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박보윤 (1)
“짜증 나, 짜증 나, 짜증 나!!!!”
손에 쥔 제 몸집만 한 서류 더미를 양손으로 쾅 하고 집어던지듯 내려놓는 여자를 보며, 같은 사무실 내에 있던 다른 직원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키가 150센티미터가 겨우 넘을 듯한 상당히 작은 체구를 가진 눈앞의 여자가 저런 상태에 있을 때 얼마나 무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 가장 상석, 개인 책상 앞에서 화가 나는지 연신 씩씩거리고 있는 여자.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겼을까?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긴 생머리를 한데 묶어, 환히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는 뭇 남성들이 시선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든다.
유독 기다란 눈매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커 보이게 만들었고, 오똑한 코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작은 얼굴 위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눈앞에 있는 여자의 첫인상에 대해 묻는다면, 십중팔구 열 명 중 열 명 모두 예쁘다며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 만한 얼굴.
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그 얼굴에 마치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 같은 정장을 입고 있어 얼핏 안 어울릴 것 같았지만, 그게 또 다른 매력을 자아냈다.
한마디로, 잘나가는 탤런트 뺨칠 정도로 예쁜 여자의 얼굴이 지금 이 순간, 마치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이러다 화병 날 것 같아. 안 되겠어. 장 실무관님, 저 잠시 지검장실 좀 다녀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휴대폰으로 연락 줘요.”
미모의 여자가 당장이라도 출입문을 뛰쳐나갈 듯한 기세를 보이며 말하자, 사무실 내에 있던 또 다른 30대 초반의 여자가 흠칫한다.
“저… 검사님, 혹시 또 한바탕 하실 생각이시라면…….”
장 실무관이라 불린 여자가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상석의 책상 위에 ‘검사 박보윤’이라 적힌 명패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자의 이름은 박보윤.
대한민국 최고라는 한국대학교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졸업도 하기 전에 사시를 패스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한때 눈에 띄는 미모와 뛰어난 머리로 재색을 겸비한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천재’라 불리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소재는 언론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완벽한 여자들에게도 으레 그렇듯 한 가지씩은 단점이 존재했다.
특히나, 눈앞에 있는 박보윤의 경우에는 워낙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그 경우가 더욱 심했다.
“뭐라구요?”
박보윤의 고개가 장 실무관을 향해 홱 하고 돌아갔다.
“아, 아니… 인사발령 문제로 검사님이 또 찾아오실 것 같으면, 미리 제지 좀 해 달라는 지검장님 말씀이 있었…….”
“하?”
박보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프답시고 갑작스레 휴직계 내고 잠수 탄 신임 검사 나부랭이는 상전이고, 나 같은 거한텐 불만도 받지 않겠다?”
“아니, 저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당황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장 실무관을 향해 박보윤이 죽일 듯 노려보기 시작한다.
그런 박보윤을 보며 장 실무관이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그런 게 아니라, 연락도 없이 가시는 건 경우가 없을 것 같아서…….”
“장 실무관님.”
“…….”
박보윤이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 장 실무관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연락 없이 지검장실 찾아가는 건 경우가 없는 일이고, 정기 인사 시즌도 아닌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인사이동. 그것도 고작 신임 검사 땜방으로 발령 내 버리는 건 경우가 있는 일이에요?”
“그건… 아닙니…….”
장 실무관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박보윤이 말한다.
“그게 아니면.”
“…….”
박보윤이 싱긋 미소 지었다.
“미안한데 오늘 저, 더 이상 건들지 말아 주세요. 제가 오늘 좀 예민해서요.”
“아, 네. 죄송합니다…”
바르르 떨던 장 실무관이 이내 푹 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런 장 실무관을 잠시 바라보던 박보윤이 이윽고 출입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쾅!
이내 커다란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닫히자, 사무실 내에 있던 몇몇 직원들이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우리 보윤 씨는 언제 봐도 살벌하구만.”
