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만찬
“오! 우리 이쁜 손녀 아니냐!?”
나이가 일흔을 훌쩍 넘긴 노년의 신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막 호텔 로비로 들어서는 1남 1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1녀, 박보윤이 순간 흠칫 놀라더니, 어색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할, 할아버지.”
“이게 얼마 만이냐? 한번 안아 보자꾸나.”
박보윤의 할아버지이자 현 국무총리인 박보군이, 반가운 얼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박보군이 엉거주춤 서 있는 보윤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박보군은 170센티미터라는, 옛날 사람치고는 상당히 큰 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보윤의 작은 몸집이 쏙 하고 들어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머지 1남, 보윤의 아버지인 박성준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총리님, 저는 안 보이시나 봅니다.”
박성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품에 안긴 보윤의 등을 쓰다듬던 박보군이 이내, 몸을 떼어 냈다.
힐끗 박성준을 한차례 바라본 박보군이 짧게 중얼거린다.
“…왔냐?”
“…….”
자신의 아버지를 묘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던 박성준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보는 손녀도 반가우시겠지만, 아들도 좀 반겨 주셨으면…….”
“일없다. 다 큰 놈이 징그럽게… 너도 애정결핍, 뭐 그런 거냐?”
“…….”
박성준이 이윽고 입을 다물었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박보군이 다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에는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입에 베어 문 보윤이 가만히 서 있었다.
“우리 손녀는 이 할애비가 별로 반갑지 않은가 보구나.”
“아, 아니에요, 할아버지. 그런 게 아니라…….”
진심으로 실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박보군을 보며, 보윤이 급히 손사래 쳤다.
“그… 죄송해서…….”
“…응? 죄송?”
어느새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박보군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우리 이쁜 손녀가 이 할애비에게 미안할 일이 뭐가 있…….”
턱을 쓰다듬으며 말끝을 흐리던 박보군이 이내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설마, 그때 그 일 때문에 그러니?”
“…….”
보윤이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자, 박보군이 인자한 미소를 입에 물었다.
“이런, 이런…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구나.”
사실 박보군이 이토록 반갑게 보윤을 맞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보군 자신이 손녀를 끔찍이 아끼기도 했지만, 아까 말한 대로, 정말 오랜만에 보윤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작 그 정도 일 가지고 1년 만에 만나는 할애비를, 이리 불편해하고 있었니?”
보윤이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성준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작 그 정도 일은 아니죠. 그 일 때문에 애 직장에 소문난 별명이…….”
순간 보윤이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마치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보윤을 발견한 박성준이 가까스로 뒷말을 삼켰다.
“…크흠.”
짐짓 헛기침을 한 박성준이 말을 잇는다.
“아무튼, 총리님이야 괜찮으시겠지만, 제가 그 뒤처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 애비 앞에서 자식 놈이 힘들다고 우는소리 하는 거냐?”
“…….”
박보군의 말에 박성준이 입을 다물었다.
박보군은 성준에게 원하는 게 있을 때면 이렇게 부자지간을 강조하곤 했다.
결국 한숨을 내쉰 박성준이 한결 부드러워진 태도로 말한다.
“…아무튼, 제정신이 박힌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어느 미친 검사가 피조사자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뺨을 후려갈긴답니까? 그것도, 전직 국회의원의 뺨을요.”
박성준이 가히 경악할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그런 박성준을 보며, 보윤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뭐?”
박성준의 반문에 보윤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죠. 면책특권이 있던 현직 때는, 그보다 얼마나 더 구역질 나는 짓거리를 하고 다녔을지, 치가 떨려요.”
“박보윤!”
“왜요!”
큰 소리로 고함치는 박성준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보윤이 마주 고함쳤다.
“…….”
순간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박성준을 보며, 보윤이 빠르게 말을 잇는다.
“저를 또라이라고 욕하시는 건 괜찮아요. 또라이 맞으니까. 그런데, 제가 한 일이 잘못된 일이라곤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너, 정말…….”
두 손 들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박성준에 아랑곳하지 않고, 보윤이 말한다.
“불쌍한 독거노인들 라면이라도 한 봉지 사다 드리라고 나온 쥐꼬리만 한 지원금을 제 주머니에 넣고, 비싼 양주 사다 처먹고, 장애인들에게 지원되는 보조금으로 여자 가슴이나 주물럭거리던 놈이에요.”
“…….”
“사회적 약자인 그들 앞으로 지원되는 예산은, 딱히 뒤탈도 없을 거라는 계산에서였죠. 국민의 대표라는 놈이,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그따위 짓을 했다는 것도 이가 갈리는데…….”
보윤이 그때가 생각났는지 한차례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서도 제 버릇 못 준다고, 자기 딸뻘도 안 되는 어린 여자애를 간음, 그게 사람 새끼예요? 금수만도 못한 새끼.”
그때의 기억으로 감정이 격해졌는지 보윤이 말하던 도중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보윤을 보며, 박성준도 인상을 찌푸렸다.
“니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거다. 죄지은 놈이 있으면 법으로 다스려야지, 주먹이나 휘두르라고 국가에서 그 자리에 널 앉혀 둔 게 아니지 않느냐. 가뜩이나 민감한 시국에…….”
“그게 진짜 목적이시겠죠.”
“뭐?”
“저를 위해서 제 뒤치다꺼리를 하셨다구요? 그게 아니겠죠. 이 집안의 딸인 제가, 아버지의 소중한 조국일보에 먹칠을 할까 봐, 그게 두려우셨던 거잖아요. 아버지에게 조국일보는 인생의 전부니까요.”
