 등장하여 정계에 진출하면서 정치깡패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지. 물론, 본격적으로 이 정치깡패들이 활동하기 시작한건 6.25 전쟁 이후지만.”
“조폭들의 본격적인 정치 개입은 2세대 때부터였으니까.”
도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판섭의 말을 받았다.
“역시 잘아네. 2세대 주먹들이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역사상, 깡패들의 최전성기였어. 이정재와 임화수, 유지광뿐만 아니라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많이 등장했고, 그에 못지않은 역사적인 사건들도 많이 발생했지. 사사오입이나 자유당 창당 반대나 하는…….”
“결론이 뭐야?”
“성격도 급하군.”
낮게 웃음을 터뜨린 박판섭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말을 잇는다.
“조양은이나 김태촌을 포함한 3세대 주먹들. 그 세대 사람들이 군부 정권 아래, 삼청교육대에서 모두 죗값을 치르면서 정치권에서 우리 같은 조폭들이 사라지나 싶었는데, 여전히 활개를 치고 다녔지. 그래서 90년도에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거고. 그런데… 과연 정부의 그런 정책들로 우리 같은 잡초들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었을까?”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도윤을 보며 박판섭이 씨익 웃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나는 영감님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 못했겠지. 당장 최근만 봐도, 87년 용팔이 사건, 94년 슬롯머신 사건, 98년 서울역 집회 방해 사건. 수없이 많은 곳에 나 같은 놈들이 얼굴을 내비치고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
“재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정계 인사들, 수많은 권력자들이 이용하기 가장 좋은 도구. 그게 바로 우리 같은 깡패들이야. 그리고, 그런 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모두 수집하려고 했던 오춘화 회장은…….”
“…음지의 제왕이 되고 싶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박판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중심이 되어, 주먹이 필요한 곳에 직접 보급하는… 그래, 중개자.”
“……!”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수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음은 물론, 여러 권력자들의 약점도 틀어쥘 수 있을 테니까. 뭐, 그 늙은 여우가 그 약점으로 누군가와 맞설 생각은 하지 않을 테고… 아마 서로 신뢰의 증표로 비즈니스에 활용했겠지.”
“…마치 양파 같군. 까면 깔수록 새로워. 대단한 늙은이야.”
도윤이 입을 앙다문 채 중얼거렸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도윤이 고개를 들어 박판섭을 바라본다.
“탑 파이브라는 거, 지금도 그대론가?”
박판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영남 쪽은 우리 20세기 파가 거의 다 먹었어. 공구리파, 즉 망치파는 완전히 해체되었고, 육성파도 세가 많이 죽어 사업장이 대부분 우리 쪽으로 넘어왔거든. 사실상 해체 수준이야. 대조직이라 할 만한 곳은 이제 호남의 구상사파와 서울의 양동이파, 동방파밖에 남지 않았어.”
“…그중에서 가장 세가 큰 곳은?”
도윤의 물음에 박판섭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대충 엇비슷하긴 한데… 그중에서는 구상사파가 가장 세가 강할 거야. 수십 년 동안, 호남 지역의 독보적인 절대자였으니까. 특별한 경쟁자 없이 그동안 쌓아 놓은 힘과 자본이 상상을 초월하겠지.”
“…….”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 고민하던 도윤이 묻는다.
“…오 회장의 꿈, 우리가 이뤄주면 어떨까?”
“…뭐?”
박판섭이 멍하니 반문했다.
“우리가 전국에 있는 모든 조직을 통합한다.”
“……!”
박판섭의 두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 그게 무슨 개소리…….”
“물론, 음지의 제왕, 그 초대 보스는 바로 니가 되겠지.”
“…….”
무언가 말하려던 박판섭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 거대한 망치파도 대부분 다 집어삼켰다. 내부 안정기만 잘 거치면, 헛된 꿈만은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
박판섭이 멍하니 도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진심인가?”
“내가 농담할 성격으로 보여?”
도리어 되묻는 도윤을 보며, 박판섭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박판섭이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저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건지…….”
“천재의 머리를, 범인이 이해하려고 하지 마.”
“…….”
또 한 번 멍한 표정을 짓던 박판섭이 말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하늘을 뚫고 나갈 기세들이란 말이지.”
“…….”
“나야 그런 젊은이들의 자신감을 좋아하지만…….”
씨익 미소 지은 박판섭이 도윤에게 말한다.
