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한 걸음
‘미친놈…….’
자리에 조용히 앉아 조사를 받기 시작하는 도윤을 보며, 보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보윤은 진심으로 도윤이 꼴통에 미친놈이라고 느꼈다.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그보다 못하지는 않았다.
한 기관의 수장인 경찰서장에게 대놓고 썩어 빠진 윗대가리 운운하다니!
아무리 검사가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갖는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사’ 분야에 한해서다.
급으로만 따지면야, 일반 평검사가 결코 서장에게 꿀리지 않겠지만, 공직사회라는 게, 단순히 급수로만 상하관계를 정하는 게 아니다.
일선서 경찰서장 위치에 있는 사람들치고, 지검 부장검사급 이상 사람들과 줄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 말은, 최소 부장검사 이상은 되어야 서장에게 비벼 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 부장검사도 실제 서장과 만남을 가질 때는, 서로 간에 예의를 지키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판국에, 일개 평검사가 대놓고 서장을 그따위로 까 버렸으니…….
‘하긴, 사회적인 지위로 치면 방금 그 서장보다, 명성의 박건우. 그의 힘이 더 강하지만.’
그런 박건우마저 눈앞의 남자에게 수모를 당하고 돌아갔다.
‘도대체 왜?’
보윤은 이 일련의 상황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놈이 꼴통이라는 것은 이제 충분히 알겠다.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특별히 친분 관계나 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굳이 스스로 나서서 도와주겠다는 그런 사람들을 걷어차는 것도 모자라, 적으로 돌려 가면서까지, 이토록 극단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었는가?
사람이라는 것이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편하고 안전한 탈출구를 찾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보윤이 보아 온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그래왔고, 보윤은 이제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힐끗힐끗 도윤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보윤이 뜻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힘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보윤의 인식 자체에 변화를 준 사람.
솔직히 말해서 혼란스러웠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한숨만 내쉬던 보윤이 애꿎은 바닥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 * *
“이봐, 이봐. 영감님.”
한참 조사를 받던 중, 강종필이 타이핑 친 조서를 정리하는 틈을 이용하여, 박판섭이 도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
“나 진짜 영감님한테 또 한 번 반했다니까? 썩을 대로 썩어 빠진 윗대가리들에게 경의를 표한 게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키야~”
짐짓 도윤의 목소리를 따라 흉내 낸 박판섭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봐. 저 아가씨도 영감님을 자꾸 힐끗거리는 게, 완전히 푹 빠진 것 같은데?”
“…….”
잠시 박판섭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자, 한숨을 내쉬고 있는 보윤이 도윤의 눈에 띄었다.
“어때, 어때? 모자를 쓰고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는데, 몸매가 완전히, 캬~ 한번 잘해 봐. 응?”
“좀 조용히.”
쉬지 않고 짓궂은 표정으로 입을 놀리는 박판섭을 향해, 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강종필이 입을 열었다.
“기본적인 조사는 끝이 났습니다. 이미 저희 직원들이 현장에 있던 몇몇 분들의 목격자 진술까지 확보해 뒀기 때문에, 조금 귀찮으시기야 하겠지만 크게 신경 쓰실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저, 귀찮다는 말은?”
아까 한 행동이 있는지, 박판섭이 조심스럽게 묻자 강종필이 쓰게 웃었다.
“공직사회라는 게, 법적인 의문만 해소한다고 끝은 아니라서요. 해소하는 과정에서도 경위를 파악하겠답시고 이리저리 불려 다녀야 할 테고.”
“아하…….”
박판섭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강종필이 도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
잠시 머뭇거리던 강종필이 이내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조금 감동했습니다.”
“…예?”
“아까 그 일요.”
“…….”
강종필이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도윤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잇는다.
“사실, 검사님 신분을 들었을 때만 해도, 골치깨나 썩겠구나, 걱정했던 게 사실입니다. 일개 형사가, 검사님이나 되는 사람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한다는 게, 그 자체만으로 큰 부담이니까요.”
“…….”
“아까 검사님이 하신 말씀은… 저희 같은 하급 공무원들의 가슴에 크게 와닿는 얘기였습니다. 듣는 제가 속이 뻥 하고 뚫릴 정도로요. 감동했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강종필의 얼굴에는 감동이라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검사님 같은 고위 공직자가 전체의 10퍼센트. 아니, 1퍼센트만 있더라도 참 멋있는 사회가 될 텐데…….”
강종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도윤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발전도 없습니다.”
“……!”
강종필이 눈을 크게 떴다.
“굳이 내서 나서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나서 주겠지, 누군가는 대신해 주겠지. 그런 생각으로는 절대 이 조직, 아니 어떤 조직이든 발전할 수 없습니다.”
“…….”
“‘굳이 내가 나서서, 윗선에 찍힐 필요는 없잖아? 언젠가는, 누군가는 나서 줄 텐데,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도윤이 강종필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한 걸음.”
“…….”
“딱 한 걸음만, 남들보다 먼저 내디디십시오.”
“……!”
강종필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용기 있는 사람의 그 한 걸음이, 그 올곧은 신념이 조직 전체를 바꾸는 마법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도윤의 힘 있는 목소리가 사무실 내부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 * *
“영감님.”
“……?”
