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벌써 일 년
“…왔나?”
창가에 위치한 침대.
의자식으로 접은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햇살을 내리쬐고 있던 박판섭이 출입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막 병실에 들어서던 도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온다.
저벅, 저벅.
박판섭의 안정을 위해 준비된 VIP 전용 1인실이었기 때문에, 병실 내부에는 도윤이 걸음을 옮기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뭐야? 왜 오자마자 무게 잡고 계실까? 사람 불안하게스리…….”
“몸은 좀 괜찮나?”
도윤의 물음에 박판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빨리도 물어보시네.”
“뒤처리하느라 이리저리 정신이 없었네… 미안하다.”
“그야 뭐…….”
곧바로 저자세로 나오는 도윤을 보며 박판섭이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놀려 줄 생각이었는데, 도윤이 워낙 무게를 잡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박판섭이 심각한 얼굴로 도윤을 향해 물었다.
잠시 박판섭의 얼굴을 바라보던 도윤이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날… 왜 날 구해 줬지?”
“뭐?”
갑작스러운 도윤의 물음에 박판섭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나는 깡패들이 말하는 의리라는 말은 믿지 않아. 앞에서는 오장육부를 다 꺼내 줄 것 같이 손바닥을 비벼 대는 놈들이, 돌아서면 등 뒤에 칼을 꽂는 것을 수없이 많이 봐 왔으니까.”
“…….”
“가면. 놈들은 항상 활짝 웃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 가면 뒤에 지독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속에는 칼을 품고 있으면서…….”
말을 잇던 도윤이 박판섭의 두 눈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그래서 나는 깡패 놈들을 믿지 않아. 언제 뒤통수를 맞아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냥 서로 필요한 부분만 이용하는, 딱 그 정도의 관계. 물론… 너를 포함해서.”
도윤의 말에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판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좀 섭섭한데. 내가 영감님이랑 알고 지낸 세월이 벌써 몇 년인데…….”
“어쩔 수 없어. 난 날 때부터 그렇게 난 놈이니까.”
“뭐, 영감님 성격을 탓하려는 건 아니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박판섭을 보며 도윤이 묻는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도윤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박판섭을 부르는 호칭이 ‘너’에서 ‘당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
“검사와 깡패의 관계. 검사는 합리적인 선에서 깡패들에게 적당히 손을 빌려주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깡패들은 검사가 필요할 때, 그의 일시적인 도구가 된다. 그게 반복되어 검사와 신뢰 관계를 형성되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깡패들에게는 큰 힘이 되지 않나. 생각보다 검사와 물고를 튼 깡패들은 많지 않으니까.”
“영감님이 말하고자 하는 게 이쪽 바닥의 섭리, 뭐 그런 거라면… 그 부분에 대해 부정할 순 없군.”
“역시…….”
아무런 표정이 없던 도윤의 얼굴 위로 어떤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희미한 미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씁쓸해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 안심하는 듯한 느낌도 주었다.
그런 도윤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박판섭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영감님은 한 가지, 잊고 있는 게 있어. 아니, 영감님의 지금 나이를 생각하면… 모르고 있다는 표현이 맞는 건가?”
“……?”
순간 멈칫한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나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가방끈이 상당히 짧지만 그만큼 남들보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어. 자랑은 아니지만 말이야.”
“…….”
“싹이 보이는 놈들은 학교 다닐 때부터 조직에서 스카우트해 간다느니, 그런 얘기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박판섭이 계속 말을 잇는다.
“뭐 피로 맺어진 혈연과 빽? 그런 얘기들 하는데, 적어도 이쪽 바닥에는 그런 거 없어. 어느 미친 부모가 자기 자식까지 이따위 밑바닥 인생을 살게 만들고 싶겠어? 남들 피눈물 흘리게 만들어서 번 돈으로, 지 새끼 사짜 직업 물려주고, 남들한테 대접받게 하고 싶어들 하지.”
“…….”
