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예지의 대가
박판섭은 정신이 아찔했다.
바로 옆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아차 하는 순간 누군가 자신을 덮쳐 오고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긴장의 연속 속에 항상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왔다.
아마 평상시였다면 묘한 위기감을 느끼는 즉시,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평소보다 방심하고 있었다.
설마 이런 귀족들의 모임에,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 방심이, 스스로 위기 상황을 자처했다.
날카롭게 날이 선 나이프가 복부를 찔러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박판섭이 두 눈을 더욱 더 크게 떴다.
항상 생각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눈을 감는 것은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자신은 겁쟁이가 아니다.
칼이 살육을 파고드는 순간부터, 죽음의 수마가 찾아오는 순간까지.
모조리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지옥에서 놈을 저주할 것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젠장…….’
죽기 직전의 순간은 마치 슬로우 비디오라고 했던가?
느려진 시간 속에, 이윽고 나이프가 자신의 복부에 쑤셔 박히려는 순간.
덥석!
이번에는 박판섭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어, 어떻게…….”
그 찰나의 순간에, 도윤이 이름 모를 사내의 나이프를 쥔 손목을 낚아챘다.
도윤이 두뇌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능력 또한 매우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짧은 순간에 부지불식간 찔러 들어오는 칼을 잡아채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드드득.
마치 뼈가 부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곧이어 칼을 떨어뜨린 사내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홀 내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꺄아아악!”
“으… 내가 다 아프네.”
관절이 기괴한 각도로 꺾인 그 끔찍한 모습에, 주변에 모여들어 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비명을 질렀고, 또 일부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도윤이 사내의 팔을 꺾은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를 잠시.
초일류 호텔답게, 소란이 일어난 것을 발견한 즉시, 내부에 대기하고 있던 경비원들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박판섭, 박판서어어어어업!!!!”
분명 고통스러울 텐데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팔목이 꺾인 사내가 마치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이윽고 네 명이나 되는 경비원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도윤이 곧바로 손에 쥔 사내를 집어던지듯 경비원들에게 떠넘겼다.
“어, 어…….”
얼떨결에 사내를 넘겨받은 경비원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신속하게 사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사지를 단단히 붙들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박판섭도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잠시 눈을 크게 떴다.
“너는, 분명 구상사파의…….”
박판섭의 기억이 맞다면, 눈앞에 있는 사내는 자신이 도윤과 직접 해체시킨 구상사파의 행동대장 중 한 명이었다.
“이 개새끼! 우리 조직을 산산이 찢어발겨 놓고, 전국 통합 20세기파라고? 그야말로 지나가는 개가 짖는 소리구나!”
“…….”
“이대로 끝날 거라 생각하지 마라! 항상 긴장해라! 나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들이, 언젠가는 니 배때지에 쇠붙이를 쑤셔 박을 테니까!”
“이런, 이런.”
모든 상황을 파악한 박판섭이 한숨을 내쉬었다.
표면적으로는 전국에 있는 모든 조직들을 통합하였지만, 무슨 일을 하든 100퍼센트 완벽한 것은 없듯, 완벽히 흡수하지는 못했다.
그러다보니 조직 통합 이후에도 안팎으로 조금씩 문제가 생기곤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지금의 이런 경우가 가장 많았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과하다 못해, 사이비 신도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단적인 일부 인물들.
그런 위험한 놈들이 이렇게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호시탐탐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이거, 다시 운동을 시작하든가 해야겠어. 항상 애들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경비원들에게 붙들려 조금씩 멀어져 가는 사내를 보며, 박판섭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보다…….”
낮게 중얼거리는 박판섭이 도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윤에게는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방금의 상황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고함 소리가 들렸고, 눈 깜짝할 사이에 복부를 향해 칼이 찔러 들어왔다.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일반인들이라면 절대 막을 수 없는, 그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어떻게 된…….”
곧바로 궁금증을 해소하려던 박판섭이 입을 다물었다.
도윤이 다시 무언가를 찾는 듯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내 목적을 이루지 못했는지, 시선을 바로 한 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뭘 찾는 거야?”
“…….”
자신의 물음에 입을 다무는 도윤을 보며, 박판섭이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봤을 때, 도윤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면, 딱히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으니까.
“뭐, 좋아. 때가 되면 알려 줄 테지. 그보다, 어떻게 막은 거야? 미리 알고 있지 않고서야…….”
“…….”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도윤을 보며, 박판섭이 재차 묻는다.
“영감님?
“…알고 있었으니까.”
“뭐?”
짧게 중얼거리는 도윤을 보며, 박판섭이 멍하니 반문했다.
* * *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도윤은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지난 1년 동안, 교대로 자신을 미행해 오던 놈들.
처음에는 그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성격이 만들어 낸 착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착각이 아니었다.
미행 수법이 상당히 은밀하고, 교묘해서 불과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무리가 있었다.
감시 대상이 자신 하나였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이제는 놈들이, 단비의 뒤까지 따라 붙었다.
한 번 여동생을 잃은 경험이 있는 도윤에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당히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어디서 온 놈들인지, 짐작은 가지만…….’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명성.
분명 위기의식을 느낀 오춘화 회장 쪽에서 보낸 사람들일 것이다.
문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난 1년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시만 할 뿐, 단 한 번도 자신의 앞에 나타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윤의 두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여동생을 잃는 경험은, 단 한 번으로 족하다.
만약, 그쪽에서 먼저 낌새를 보인다면…….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부숴 버릴 것이다.