박보윤의 자리 바로 우측 창가 쪽에 앉아 있는 젊은 수사관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야, 야. 아직 안 갔을 수도 있다?”
순간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중년 수사관의 말에, 젊은 수사관이 흠칫했다.
“혹시나 검사님이 밖에서 듣기라도 하셨으면…….”
혹여 바깥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갈세라, 중년 수사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아, 형님. 제발…….”
장난으로라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저은 젊은 수사관이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중년 수사관이 다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영아, 괜찮아?”
중년 수사관의 말에 장 실무관이 살포시 턱을 들어 올렸다.
“…갔어요?”
“응, 갔어.”
중년 수사관의 말에 장 실무관이 고개를 발딱 쳐들었다.
“와, 간 떨어질 뻔했네.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저 또라이 저러는 거는 정말 적응이 안 되네요.”
손바닥으로 연신 제 얼굴을 부채질하며 능청스레 중얼거리는 장 실무관의 말에, 중년의 수사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럴 만도 하지. 공안부에서 한참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신임이나 하는 지게꾼 일이나 하게 생겼으니… 그것도, 벌써 몇 개월씩이나 말이야.”
“아니, 원래 그 검사님. 곧바로 특수부로 발령 날 예정 아니었어요? 어차피 그곳에 자리 만들어 주기로 마음먹으신 거, 차라리 땜빵도 그쪽에다 넣어 주실 것이지, 왜…….”
장 실무관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영이 니 말대로, 아직 특수부로 발령이 난 것도 아닌데, 그 자리에 땜빵으로 넣을 수가 있나? 당장 지금 이 자리가 비게 생겼는데, 누군가는 와서 해야 할 일 아냐?”
“그래도, 왜 하필 신임 검사나 하는 이런 일에 박 검사나 되는 사람이…….”
“응? 또라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검사님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
장 실무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성격이 싸이코인 거지, 능력 면에서는 완벽하잖아요. 집안 빵빵하지, 빽 좋지,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도 예뻐.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잖아요.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을까 싶어요.”
“성격만 빼고, 말이지?”
중년 수사관의 말에 장 실무관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좀 소시오패스 기질이 있긴 하죠. 아무튼, 저대로 공안부에 계속 있었으면 공안통을 거쳐서 완전히 엘리트 코스를 밟을 거라는 소문이 자자했었는데, 자기 입장에서 빡이 칠 만하겠죠.”
“오늘 우리 지영이가 이상한데? 왜 어울리지 않게 검사님을 이리 추켜세워 주실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젊은 수사관이 입을 열자, 장 실무관이 씨익 미소 지었다.
“그분이 돌아오신다는 말이 있거든.”
“그분?”
“잘생긴 우리 강 검사님.”
장 실무관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두 수사관이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정말이야!?”
“확실하진 않아요. 얼마 전에 지검장실을 나오는 강 검사님을 봤다는 직원들이 제법 많이 있어서…….”
“그거 참 기쁜 소식인데?”
젊은 수사관의 말에 중년의 수사관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군.”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시던 분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무언가 큰 의미가 있겠죠.”
말을 마친 장 실무관이 힐끗 아무것도 없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 실무관이 향하는 시선을 따라 나머지 두 사내도 그곳을 바라본다.
상석이랍시고 구석에 위치한 자리를 한사코 거부하며, 구태여 수사관의 바로 옆 창가 쪽에 자리를 만들어 앉았던 사람.
짧은 기간 동안 세 사람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신임 검사.
“강도윤 검사…….”
장 실무관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사무실 내에 울려 퍼졌다.
* * *
“여! 거기 가는 아름다운 아가씨!”
지검장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박보윤이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느끼한 목소리로 멈칫했다.
“이 목소리는…….”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낮게 중얼거리던 박보윤이 그대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워, 워, 워. 아무리 그래도, 몇 없는 동기끼리 무시하는 건 너무하잖아?”