“아무튼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고, 그렇게 처음 사회에 나와서 안 해 본 일이 없었지. 주유소도 해 보고, 노가다에, 찹쌀떡 팔이… 나름 자그마한 곳에 들어가 회사 생활도 해 보고 말이야.”
이 부분에서 도윤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
만약 박판섭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참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다가 특정 사건을 계기로 조직에 투신하여, 지금 이 위치까지 올랐다는 말이다.
그것도, 아무것도 쌓아 둔 것도 없이, 오직 주먹 하나로만.
이쪽 바닥의 습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도윤이었기에, 그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생활과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가 느꼈던 가장 큰 차이점이 뭔지 아나?”
“…뭐지?”
“인간관계.”
“…….”
“죽이 맞으면 쟤도 친구, 얘도 친구.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순수하게 휘젓고 다니던 학창 시절과 처음 시작한 직장 생활은 너무도 달랐어. 상사라는 이름으로 욕지거리나 손찌검이 날아오는 건 예사였고, 입사 동기라는 놈들은 앞에서는 친한 척, 뒤에서는 어떻게든 깎아내리기 바빴지. 내가 고꾸라지면, 인사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바로 그놈들이었으니까.”
“…….”
“동기라는 이름의 경쟁자. 하기야, 이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경쟁이라는 말은 인생에 있어 숙명과도 같은 것이겠지.”
말을 잇던 박판섭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우중충한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미안해. 아무튼… 뭐, 그런 거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어. 내 나름대로 만족할 정도로 높은 곳까지도 올라가 봤지. 자연스럽게 주위에 사람들도 많이 생겼고. 그런데…….”
“…….”
“나중에 돌아보니, 곁에 정말 많은 사람이 생겼는데, 내 사람이라
생각이 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더라고. 전부 나에게 무언가 원하는 게 있어서 접근할 뿐이었지. 내가 이 자리에서 내려가면, 당장 떨어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들.”
“너무 당연한 얘기를, 너무 심각하게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군.”
“…응?”
박판섭이 멍하니 반문했다.
“애초에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 사회생활을 하며 만난 사람들을 같은 선상에서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멍하니 도윤을 바라보던 박판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로 치면 아들이나 조카뻘 정도밖에 안 되는데, 너무 찌들 대로 찌든 것 아닌가?”
“…….”
“내 생각을 묻는 거라면, 나는 그게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아.”
“무슨…….”
“알게 된 계기나 환경만 다를 뿐, 똑같이 두 발 달린 사람을 만나고 사귀어 가는 건데, 다를 건 또 뭐가 있나?”
도윤이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박판섭이 재빨리 말을 잇는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회사를 그만뒀네.”
“…뭐?”
“세상에 직접 보여 주고 싶었거든. 이 각박해진 사회에서도, 아무런 목적 없이, 마음만 맞으면 서로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인간관계를.”
“…….”
박판섭이 옅게 미소 지었다.
“여기서 내가 조직에 투신하게 된 얘기까지 하게 되면, 밤을 새도 부족하니 이쯤 하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니, 다시 하나둘, 내 곁에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더라고. 이번에는… 진짜 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들 말이야.”
“…….”
“영감님을 구해 준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
박판섭의 물음에 도윤이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박판섭도 분명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만약 회귀 전 자신이었다면, 고작 저따위 생각으로 직장까지 그만둘 수 있었을까?
확고한 생각과 소신.
그런 게 있었다면 못 그만둘 것도 없지만, 자기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여동생을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선택이다.
박판섭이 도윤을 마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사람이 사람을 사귀는 데 이유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마찬가지로…….”
“…….”
“내 눈앞에서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그 사람을 구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
“진심으로 다가서면 언젠가는 반드시 상대방의 마음도 열린다. 그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고, 나는 그저 그 소신껏 행동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왜 영감님을 구했냐느니, 그런 정 없는 질문은 하지 말라고. 무슨 이유나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
어느새 도윤의 얼굴 위로 잔잔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씨익 미소 지은 박판섭이 마지막 말을 잇는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영감님.”
“…….”