“영감님?”
순간 귀청을 때리는 박판섭의 말에 정신을 차린 도윤이, 짧게 대답한다.
“…알고 있었으니까.”
“뭐?”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박판섭을 보며 도윤이 옅게 미소 지었다.
박판섭에게 대답한 대로, 도윤은 방금 있었던 상황을 분명히 미리 알고 있었다.
문득 생각난 도윤이 오래간만에 눈앞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그때, 일반 주사위보다 무려 열 배는 커 보이는 주사위를 굴려 얻은 능력.
예지의 대가(???) - 패시브
매일 자정, 하루에 단 한 번.
대상자를 기준으로, 24시간 이내에 발생할 가장 큰 미래의 사건을 홀로그램을 통해 보여 드립니다!
대상자 스스로,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가치의 우선순위에 따라, 무작위로 사건이 지정됩니다!
사용하고 싶을 때 마구잡이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고, 하루에 단 한 번이라는 횟수 제한도 분명히 있다.
뿐만 아니라, 도윤이 생각하는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에도 곤란한 점이 있다.
정치, 경제, 사회 혹은 원한이 있는 명성에 대한 정보.
이런 특정 분야에 대해, 필요한 부분만 콕 집어서 미래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아예 이용하지 못할 것도 없지.’
분명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가치의 우선순위에 따라, 미래를 보여 준다고 했다.
마음먹기에 따라, 충분히 원하는 정보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미 미래에서 온 회귀자라는 특성상, 세상에 벌어질 큰 줄기들은 알고 있는 상황.
이 흐름에 미처 알아채지 못할 디테일한 부분만 조금씩 채워 넣어 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게 안 되더라도, 단비의 목숨은 분명히 지킬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커다란 가치.
마음속을 직접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가족일 것이라고 도윤은 확신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지간하면 가만히 기다려 줄려고 했거든?”
“……?”
도윤의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들어 올리자, 박판섭이 곤란한 미소로 뒤쪽을 턱짓한다.
홀 내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건장한 체격의 두 사내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이런 쪽으로는 조금 머리가 잘 돌아가는데 말이야. 영감님, 우리 아무래도…….”
“…….”
잠시 말끝을 흐리던 박판섭이 어색한 미소를 입에 문 채, 말을 잇는다.
“좆 된 것 같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때맞춰 박판섭과 도윤 사이에 끼어든 두 사내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사내가 굳이 자신을 소개하지 않아도, 도윤은 눈앞에 있는 사내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출입구 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제복 위에 반짝이는 형광색 조끼를 입고 있는 몇몇 사람들.
아마 도윤의 예상이 맞다면…….
“서울 강남서 강종필 형사입니다. 방금 있었던 일과 관련해서, 잠시 서로 동행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아니, 형사님. 저희가 지금 좀 바빠서 그러는데, 피해자 조사는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
박판섭의 말에 자신을 강종필이라 소개한 형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무언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피해자 조사차 같이 가자고 말씀드린 건 아니고…….”
강종필 형사가 말끝을 흐리며 출입구 쪽을 턱짓한다.
“저기, 순찰차에 타고 계신 분이 손목이 많이 다치셨더라구요.”
“아니, 이봐요! 형사님! 저 새… 아니, 저 양반이 먼저 쇠붙이 휘둘렀다는 얘긴 못 들으셨어요? 여기 본 사람들이 몇 명인데! 정당방위 아닙니까, 정당방위!”
“뭐, 정당방위인지 과잉방위인지는 법원에 있는 판사님이 판단하실 문제고…….”
강종필 형사가 도윤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같이 좀 가 주셔야 겠습니다.”
“이런 씨발!”
순간 박판섭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뭐요?”
그 소리를 들은 강종필의 옆에 있던 또 다른 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발 나서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가죠.”
“영감님!”
“경찰서 가면 다 잡혀 들어가는 줄 아나, 오늘따라 왜 이래?”
도윤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강종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죠. 보는 사람들 많으니까, 빨리요.”
“…협조 고맙습니다.”
잠시 박판섭을 노려보던 강종필이 이내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곧바로 도윤이 따르자, 박판섭도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젠장…….”
박판섭이 체념한 표정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보윤이 처음 모임 장소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보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중앙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도윤이었다.
도윤이 유독 눈에 띄는 외형을 가지고 있어서?
물론 아니다.
보윤이 도윤을 발견했을 때,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은…….
“저 개새……!”
“응? 뭐라고?”
“아, 아니에요, 할아버지.”
박보군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지은 보윤이 다시 도윤에게 시선을 돌리며 이를 갈았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몇 번이나 사진으로 봐 온 그 놈이 맞았다.
자신을 순식간에 지게검사로 좌천시킨 원흉.
신임 나부랭이 따위가, 든든한 빽을 등에 업고, 쥐똥 같은 활약 조금 한 걸 빌미로 쉬고 오겠다며 당당하게 휴직계를 제출했다.
언제든 돌아오기만 하면 손봐 주기로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얼굴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너, 오늘 잘 걸렸다.”
소매를 걷어붙인 채, 도윤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보윤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레 고함 소리가 들리더니 웬 시꺼먼 놈이 칼을 휘둘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름 모를 여자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흉기를 휘두른 놈은 순식간에 제압되었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씹어 먹어도 모자랄 놈이 경찰서에 연행되어 간다.
이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바라보던 보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씨익 웃는다.
“대박 재미있겠는데?”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보윤이 재빨리 출입구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