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기업인수계획 (1)
“무슨 일 있었니?”
“네? 아, 아니에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보윤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할아버지, 박보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도윤 일행과 헤어지고 다시 모임 장소로 돌아온 지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보윤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소신껏 행동한다. 말은 쉽지…….’
속으로 중얼거린 보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실제 행동으로 보여 준 도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면, ‘당장 꿈 깨’ 라며 귀싸대기를 올려붙였을 것이다.
제 소신껏 행동한다?
말은 쉽다.
그 하찮은 소신 때문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그저 입만 다물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행동해도 중간 이상은 간다.
공직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월급쟁이들 중 안주머니에 사표 품지 않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더럽고 치사한 일을 겪어도, 봐도 못 본 척, 예스맨으로만 살아가는 이유.
한순간의 선택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는 말이다.
보윤이 힐끗 한쪽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박성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신 또한 그러셨죠.’
잠시 서글픈 눈빛을 짓던 보윤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
“응?”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물로 목을 적시던 박보군이, 보윤의 부름에 곧바로 대답했다.
“부탁이 있어요.”
“부탁?”
이어지는 보윤의 말에 박보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탁이라니?
분명 바깥에서는 수도 없이 듣는 단어건만, 자신의 손녀인 보윤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자 상당히 어색했다.
“부탁, 부탁이라… 허허허.”
“안 되나요?”
헛웃음을 터뜨리는 박보군을 보며, 보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윤아.”
“네?”
“니가 할애비한테 하는 부탁. 처음인 것 알고 있니?”
“…아, 그런가요?”
박보군의 말에 보윤이 한쪽 손으로 애꿎은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 어렵다던 사법고시를 패스했을 때, 할애비가 큰맘 먹고 구매한 차량도 거절했었잖니. 절대 받을 수 없다고.”
“아 그건 정말 부담스러워서…….”
“아무튼, 그냥 주겠다는 선물도 거절하던 녀석이 먼저 부탁이라니, 조금 긴장을 해야겠구나.”
말을 마친 박보군이 정말로 긴장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정말… 다 큰 손녀 자꾸 놀리실 거예요, 할아버지?”
“허헛, 허허허허허.”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린 박보군이 말을 잇는다.
“말해 보거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
박보군의 말에 입을 다문 채, 잠시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던 보윤이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 지검장님이랑, 자리를 좀 마련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응? 지금 서울지검장이라면… 정승만이?”
“네.”
보윤의 대답에 박보군이 자못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곧 검찰총장이 될 인물과 독대라… 우리 손녀가 무슨 생각인지, 이 할애비가 상당히 궁금한데?”
“무슨 특별한 생각이 있는 건 아니구요.”
곧바로 말을 이으려던 보윤이 잠시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면?”
“그… 제가 좀 난리를 쳐 놓은 게 있어서, 무작정 찾아가면 아마 안 만나 주실 것 같아서요.”
“난리?”
보윤의 말에 박보군이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저 문전박대 하지 말라고, 할아버지가 전화 한 통만 해 주시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내가 같이 가 줄 수도…….”
“아니, 그건 정말 괜찮아요!”
박보군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보윤이 급히 손사래 쳤다.
사실, 특정 인물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할아버지의 손을 빌리는 것도 보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거북했다.
이 자리에 오기 전, 처음 계획이야 할아버지에게 직접적으로 얘기를 하고, 목적을 이룰 생각이었지만…….
‘그 남자…….’
속으로 중얼거리던 보윤이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헝클어뜨렸다.
유독 그 남자가 마지막에 말한 ‘소신’이라는 단어가 보윤의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이런 기분으로는, 절대 직접적으로 박보군의 손을 빌릴 수는 없다.
‘내가 설득해야 해.’
생각을 마친 보윤이 고개를 들어 박보군을 바라본다.
“그저 찾아가면 쫓아내지만 말아 달라고… 그 말씀만 좀 전해 주셨으면 해요.”
“…….”
박보군이 잠시 보윤의 두 눈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눈빛.
자존심이 강한 자신의 손녀가 저런 눈빛을 지었을 때는, 절대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박보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옅게 미소 지은 박보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게 하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순식간에 표정이 밝아진 보윤이 활짝 미소 지었다.
그 찬란한 미소에 주변에 있던 몇몇 젊은 남자들이 보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원체 유명 인물이었기에, 이 자리에 모인 젊은 남자들 대부분이 혹시나 보윤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온 상황이었다.
실제로 본 모습은 역시나 명불허전.
오히려 소문이 실물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연신 보윤의 얼굴을 힐끗힐끗 훔쳐보기 바빴던 남자들의 시선이, 지금 이 순간 보윤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바로 지검에 조금 갔다 올게요!”
“잠, 잠깐……!”
박보군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보윤이 출입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박보군이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이내 주변에서 들려오는 아쉬운 탄성이 귀청을 때렸다.
“왈가닥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건만…….”
짧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박보군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20평 남짓한 2층 사무실.
책상 위에는 서류 더미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고, 서류 사이사이로 붙은 포스트잍은 제각각 알록달록한 색깔들을 자랑했다.
저녁때가 한참 지난 오후 8시.
직원들은 모두 퇴근을 했는지, 비어 있는 의자에, 불만 켜져 있는 사무실 내부에 경쾌한 벨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대는 너무 달라요~
내가 본 어느 눈빛보다~ 날 기대하게 해~ 언젠가 날 너무나 감동시킬~ 것 같은…….>
한참 TV에서 유행하고 있는 시트콤 OST를 벨소리로 지정해 놓았는지, 그 노랫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우기를 잠시.
