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기업인수계획 (2)
“지검장님, 박보윤 검사 도착했습니다.”
“끄응…….”
담당 실무관의 말에 서울지검 검사장, 정승만이 짧게 침음을 내뱉었다.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 청문회가 이제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가뜩이나 민감하고 예민한 시기에, 평소 골칫거리로 여기던 아래 부하 직원이 또 한 번 사고를 쳤다.
아무리 몇 번인가 내쳤다지만, 설마 제 할아버지를 통해 직접 면담을 요청할 줄이야!
한차례 크게 데인 적 있는 정승만은, 어지간한 인물.
특히 힘 있는 권력자들과의 만남을 극도로 자제해 오고 있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그런 사람들을 만나 봐야, 자신에게 해만 됐지, 득 될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현 국무총리, 박보군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직접 얼굴 한 번 보자고 했다면 또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그냥 단순히 자신의 손녀를 문전박대 하지만 말아 달란다.
부하 직원으로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도통 만나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아 답답해 죽으려고 한단다.
물론 박보윤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정승만은 절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 더러운 성질머리에 보나마나 인사발령 건으로 따박따박 쏘아붙이려 하겠지.’
정승만은 박보윤의 얼굴에 현혹되지 않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이내 한차례 깊은 한숨을 내쉰 정승만이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잠시 지검장실 밖에서 소음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벌컥 하고 출입문이 열렸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지검장님.”
반가운 얼굴로 허리를 숙이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며, 정승만이 쓰게 웃었다.
보윤의 말속에 뼈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보윤이 너도 알다시피, 내가 요즘 좀 바쁘지 않니. 이해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아, 물론이죠. 청문회가 이제 한 달도 안 남았죠? 워낙 정직하고 깨끗하신 분이라 큰 걱정은 되지 않네요.”
밝은 미소를 입에 문 채 말을 잇는 박보윤을 보며, 정승만이 순간 흠칫했다.
자신이 아는 박보윤은 절대 이런 인사치레성 말을 예의상 뱉어 내는 인물이 아니다.
“크흠, 우리 지검 최고의 미녀… 아니, 일 잘하는 검사가 해 주는 칭찬이라 그런지, 내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박보윤이 그냥 예쁜 검사라는 말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상기한 정승만이 급히 말을 바꿨다.
‘하아, 누가 상급자인 건지, 참…….’
문득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진 정승만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안에서는 마누라 눈치에, 밖에서는 부하 직원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신세.
인사 시즌만 되면, 해당 대상자들은 한낱 개보다 못한 존재들이라는 말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정승만이었다.
“어머, 예쁜 검사라고 해 주시는 것도 기분 좋은데, 제가 그렇게 예쁘지는 않은가 보네요.”
“뭐, 뭐?”
이번에는 정승만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인가?
정승만이 평소와 유독 다른 모습을 보이는 박보윤을 멍하니 쳐다보며 말한다.
“…그냥 얘기해. 이러는 게 더 무서우니까.”
“네?”
박보윤이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천진난만함을 가장한 그 가식적인 모습에, 정승만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 절대 하지 않는 게 평소 자네 성격 아닌가. 총리님에게 부탁까지 하면서 나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 분명히 있을 텐데?”
정승만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박보윤이 잠시 후,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무슨 청탁이라도 하러 온 것 같네요. 그저 내치지만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던 건데…….”
“그 부분은 내가 정식으로 사과하지. 미안하네.”
“…….”
이내 사과의 말까지 하는 정승만을 잠시 바라보던 박보윤이 말을 잇는다.
“저를 정말 악인(惡人)으로 만드시네요. 불편해하시는 것 같으니까, 곧바로 본론만 말씀드릴게요.”
보윤의 입에서 원하는 말이 나오자, 정승만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래, 그래. 뭐든 얘기해 보게. 혹시 인사발령 건 때문에 그러나? 어차피 곧 있으면 하반기 정식 인사발령이야. 공안부서로 원상복귀시켜 주겠단 약속은 못 하겠지만, 지게꾼 노릇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아니, 계속해도 괜찮아요.”
“……?”
보윤이 발끈할 것을 예상하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잇던 정승만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신임이나 하는 일을 갑작스럽게 시킨 것도 모자라, 이제는 원래 자리마저 보존시켜 줄 수 없다는 말을 했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무언가 잘못되었다.
자신이 아는 박보윤은 절대 이런 인물이 아니다.
“대, 대체 나한테 왜 그러나?”
“네? 뭐가요?
더듬더듬 말을 잇는 정승만을 보며, 보윤이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공안부로 꼭 복귀시켜 달라고 했잖나. 그런데 왜…….”
“아!”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짝’ 하고 손뼉을 친 보윤이 작게 미소 지었다.
“지검장님도 생각이 있으셔서 그렇게 발령을 내셨을 텐데, 제가 너무 제 고집대로 땡강을 부려 왔던 것 같아서요. 이 자리를 빌어, 저도 지검장님께 사과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보윤이 앉은 채로 짧게 고개를 숙이자, 정승만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연달아 벌어지자, 이제는 더 놀랄 힘도 없었다.