고요한 침묵 속에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두 사람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그 기분 좋은 햇살에 옅게 미소 지은 도윤이 입을 열었다.
“1년.”
“…엉?”
“1년 안에 전국에 있는 모든 조직들을 통합한다.”
말을 마친 도윤이 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잠시 눈을 크게 뜬 박판섭도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내밀어진 도윤의 손을 맞잡는다.
“화끈해서 좋아, 영감님.”
박판섭의 말에 도윤의 미소도 한층 짙어졌다.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전국 조직 통합.
그 첫걸음이 자그마한 병실 안에서 내디뎌지고 있었다.
* * *
1년이라는 시간은 두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갔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 또 한 번 발생하게 되는 2004년.
새해 첫날부터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수상이 기습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감행하여, 국가 간 논란을 일으켰다.
문제는 이런 나라 밖의 문제보다, 나라 안의 문제로 대한민국 전체가 삐걱거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한 번도 한나라당이 노무현을 국민의 대통령으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탄핵 사태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제가 이 데이터를 다 찾아왔습니다. 보시면요, 처음으로 탄핵 얘기가 나온 게 언젠지 아십니까? 2003년 3월 10일, 취임 14일 후입니다. 왜 했냐? 대북송금 특별법을 거부하면 탄핵 검토하겠다. 이때 시작된 겁니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언론에서 보도된 것만, 탄핵 관련 발언만 한나라당 민주당 합쳐서 114건입니다.>
TV에서는 한참 100분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고,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놓고 여러 정치인들이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TV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노년의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큭… 드라마 속의 드라마라느니, 기적의 사나이라느니, 단 1년 사이에 그렇게 설치고 다니더니, 꼴이 말이 아니군. 임기 2년 차에, 탄핵이라니.”
노년의 사내, 오춘화 회장이 TV를 보며 한껏 비아냥거렸다.
“아무래도 수도를 이전한다는 얼토당토않는 말이 효과가 컸던 것 같습니다. 저대로 탄핵이 가결되면, 우리는 다시 한 번 크게 도약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지.”
박건우의 말에 오춘화 회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수년 동안 얼마나 많은 손해를 입었던가.
여타 다른 기업에서 나날이 세를 불려 나가고 있을 때, 오직 이곳 명성만 세가 축소되었다.
이전과 비교하여, 최소 50퍼센트 이상 주가가 차이 날 정도로 말이다.
“이번 건 잘 마무리되면, 접었던 사업들 모두 살리고, 새로운 플랜까지 한번 제대로 짜 봐.”
“예. 알겠습니다.”
박건우가 짧게 고개를 숙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놈은 아직 못 찾았나?”
“…예. 다방면에서 알아보고 있지만…….”
“밥값도 못 하는 버러지 같은 것들…….”
오춘화 회장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최대한 빨리 찾아내. 지검 쪽에 항상 귀 열어 두고 있는 것도 잊지 말고.”
“예.”
“나가 봐.”
오춘화 회장이 손을 휘휘 내젓자, 한차례 허리를 숙인 박건우가 출입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쿵!
작은 소음과 함께 출입문이 완전히 닫히자, 오춘화 회장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명성은 다시 한 번 도약한다. 반드시…….”
오춘화 회장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사무실 내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같은 시각, 서울 시외에 위치한 옛 공장 부지.
족히 수백 평은 될 듯한 폐공장 안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 언뜻 비치는 인원만 족히 수백 명은 되는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폐공장 중앙을 기준으로 그 사람들이 뱅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는데, 중앙에는 한 사내가 피 칠갑을 한 채 무릎을 꿇고 덜덜 떨고 있었다.
턱수염이 피딱지에 눌어붙어, 상당히 처참한 몰골의 중년 사내.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인영.
어두컴컴한 건물 내부에 순간 달빛이 비쳐 들며, 두 사내의 얼굴을 비춘다.
마침내 달빛이 완전히 사내들의 얼굴을 비추게 되었을 때, 드러난 얼굴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유독 눈에 띄는, 도윤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