경찰서를 나서던 도윤이 등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시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던 박판섭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 미처 물어보지 못했는데… 혹시 명성에서, 영감님에게 사람을 붙였나?”
“…….”아무래도 자신이 박건우에게 한 말을 정확하게 들은 모양이다.
침묵을 지키는 도윤을 보며,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한 박판섭이 미간을 찌푸렸다.
“명성 정도나 되는 대기업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미행까지 붙였다…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박판섭의 말에 도윤도 분명히 공감하고 있었다.
힘이 있는 명성이라는 놈들이 조금만 눈에 거슬려도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이미 회귀 전 죽음을 통해 충분히 경험했다.
지금이야 검사라는 신분이 어느 정도 보호막이 되어 주고 있지만, 사실 그 신분도 명성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곧 자본이다.
막강한 자본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이, 명성이라는 그룹이었다.
“일단 애들이라도 몇 명 붙여 줄까? 집 주변에도 몇 명 배치해 두고.”
“…대놓고 검사를 따라다니는 깡패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 것 같아?”
“뭐… 그래도, 애꿎은 곳에서 칼빵 맞고 죽는 것보다야…….”
“…….”
이어지는 박판섭의 말에 도윤이 잠시 멈칫했다.
새로운 능력을 각성했다지만, 어디까지나 무작위의 상황을 보여 주는 이계의 초능력.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뿐더러, 자칫 스킬에만 맹신하고 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자신이야 제 한 몸 지킬 자신은 있었지만, 단비는…….
생각을 마친 도윤이 박판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
“내가 알려 주는 곳에, 애들 몇 명만 배치해 줘. 사람한테도 몇 명 붙여 주고.”
“…동생이겠지?”
도윤의 가족 사항을 얼핏 들은 바 있기에, 박판섭이 곧바로 물어 왔다.
도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아무래도… 놈들을 무너뜨릴 계획을, 조금 앞당겨야 할 것 같아. 시간을 두고 천천히, 확실하게 몰락하게 만들 계획이었는데…….”
잠시 말끝을 흐리던 도윤이 눈을 빛냈다.
저 거대한 몸집의 괴물을 완전히 무너뜨리기까지, 최소 10년은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저쪽에서 눈치를 채고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대놓고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황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그에 맞게 계획도 수정해야 한다.
성공한 전략가들은 자잘한 실수는 하되, 큰 흐름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아무래도, 호식이에게 맡겨 놓은 중소기업 인수 건을 조금 서둘러야겠어.’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만약 또다시 자신의 여동생, 단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도윤이 무언가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박판섭에게 말한다.
“일단 지검 근처로 가자. 거기 가서…….”
“잠깐! 잠깐만!”
갑작스럽게 경찰서 출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에 박판섭과 도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요.”
코앞까지 다가와 숨이 차는지 잠시 헥헥거리는 여자를 보며, 박판섭이 ‘아’ 하는 탄성을 터뜨렸다.
“그… 뒤에 앉아 있던 아가씨?”
“네, 네.”
호흡을 가다듬은 여자, 보윤이 박판섭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순간 음흉한 표정을 지은 박판섭이 도윤의 옆구리를 말없이 쿡쿡 찔렀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본데?”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박판섭의 말에, 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윤의 시선을 느낀 보윤이 이내 입을 열었다.
“당신, 미쳤어요?”
갑작스러운 보윤의 말에 박판섭과 도윤이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뭐……?”
황당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박판섭에 아랑곳하지 않고, 보윤이 말을 잇는다.
“그게 아니면, 바보?”
“…….”
박판섭이 쩍 하고 입을 벌렸다.
“아니, 그렇잖아요. 검사나 되는 사람을, 힘 좀 쓴다는 사람들이 알아서 도와주겠다는데, 왜 굳이 귀한 시간 몇 시간씩 소비해 가며, 귀찮은 일에 심력을 낭비하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뭐, 이런…….”
“저한테 중요한 문제예요. 불편하신 게 아니라면, 꼭 좀 답해 줬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는 보윤을 잠시 바라보던 도윤이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기를 잠시.
마침내 도윤이 입을 열었다.
“제가 가진 신분의 힘을 이용해,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어야 옳았던 거라, 말씀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옳은 게 아니라, 당연한 거겠죠. 힘을 가진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런 행동을 당연시 여겨 왔으니까요.”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겪은 일부 권력자들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럴 거라는…….”
“일반화의 오류.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제가 워낙 꼬일 대로 꼬인 년이라.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어요.”
“……?”
“개인의 양심 때문에, 별것 아닌 일이라 당신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별것 아닌 일에 힘 있는 권력자들과 이렇게 척을 지는 행동은 아무도 하지 않아요. 바로 당신처럼.”
“…….”
도윤이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의 말대로,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자신의 행동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을 지도 모른다.
분명 명성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제외한다면, 자신이 한 행동과 언동은 과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행동들이, 수많은 비리 권력자들을 만들어 내는 거겠죠.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
“소신에 따른 용기 있는 말 한 마디가, 세상을 움직일 거라, 저는 확신합니다.”
“…….”
“제가 왜 그렇게 행동했냐고 물으셨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보윤을 보며 도윤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 의미 모를 미소가, 보윤의 가슴 속을 쿡 하고 찔렀다.
잠시 보윤을 바라보던 도윤이, 이내 말을 잇는다.
“그게, 제 소신(所信)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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