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잊고 있던 무언가.
“…검사님?”
“예? 아, 예.”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도윤이 앞에서 부르는 남자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 도윤이 있는 곳은, 도윤에게, 아니 정확히는 회귀 전 도윤에게 매우 익숙한 곳이었다.
도윤이 힐끗 책상 위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형사2팀 천병서’라는 명패가 한눈에 들어왔다.
약 한 달이라는 기간을 꼬박 병실에만 누워 있다가, 몸이 어느 정도 치료되고 퇴원함과 동시에 이곳으로 끌려오다시피 한 참이었다.
“아직 몸이 많이 불편하신 건 알고 있지만… 이게 전국적으로 방송을 탄 일이다 보니, 저희도 수사가 빨리 마무리되는 대로 검찰에 넘겨줘야 하거든요. 물론 검사님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도윤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천병서가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타닥, 타다다닥.
“원래 차량 사고 같은 경우는 교통사고 조사계에서 수사하는 게 원칙이지만… 총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시신이 한 구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 부분까지 제가 전부 조사할 예정입니다. 뭐, 기본적인 조사는 전부 끝났으니, 중요한 부분 몇 가지만요.”
키보드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병서가 머리를 들어 도윤을 바라보며 묻는다.
“먼저… 일산 재개발단지의 주동자인 명성그룹의 오성춘 씨. 그 사람의 뒤를 검사님이 쫓았고, 현장인 야산에 이르러 결국 뒤를 잡는 데 성공했다. 여기까지는 저희 서장님을 포함하여, 본 사람들이 제법 되기에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문제는…….”
잠시 말끝을 흐리던 천병서가 말을 잇는다.
“그 이후. 사실 야산에 CCTV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목격자도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검사님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거든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예.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자세히 여쭤보려고 하는데…….”
천병서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서류 더미를 도윤의 앞에 올려놓았다.
당시 현장의 처참했던 상황들을 사진으로 담아 첨부한 수사 서류들이었다.
“오성춘 씨가 소지하고 있던, 현장에서 발견된 45구경 권총.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또 한 번 총을 사용했고, 운전대를 잡고 있던 김성만 씨의 머리에 명중, 김성만 씨는 그대로 즉사했죠. 직후 두 차량이 충돌했고, 그 충격으로 오성춘씨가 타고 있던 차량이 낭떠러지로… 말씀해 주신 대로 정리한 건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총상으로 사망한 김성만 씨를 제외하고, 이 사고로 같은 차량에 타고 있던 나머지 일행분들도 경추부에 큰 충격을 받아 사망… 벨트를 착용하고 있던 검사님은 가까스로 차량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고…….”
“…….”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불에 타다 만 검은색 승용차량과 그 안에 누구 것인지 모를 남자의 손.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현장에 남겨진 스키드 마크나 흔적들로 봤을 때 검사님의 말씀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지만… 한 가지 가장 큰 의문점이 있습니다.”
천병서의 말에 도윤이 멍한 눈을 들어 그 두 눈을 바라본다.
“아무리 재개발 단지에 용역 깡패들을 투입한 주동자가 오성춘 씨라고 하지만… 그렇게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필사적으로 도망칠 이유가 있었을까요?”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도윤을 보며 천병서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을 잇는다.
“제 생각에 오성춘 씨. 아니, 명성의 힘이라면 그 정도 일쯤은 충분히 덮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법적으로 소지가 금지된 총기까지 사용하는 리스크를 안고, 그렇게 도망가려 했다는 게 이해가 잘…….”
천병서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건설사를 끼고 있는 대기업들이 재개발단지에 용역 깡패를 투입하는 방식 따위는 이쪽 바닥에서 오래전부터 있어 온 관행 중 하나였다.
설령 그 사실이 세상에 밝혀지더라도, 대기업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요리조리 빠져나가곤 했다.
그 정도 힘쯤은 충분히 있는 집단이었으니까.
그런 집단에 속해 있는 오성춘은 더군다나 회장의 직계 핏줄이다.
도망?
재벌이라는 족속들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최소한 천병서가 지금까지 겪어 온 재벌이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그랬으니까.
“오성춘…….”
도윤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천병서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놈은… 정말 죽었습니까?”
도윤의 물음에 천병서가 멈칫한다.
“…혹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십니까?”
천병서의 물음에 잠시 멈칫한 도윤이 쓰게 웃으며 대답한다.
“사시 동기입니다.”
“아……!”
이내 천병서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던 천병서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오성춘 씨 같은 경우 다른 사람과 달리 즉사는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희미하게 호흡은 있었거든요.”
순간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안타깝지만…….”
천병서가 말끝을 흐리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희 직원이 담당 의사를 직접 만나 봤습니다. 중환자실로 이송되고, 치료를 담당한 의사의 말로는… 전혀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장기 손상이 상당히 심해,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하더군요. 치료에 전념해야 하는 시점이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
순간 눈을 빛낸 천병서가 도윤을 바라본다.
“그래서 검사님의 도움이 더 절실합니다. 지금 저희가 사건 경위를 파악할 방법은, 검사님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이내 침묵을 지키던 도윤이 입을 열자, 천병서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특별히 보이는 범죄 혐의도 없고, 내부적으로는 내사종결 처리하는 걸로 얘기가 된 상태지만… 검찰 쪽에서 어떻게 판단할지는 또 모르니까요. 도와만 주신다면 이중으로 귀찮으신 일 발생하지 않도록, 깔끔하게 처리해서 서류 넘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드리죠. 그럼…….”