서류 더미 사이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누군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세웠다.
“끄으응…….”
아무렇게나 자란 턱수염에 헝클어진 머리.
바지 밖으로 삐져나온 와이셔츠는 상당히 구겨져 있었다.
말 그대로 거지꼴이 따로 없는 남자.
한차례 쩍 하고 크게 하품을 한 남자가 제 머리를 벅벅 긁더니, 이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윽고 화면을 확인한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우! 강 사장! 아니지, 서울지검의 얼굴 강 검사님이 저 같은 놈한테 전화를 다 주시고, 영광입니다.”
이내 통화 버튼을 눌러 휴대폰을 입으로 가져다 댄 남자, 호식이 반갑게 소리쳤다.
수화기 너머의 남자, 도윤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중소기업들의 영웅, 장 변호사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영웅은 무슨…….”
호식이 진심으로 듣기 거북한지, 혼자 작게 손사래 쳤다.
“언론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던데?”
“…….”
도윤의 말대로 요즘의 호식은 중소기업의 떠오르는 구세주였다.
얼마 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하도급 거래 특별 실태조사를 벌였는데, 하청업체에 하도급 대금을 법정지급기일 안에 지급하지 않은 대기업들이 무더기로 적발되었다.
당연히 정부에서는 이를 대기업들의 횡포로 보고, 즉각 지연된 기간만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시정명령을 내렸는데, 문제는 이에 대한 대기업들의 반응이 가관이었다는 것이다.
속칭 대기업 임원진이라는 사람들이 마치 정부의 명령을 즉각 이행이라도 하듯, 하청업체, 중소기업 사장들을 경리부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사장들에게 소위 ‘갑질’을 시작하는 것이다.
정부가 칼을 빼 든 이상, 하는 시늉은 하겠다.
하지만, 대금 지급은 이전과 똑같다.
혹여나, 정부의 조치를 등에 업고, ‘이때가 기회다.’ 싶은 마음으로 달려들었다가는…….
더 이상 해당 업체와는 계약도 일체 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의 힘으로 철저히 짓밟아 줄 것이다.
이런 대기업들의 반응에 힘이 없는 중소기업 사장들은 어쩔 수 없이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정부에서 대기업이 명령을 이행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세금 납부.
그 세금까지 바로 중소기업 사장, 자신들이 떠안고 말이다.
물론 이 상황을 평소 친분이 있던 작은 회사 사장에게 모두 전해 들은 호식은 당연히 격분했다.
가뜩이나 최근, 작은 문제로 집안 어르신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터였다.
더군다나, 대기업 집안 자제로서 그들의 횡포가 어떤 것들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호식이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발 벗고 나선 지가 약 한 달.
도윤과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것도 그 즈음이었으니, 아마 도윤 입장에서도 궁금했으리라.
“마무리 단계이긴 한데, 아직이야.”
“언론 기사까지 터뜨린 마당에, 이제 대기업에서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텐데?”
도윤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자, 호식이 쓰게 웃으며 대답한다.
“당장 조치야 취해지겠지만, 가장 우려스러운 건, 역시나 앞으로의 문제겠지. 마음 같아서는 우리 기업으로 모두 끌어들이고 싶지만, 너도 알다시피…….”
“지금 상황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집에서 입고 있던 옷도 다 벗기고 쫒아내겠지.”
“…잘 아네.”
도윤의 말에 호식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도윤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신혜 씨랑은 어때? 뭐, 당사자들만 괜찮으면 그 정도 역경쯤은 이겨 낼 수 있잖아?”
“아주 좋아 죽겠다, 이 자식아.”
도윤의 입에서 황보신혜가 거론되자, 호식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부럽네.”
작게 중얼거린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연인으로서 교제를 시작한 지도, 벌써 반년은 훌쩍 지났다.
굳이 묻지 않아도, 한참 깨가 쏟아질 때리라.
“너도 연애도 좀 하고 그러지 그러냐? 어휴, 수화기에서 홀아비 냄새가 나는 듯한 이 느낌.”
호식이 장난스럽게 중얼거리자, 도윤이 옅게 미소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뭐 언젠가는 생기겠지. 그보다, 조금 심각한 일이 생겼다.”
“심각한 일?”
도윤의 말에 호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윤이 침묵을 지키기를 잠시, 곧바로 말을 잇는다.
“…놈들이 또 움직이기 시작했어.”
“뭐?”
호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도윤이 말하는 ‘놈’들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설마…….”
“니 생각이 맞을 거야. 해서, 중소기업 인수 건이랑 병원 마케팅 건. 계획을 조금 앞당겼으면 해.”
도윤의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곰곰이 생각하던 호식이 말한다.
“분명, 이제는 병원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되지만, 섣불리 진행했다간 조금 리스크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
작게 미소 지은 도윤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해 보자.”
“…하, 진짜 무식한 새끼.”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 호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잇는다.
“당장은 안 돼. 아까 말한 중소기업 건, 아직 마무리가 덜 됐거든. 어쩌면 이번 건만 잘 마무리되면, 계획에 도움이 될 수도 있어.”
“…도움?”
도윤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호식이 씨익 웃으며 설명을 이어 나간다.
“……!”
호식이 설명을 이어 나갈수록 도윤이 눈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호식의 설명이 모두 끝났을 때.
“니 말이 사실이라면…….”
잠시 말끝을 흐리던 도윤이 씨익 미소 지었다.
“…놈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 줄 수도 있겠는데?”
도윤의 머릿속으로 수없이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반드시…….”
도윤이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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