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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94화 (94/174)

94화 신념

보윤의 두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뒷배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거물일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보윤이 침음을 삼켰다.

최근 몇 년 동안 회사의 규모만큼이나, 잡음이 많았던 그룹, 명성.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면서, 10대 그룹 자리를 내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성이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중 하나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뒷소문이 워낙 좋지 않은 곳이라, 보윤도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불과 수개월 전, 명성그룹에서 파격적인 인사를 감행했다.

상무급이었던 오춘화 회장의 오른팔 박건우를 부사장이라는, 과하다 못해 파격적인 승진을 시킨 것이다.

당연히 여러 언론에서는 이 사실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고, 그때 보윤도 눈앞에 있는 이 사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마 뒷배가 명성일 줄이야…….’

솟아오르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눌러 참은 보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애초에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면, 직접 나서기로 마음먹고 이 자리에 왔다.

건방진 신임 놈이 보는 눈앞에서 확실히 물먹여 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계획에 의외의 거물이 끼어 버렸다.

그 때문에 겁먹었냐고?

전혀!

지금 보윤의 가슴속은 설렘으로 가득 차다 못해,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물을 먹이는 것도,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느끼는 재미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가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평소 단단히 벼르고 있던 현직 검사와 재계의 거물이다.

이런 멋진 상황을, 보윤은 절대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래, 제발 자리 옮기지 말고 여기서 얘기해라.’

속으로 중얼거린 보윤이 품 안으로 손을 넣더니, 녹음기를 빠르게 조작했다.

언론계 집안사람들에게, 이 정도 준비물은 기본이었다.

보윤이 손안에서 녹음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마침내 젊은 사내, 박건우가 입을 열었다.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군요. 명성그룹의 박건우라고 합니다.”

사내, 박건우가 도윤을 향해 가볍게 목례하며 인사했다.

박건우의 입에서 쐐기를 박는 말이 나오자, 이제는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시작했다.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황성필이 버럭 소리쳤다.

“일들 안 해요!? 요즘 형사팀 실적이 많이 줄었던데, 보니까 아주 한가해 보이네. 팀장, 어떻게 생각해?”

황필성의 지목을 받은 형사 1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시정하겠습니다! 자, 자. 일들 하자고. 민성이는 어제 영장 발부자 명단 뽑아 놓은 거, 바로 잡으러 가고. 나머지는 어제 발생한 절도사건, CCTV 확실히 분석해.”

형사 1팀장이 이토록 오버를 해 가면서 황필성의 말에 즉시 반응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평상시에도 지엄하신 서장님의 명이다.

더군다나, 올해의 심사 승진 대상자 중 한 사람이 바로 형사 1팀장이었다.

승진 시즌만 되면 인사 평정권자에게 마누라 속옷까지 갖다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수두룩했다.

“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팀원들이 큰 소리로 대답하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팀 직원들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는 상황인데, 팀장의 직접적인 명을 받은 팀원들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자, 자. 일단 자리를 좀 옮기고… 뭐, 사건은 제 선에서 적당히 마무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예. 일단은 좀 옮깁시다.”

만족한 미소를 지은 황필성이 도윤을 향해 재차 자리를 옮길 것을 권했다.

돌아가는 양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보윤이, 슬슬 움직일 태세를 갖췄다.

특별히 나눈 대화도 없고, 지금 상황에서 나서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여기서 세 사람이 자리를 뜨면 말짱 황이다.

차라리,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나서, 개싸움으로 만드는 것도 제법 좋은 방법이 될 터였다.

‘그럼……!’

보윤이 한발 앞으로 내딛는 순간, 도윤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동은 없습니다.”

“…예?”

도윤의 말에 황성필이 멍하니 반문했다.

“…서장님은 모르시겠지만, 저는 경찰이라는 조직에 대해 생각보다 큰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 20년 가까이 몸을 담고 있던 조직이다.

가끔 잡음으로 시끄러워지는 조직이긴 하지만, 도윤에게 이 조직에 대한 애정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이리라.

“아, 헛. 말씀대로, 그건 참 의외군요. 일반적인 검찰과 경찰의 관계를 봤을 때, 검사님이 저희 조직에 애정을 가지고 계시다는 게 조금 의외긴 합니다. 뭐, 특별한 계기라도……?”

“계기? 물론 있죠.”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성필을 보며, 도윤이 말을 잇는다.

“밤새 주취자들에게 시달리는 파출소 직원들, 도로 위의 시꺼먼 매연 냄새를 옷이 까매질 정도로 하루 종일 맡으면서 꿋꿋이 단속하는 교통경찰들, 집에 토끼 같은 자식들이나 보고 싶은 애인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도, 휴일도 없이, 매일같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여기 형사분들까지.”

도윤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 나가자, 사무실 내에 있던 몇몇 직원들의 속에선 무언가가 울컥했다.