이윽고 사무실 내부에 키보드를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바스락.
작은 소음과 함께 오춘화 회장의 손에 쥐어져 있던 종잇장이 완전히 구겨졌다.
박건우가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될 것 같다며 건네준, 의사의 소견서였다.
잠시 깊게 심호흡하던 오춘화 회장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세상은 자신을 철혈의 거인,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평가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회사 경영 부분에 있어서만.
모든 것을 회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성격 탓에, 그렇게 알려졌을 뿐이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오춘화 회장은 회사에 대한 정만큼이나 혈육에 대한 정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혈육이 죽었다.
아직 사망 확정 진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현 상태로 봤을 때, 죽은 것으로 봐도 무방했다.
내심으로 후계자로 점찍어 둔 아이였다.
간혹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놈은 핏줄 중 젊은 시절의 자신과 가장 닮아 있는 놈이었다.
항상 시꺼먼 속내를 품고 있는 것부터,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남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성격까지.
흔히 말하는 있는 집 자식으로는 드물게 사시까지 패스한 인재였고 말이다.
그래서 다른 놈들보다 더 엄하게 대했다.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준다고, 다른 놈들에게 당근을 던져 줄 때에도 유독 놈에게만은 심하게 채찍질했다.
그 재능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명성의 주인까지 넘볼 수 있는 놈이었는데…….
상념을 털어 낸 오춘화 회장이 일그러진 얼굴로 책상 위를 바라본다.
박건우가 가지고 온 또 다른 보고서.
A4 용지가 빼곡이 들어찰 정도로 정리된 보고서에는 한 인물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단 우측에 붙어 있는 남자의 사진은, 분명히 도윤의 얼굴이었다.
“저 보고서… 확실하나?”
“…예, 회장님.”
오춘화 회장의 물음에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던 박건우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결국 오성춘이를 완전히 망가뜨린 인물이, 저기 있는… 강도윤이라는 놈이란 말이군.”
“…….”
박건우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지금 오춘화 회장의 상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산과 같았다.
그것도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
그런 오춘화 회장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고 있다.
아니, 이미 찾았다고 표현해야 옳다.
박건우의 예상대로라면, 지금 그 분노의 대상이 된 강도윤이라는 인물은…….
더 이상 이 나라에 제대로 발을 붙이고 있기 힘들 것이다.
고작 평검사 한 명 따위는 쉽게 찜 쪄 먹고도 남을 힘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의 주인이자 명성의 주인인 오춘화 회장이었으니까.
“…지금 이 시간부로 이놈에게 정보부 애들 24시간 감시 붙여.”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형식적인 보고서 말고, 제대로 된 보고서. 최대한 빨리, 내 눈앞에 가지고 와.”
아마 오춘화 회장은 기본적인 신상명세서뿐만 아니라, 가족은 무얼 하고 있는지, 숨은 조력자는 누구인지, 그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것이리라.
곧바로 이해한 박건우가 재빨리 대답한다.
“초등학교 때 짝궁이 누구였는지까지… 확실히 조사해 올리겠습니다.”
박건우의 말을 한 귀로 흘린 오춘화 회장이 서늘한 눈빛으로 책상 위의 사진을 바라본다.
“강도윤…….”
씹어 내뱉 듯 중얼거린 오춘화 회장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도윤이 있을 법한 방향을 바라본다.
“명성을 건드린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 주마.”
오춘화 회장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도윤이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단 며칠 사이 수년은 훌쩍 흐른 듯한 느낌이었다.
많은 일들이 한 번에 덮치니,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지금 TV에서는 한참 이번 일산 재개발 단지 사건에 대한 얘기가 보도되고 있었다.
명성에서는 오성춘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고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지만, 그따위 얘기가 통할 리가 없다.
이미 국민들 대부분이 이번 사건의 배후가 명성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명성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대형 컨벤션 센터 신도시 계획은, 아마 이대로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이 기세를 몰아, 명성이라는 악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 내야 하건만, 도윤의 마음 한구석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토록 자신을 방해하던 오성춘이 그리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아니야.’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런 류의 공허함이 아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아마도…….’
바로 옆자리에서 자신을 도와주던 조력자가 머리에 구멍이 뚫려 즉사했다.
뿐만 아니라 박판섭의 손발이 되어, 실질적으로 자신의 일을 돕던 다른 망치파 조직원들도 모두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낱 주먹이나 휘두르는 깡패들이기 때문이라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애초에 박판섭이라는 인물을 이토록 가까이 두지도 않았다.
그저 딱 필요한 만큼만 이용했으면 될 뿐이었으니까.
‘확인해 봐야 한다.’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도윤의 두 눈은 초점을 되찾았고, 알 수 없는 기묘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던 도윤이 순간 멈칫한다.
“그 전에…….”
작게 중얼거린 도윤이 힐긋 책상 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도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꿈에서 등장한, 일반 주사위보다 10배는 더 커 보이는 거대한 주사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도윤이 이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주사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양손으로 주사위를 꽈악 움켜쥔 도윤이 그대로 바닥을 향해 주사위를 던졌다.
그와 동시에.
번쩍!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빛이 도윤의 방 안을 뒤엎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