박보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재빨리 걸음을 옮긴 남자가 어느새 박보윤의 앞을 가로막았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남자.
강력부 소속 검사 김재욱이었다.
“뭐야?”
박보윤이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며 김재욱을 올려다봤다.
두 사람의 키가 30센티미터도 더 차이 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 마치 아이와 어른을 보는 듯했다.
“오늘 집안 어르신들끼리 만찬 있는 것, 잊지 않았겠지?”
“하든지, 말든지. 내가 좀 바빠서 그러는데, 비켜 줄래?”
“오, 까칠하셔라.”
짐짓 호들갑을 떤 김재욱이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디며 박보윤에게 다가선다.
“당연히, 너도 올 거지?”
“내가 왜?”
똑같이 한 발 물러서며, 박보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라니? 너희 아버지가 꼭 참석하라고 말씀하셨을 텐데?”
“그걸 니가 어떻게 알지?”
더욱 인상을 굳히며 묻는 박보윤을 보며, 김재욱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을 리가 없지.”
“…….”
김재욱이 느끼한 미소를 입에 문 채 말을 잇는다.
“대대로 언론계 명문인 너희 집안과 정계의 명문인 우리 집안이 중심이 되어 가지는 첫 번째 만찬이야. 그동안 이런 자리가 몇 번이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진 적은 없었지. 스케일 자체도 역대급이고. 이런 자리에, 집안의 자랑거리인 니가 빠지면, 아버님이 많이 슬퍼하시지 않을까?”
“…아버님?”
“남자가 아버님이라 불러서 이상한가? 그럼…….”
잠시 말끝을 흐리던 김재욱이 씨익 웃는다.
“장인어른?”
“미친 새끼…….”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는 얼굴로 박보윤이 홱 하고 몸을 돌렸다.
아무리 박보윤이 막 나가는 성격이라지만, 이런 기분으로 지검장실을 찾아갔다간 허용 범위를 넘어서는 실수를 할 가능성이 컸다.
적당히, 선을 안 넘는 선에서 살살 긁어야 효과가 큰 법이다.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확실히 할 줄 아는 박보윤이었다.
“아, 미안. 혹시 너무 집안 얘기만 해서 기분 나빴나? 사과의 의미로 내가 술이라도 한잔 살까?”
김재욱이 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흔들며 씨익 미소 지었다.
“나 아직 특수 수사 활동비 카드 한도가 많이 남았거든. 우리 아가씨 기분 풀어 주기에는 충분할 것 같은데?”
다음을 기약하고 그대로 걸음을 옮기던 박보윤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 모습을 발견한 김재욱의 표정이 밝아진다.
“오?”
“어떤 술 사 줄 건데?”
“사 주고 싶은 술이야 많지! 어디 보자, 근무 땡땡이 치고 어디 분위기 좋은 데서 둘이 마시기 딱 좋은 술은…….”
말끝을 흐리며 다시 박보윤에게 바짝 다가선 김재욱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대의 입술?”
싱긋 미소 지은 박보윤이 그대로 구둣발을 이용하여, 눈앞에 보이는 김재욱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컥!”
“또라이 새끼.”
한쪽 다리를 부여잡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펄쩍펄쩍 뛰고 있는 김재욱을 잠시 바라보던 박보윤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만찬…….”
김재욱과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을 때, 박보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름 대한민국에서 힘깨나 쓰는 집안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으레 있는 집안 행사 중 하나였다.
“차라리 거기서…….”
잠시 말끝을 흐리던 박보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마침, 이번 만찬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에 있는 모든 조직을 하나로 통합한, 그 베일에 싸인 인물도 참석할 거라는 얘기도 있었다.
버터를 한 바가지로 두른 재수 없는 놈 앞에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한때 조폭 수사에 미쳐 있던 박보윤은 이번 만찬이 알게 모르게 큰 기대가 되었다.
“기대되네.”
짧게 중얼거린 박보윤이 이내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