도윤의 말에는,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아마 스킬의 영향이 컸을 테지만, 일반인들이 그런 사실은 알 턱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밑에 직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데, 어떻게 정이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허헛, 이거, 이거. 검사님이 저희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해 주시는데요?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충분히 신경 써 드릴 텐데.”

가만히 하는 양을 지켜보던 보윤도 한숨을 내쉬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에, 무슨 대단한 말을 할까 했더니, 결국 하는 말이 잘 봐달라는 식의 아부성 발언이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보윤이 입을 열려는 순간, 도윤이 한발 빨리 말을 잇는다.

“서장님이 아닙니다.”

“…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리는 도윤의 말에 황성필이 멍하니 반문했다.

“썩을 대로 썩어 빠진 윗대가리에게 경의를 표한 게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

황필성뿐만 아니라, 사무실 내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 그게 무슨…….”

더듬더듬 말을 잇는 황성필을 잠시 바라보던 도윤이, 잠자코 조용히 있는 박건우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 나간다.

“언제부터 제가 사랑하는 경찰이라는 조직이, 고작 일개 재계의 인물에게 이토록 휘둘리게 되었습니까?”

“…….”

“서장님이 하는 말 한 마디, 하는 행동 하나는 강남서, 아니 경찰 전체의 얼굴이나 다름없습니다. 조직 내 일부가 잘못을 저지르면, 국민들은 그 일부를 욕하는 게 아니라 경찰 전체를 욕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윤이 힐끗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잇는다.

“여기 있는 직원들을 포함하여, 아까 제가 말씀드린 각자의 위치에서 꿋꿋이 제 일을 하고 있는 나머지 경찰관들도 모두 비난받겠지요. 바로… 서장님 같은 분들 때문에요.”

“이, 이……!”

이내 도윤이 말하는 바를 깨닫게 된 황성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황성필을 보며, 도윤이 마지막 쐐기를 박는다.

“밑에 있는 직원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자리입니다.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이런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내뱉은 황성필이 잠시 도윤을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출입문을 향해 홱 하고 몸을 돌렸다.

도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자신이 정말 발가벗겨진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수모도, 이런 수모가 없었다.

설마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사람에게 이따위로 나올 줄이야…….

“박 대표님! 아무래도 제 도움은 딱히 필요 없을 것 같은데예! 이거, 젊은 검사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내가 무슨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기분이 나빠서 더는 이 자리에 못 있겠습니다.”

“음…….”

박건우도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짧게 침음을 흘렸다.

“대표님하고 자리는 내가 따로, 다시 자리 한 번 잡겠습니다. 난 이만 가 보겠소!”

쾅!

황성필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출입문을 닫고, 자리를 떠나갔다.

“이런, 이런…….”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 박건우가 한숨을 내쉬며 도윤을 바라본다.

“소문은 많이 들어 왔지만, 설마 이 정도로 …와일드한 분이실 줄은 몰랐군요.”

‘꼴통’이라는 말을 가까스로 집어삼킨 박건우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박건우의 말에 도윤이 피식 미소 지었다.

“와일드한 걸로 치면, 대한민국에서 명성을 따라갈 곳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도윤을 보며, 박건우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박건우가 말한다.

“…아무래도, 오늘 검사님과 대화하기에는 이곳 분위기나 상황이 별로 좋지 못하군요.”

“저한테 볼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마침, 명성에 볼일이 있었거든요.”

도윤이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박건우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근 시일 내에, 제가 직접 초대장을 들고 찾아가겠습니다.”

초대장이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하는 도윤을 보며, 박건우가 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굳이 그 초대장이 무얼 의미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검사님이 직접 가지고 오는 초대장이라… 저희도 제법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야겠군요. 기대하겠습니다.”

도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박건우가 이내 출입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박건우의 등 뒤에 대고, 도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

“또 한 번 제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는 아저씨들이 눈에 띄면… 저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겁니다. 참고하시길.”

잠시 눈을 크게 뜬 박건우가 이윽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출입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쿵!

짧은 소음과 함께 박건우마저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도윤이 눈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박판섭과 박보윤뿐만 아니라, 사무실 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린 채, 그런 도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조사, 계속하시죠.”

“예? 아, 예.”

고요한 침묵을 깨고 중얼거리는 도윤의 말에, 정신을 차린 강종필이 급히 집어넣었던 서류들을 도로 꺼내어 놓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짝, 짝. 짝, 짝.

사무실 한구석에서 머리털 하나 남지 않은 중년의 형사가 작게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그 형사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촉촉이 젖어 들어 있었다.

30년 이상 조직에 몸을 담고, 이제 퇴직이 1년이 채 남지 않은 배태랑 형사였다.

짝, 짝, 짝.

짝짝짝짝짝짝짝.

한두 사람을 시작으로, 이내 사무실 내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아무도 입을 열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모두가 한마음 한뜻일 것이다.

이윽고, 40평 남짓한 형사팀 사무실 내부에 박수 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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