“제대로 준비 한번 해 보지. 세부적인 작전 회의는 조만간 새로 날 잡아서 하기로 하고…….”
말끝을 흐리던 박판섭이 힐끗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으로 시선을 던졌다.
“재개발단지 건은 어떻게 할 거야?”
“몰랐다면 모를까. 내가 알게 된 이상, 저건 문제도 아니지.”
이후로 도윤의 설명이 이어지자, 시간이 지날수록 박판섭의 미소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 * *
이튿날, 일산 재개발단지 인근의 공터.
“다 모였나?”
선두에 선 오성춘의 물음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곧바로 대답한다.
“예. 1차 집결 인원이 정확히 103명이었는데, 소식을 들은 다른 조직들에서도 인원을 많이 보내, 이제는 200명에 육박합니다.”
“흠…….”
“그동안 보상금 문제로 저울질하던 지역 주민들이, 첫 번째 공사만으로 약 30퍼센트는 빠져나갔습니다. 장기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공사를 마무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좋군.”
사내의 말에 오성춘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공사가 마무리되면,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지?”
“지금부터 일주일간은 아침, 저녁으로 나눠, 매일 2번씩은 공사를 할 겁니다. 강도를 서서히 높여 나갈 것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눈에 보일 만한 대책을 내어놓지 않으면 아마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60퍼센트 이상은 빠질 거라 생각합니다.”
“2일 차에 30퍼센트인데, 1주일에 60퍼센트라…….”
오성춘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이렇게 단기간에 이 정도나 되는 인원들이 빠져나간 것만 해도 엄청난 겁니다. 즉각적인 보상 대책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죄송합니다.”
눈치 빠른 남자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남자의 숙인 뒤통수를 바라보던 오성춘이 말한다.
“싹이 보이는 종자들의 명단은 뽑아 놨나?”
오성춘의 물음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10퍼센트가 채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론, 가족 관계는 물론 직장지에 자식들 학교까지, 모두 파악해 뒀습니다.”
“그건 잘했군.”
짧게 중얼거린 오성춘이 몸을 돌렸다.
200명은 넘는 인원이 한 번에 모여 있으니, 그 넓은 공터가 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하나같이 새하얀 마스크에 손에는 야구방망이나 쇠 파이프 따위를 쥐고 있는 사내들의 모습에 오성춘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준비 끝난 것 같군. 공사, 시작해 볼까?”
오성춘의 말에 옆에 있던 사내가 큰 소리로 외친다.
“공사!!!!! 시작!!!!!”
“시작!!!!!!!!!”
사내들이 일제히 외치는 소리가 공터 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가자!!!!!!”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대인원이 한 번에 움직이자, 그에 따른 흙먼지마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오자, 사내들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응?”
선두에서 한참 무리를 이끌던 남자가 순간 멈칫한다.
이쯤 되면 시장의 특성상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와야 정상인데, 주위가 너무 조용했다.
“…왜 아무도 없지?”
“큭큭큭. 할망구들, 첫날에 벌써 겁먹고 다 도망친 거 아닙니까?”
“아니, 가게까지 비우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거리에 있는 상가 건물 벽면 여기저기에, 욕지거리로 도배가 된 락카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이, 아무래도 가게 주인들이 자리를 비운 듯했다.
저녁 6시.
한창 퇴근을 마치고 장을 보러 나오는 사람들이 많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뭐, 저희야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공사도 시작하기 전에 알아서 사라져 준다면, 그거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
파앗!
사내가 말을 잇던 그 순간, 삽시간에 사방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으윽…….”
“뭐, 뭐야!?”
“눈부시다고, 씨발!!!!”
수백 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일제히 눈살을 찌푸렸다.
“아, 아. 빌어먹을 깡패 새끼들아, 내 말 들리나?”
그때,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메가폰을 타고 재개발단지 내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수고스럽게 한자리에 모여 주신 깡패분들을, 지금부터 내가 손수 경찰서로 연행할 예정인데, 괜찮지?”
순간 가장 후미에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오성춘이 눈을 번쩍 떴다.
이 목소리.
분명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강도윤……!”
으득 하고 이를 간 오성춘이 씹어 내뱉듯 중얼거렸다.
“부탁드립니다, 서장님.”
도윤이 옆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짧게 고개를 숙이자, 옆에 서 있던 대머리 중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사내의 양쪽 어깨 위에는 속칭 말똥 4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체포해.”
중년 사내의 한마디에 라이트를 비추고 있던 경찰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