“너, 정말……!”
“자, 자.”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하자, 이제는 나서야 될 때라고 생각되었는지, 박보군이 쓰게 웃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나간 일을 가지고 부녀지간에 이렇게 얼굴 붉히는 거,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별로 좋아 보이진 않는다.”
“…….”
박보군의 말에 두 부녀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박보군이 보윤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이 할애비는 언제나 우리 착하고 이쁜 손녀 편이지만… 방금 니가 아비한테 한 말과 행동은, 자식으로서 분명히 잘못된 거라 생각하는데…….”
잠시 말끝을 흐리던 박보군이 보윤의 두 눈을 정면에서 마주 바라보며, 인자하게 미소 짓는다.
“윤이는 어떻게 생각하니?”
“…죄송해요, 할아버지.”
보윤의 사과에 박보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쪽이 아니지 않니.”
입술을 앙 다문 보윤이, 마지못해 자신의 아버지, 박성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제가, 감정이 격해져서 말을 함부로 했습니다. 사과드려요.”
꾸벅 고개를 숙이는 보윤을 잠시 바라보던 박성준이 잠시 후,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
“…….”
묘한 분위기의 두 사람을 바라보던 박보군이 짐짓 인상을 굳힌다.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 아직도 뭔가 있는 모양이구나. 분명히… 그 일 때문이겠지?”
“…….”
침묵은 긍정의 표시라고 했던가?
자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요한 침묵이 찾아들자, 이내 박보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기로 하고, 일단은…….”
힐끗 손목에 자리한 고급스러운 시계를 바라본 박보군이 이윽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자, 시간 다 됐다.”
저벅, 저벅, 저벅.
그렇게 커다랗게 보이던, 걸음을 옮기는 박보군의 등이 오늘따라 유난히 작게 보이는 건 착각일까?
잠시 그 등을 바라보던 성준과 보윤도,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휘익~”
지금 막 모임 장소에 도착한 박판섭이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서울 도심 중심에 자리 잡은 5성급 호텔, 고구려.
바로 이곳이, 정계의 거물과 재계 인사 등,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이 만찬을 가질 장소였다.
“와우!”
천장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샹들리에와 바닥 전체에 깔린 레드카펫, 어마어마한 크기의 테이블 위에 차려진 각종 산해진미를 보며 박판섭이 또 한 번 감탄사를 터뜨렸다.
“우리 어머니가 이 모습을 꼭 보셨어야 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꼴통 아들 놈, 이렇게 성공한 거 보시면, 참 좋아하셨을 텐데.”
장난스럽게 중얼거린 박판섭이 등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영감님은 왜 말이 없어?”
“…….”
완전한 청년의 모습을 한 도윤이 박판섭의 말에 그때서야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앳된 티를 완전히 벗어던져, 이제는 완연한 청년의 모습.
특히, 그사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눈빛이 상당히 깊고, 그윽했다.
마치, 세상 만물을 모조리 빨아들일 것 같은 마성의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
분위기 깡패라는 말은, 마치 도윤을 위해 준비된 말 같았다.
“…거, 안 그래도 분위기 많이 바뀌어서 주변 사람들이 가만 놔두질 않는데. 그렇게 고심에 가득 찬 표정까지 짓지는 말라고. 여기 있는 아가씨들 다 쓰러질라.”
“…다 콧대 높은 아가씨들이라,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도윤의 말에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박판섭이 씨익 미소 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박판섭과 도윤의 로비에 들어설 때부터 주변의 시선이 조금씩 집중되는 듯하더니, 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선의 주인들은, 대부분 여성들의 것이었다.
“하나같이 영감탱이들, 아니면 물건 하나 제대로 못 들 것 같은 멸치들만 있는데, 한 마리의 야생마 같은 멋들어진 두 남자가 들어오니 아주 뿅 가는데? 어?”
박판섭이 팔꿈치로 도윤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댔다.
“…착각은 자유지.”
“어? 같이 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도윤의 뒤를, 박판섭이 급히 뒤따랐다.
“아, 어디까지 가는데? 대충 자리 잡고 밥 먹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엥? 만나야 할 사람?”
도윤의 말에 순간 멈칫한 박판섭이 고개를 갸웃한다.
“영감님이 여기서 만나야 할 사람이 어디 있어? 아니, 아는 사람은 있어?”
“…있을 거야. 예상이 맞다면.”
“아니, 아직 사람 다 도착한 것 같지도 않은데, 거 걸음 속도라도 천천히 좀…….”
도윤을 뒤따라, 빠르게 걸음을 놀리던 박판섭이 순간 급히 걸음을 멈췄다.
“아, 갑자기 멈추면 어쩌자고!?”
어느새 제자리에 우뚝 멈춰 있는 도윤의 뒤통수에 대고 박판섭이 고함쳤다.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뭐, 왜?”
박판섭이 도윤의 등 뒤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을 때, 이윽고 도윤이 입을 열었다.
“…찾았다.”
건물 중앙에서 우측으로 조금 떨어진 테이블.
그곳에, 도윤이 찾고 있던 인물이 앉아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박판섭이!”
좌측에서 터져 나온 우렁찬 고함 소리에 박판섭과 도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뒈져라!!!!!”
“……!”
그제야 시야를 검게 가리는 인영을 발견한 박판섭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바로 다음 벌어진 상황에, 내부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