“아니, 아니야. 정기 인사시즌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원치 않는 인사발령이 나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지 않겠지. 나 같아도 그럴 거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싱긋 미소 짓는 보윤을 잠시 바라보던 정승만이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그래서, 혹시 가고 싶은 부서라도 있나?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지게꾼을 계속할 필요는 없을 텐데, 희망 부서가 있으면 내가 최대한 고려하겠네.”
“음…….”
겉으로는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보윤은 속으로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이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린 보윤이 정승만의 두 눈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묻는다.
“제 전임 검사, 그러니까 강도윤 검사가 이번에 복직을 한다죠?”
“…응? 도윤이?”
보윤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 거론되자, 정승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가 어떻게 도윤이를 알지?”
“아, 특별히 친분이 있는 건 아닌데… 제 전임 검사가 어떤 사람인지, 제가 알고 있는 게 이상한가요?”
“…….”
보윤의 말에 정승만이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보윤의 성격이라면 도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도 아니다.
아마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알아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개인 신상정보를 모조리 파헤쳤으리라.
“…생각해 보니, 충분히 알 수도 있겠구만. 우리 지검에서 도윤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
“명성을 잡은 영웅, 서울지검의 희망. 소문이야 익히 들어 왔지만, 직접 본 건 처음이었죠.”
“응?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고?”
더더욱 눈을 크게 뜨는 정승만을 보며, 보윤이 말을 잇는다.
“혹시 그 사람, 복직 후에 어느 부서로 보낼 생각이신지, 제가 알 수 있을까요?”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 친구는 특수부에 보낼 예정이기는 한데…….”
“그럼 저도 특수부로 보내 주실 수 있을까요?”
“특수부에? 공안에서 굳이 왜 특수부로…….”
공안부와 특수부.
어느 지검, 심지어 대검을 가도 두 부서 간에 미묘한 경쟁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이제 검사 경력 5년 차가 훌쩍 넘은 보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제가 조금 관심이 생겨서요.”
“……!”
정승만이 떡 하고 입을 벌렸다.
관심?
갑작스럽게 특수부에 관심이 생겼다는 말은 아닐 테고, 만약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올해 들은 얘기 중 가장 충격적인 얘기였다.
싱긋 미소 지은 보윤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특수부 인사 티오, 최소 2자리는 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가능하면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검장님.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입을 다문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승만을 향해, 한차례 허리를 숙여 보인 보윤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쿵!
작은 소음과 함께 출입문이 닫히자, 그때까지 입을 벌리고 있던 정승만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저 또라이가, 남자한테 관심이라니…….”
자신에게 작업을 치는 남자들을,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만도 못하게 보는 사람이 박보윤이다.
“…불쌍한 놈.”
문득 든 생각에 정승만이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필 걸려도 저런…….”
잠시 말끝을 흐리며 도윤을 떠올린 정승만이 진심으로 도윤의 앞날을 빌어 주기 시작했다.
* * *
흠칫.
갑작스레 오한이 든 듯 도윤이 잘게 몸을 떨었다.
“뭐야, 감기야?”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윤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호식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 갑자기…….”
도윤이 제 팔을 쓰다듬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 도윤을 잠시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호식이 말을 잇는다.
“아무튼, 지금까지 말한 첫 번째 계획이 마무리되면, 곧바로 비룡회사에 대한 인수를 시작할 거야.”
비룡.
최근 10년간 대한민국 외식업계에서 항상 중하위권은 유지하던, 중소기업 중 하나다.
특히나 비룡의 초대 회장인 박만수는 자그마한 떡볶이 포장마차로 사업을 시작하여, 전국에 50개 이상의 체인점을 둘 정도로 회사를 키운, 자수성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언론에 자주 거론되곤 하였다.
그런 비룡이, 2년 전 박만수 회장이 죽고,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얼마 전에는 막대한 사업 부채를 안고 부도 일보 직전에 있었다.
물론, 그런 회사를 도윤이 굳이 인수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벤치마킹… 정말 할 거야?”
“…….”
“외식업은 명성의 주력 중의 주력이야. 외식업만 놓고 보면, 시장 점유율이 다른 곳은 따라올 곳이 없을 정도지. 다 무너져 가는 중소기업 인수하다, 새롭게 스타트업 하더라도 명성을 이기기에는…….”
“그래서 외식업을 선택한 거야.”
“뭐?”
도윤의 말에 호식이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가장 자신이 있는 분야, 왕좌를 절대 뺏기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자신들이 최고라는 인식.”
“…….”
“그런 상황에서 그쪽 업계에 등장한 작은 회사 하나. 명성에서는 아마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 굳이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대기업이라도 외식업계 분야에서는 명성에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거야. 물론 자기들도 그 사실을 잘 알 테고.”
“…….”
“자연스럽게 놈들은 방심할 거고, 만약 그런 상황에서 놈들이 왕좌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면…….”
“엄청난 충격이겠지. 어쩌면, 재기 불능이 될 정도로… 그 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워서 문제겠지만.”
“가능해. 계획대로만 되면.”
도윤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도윤을 잠시 바라보던 호식이 말한다.
“뭐, 좋아. 생각이 있겠지. 인수 건이 정상적으로 마무리된다고 치고, 그 이후에 기업 인지도를 높일 방법은?”
호식의 물음에 도윤이 씨익 미소 지었다.
“성명병원.”
“……!”
호식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제는 비단병원인가?”
“너…….”
“비싼 돈 주고 받아 온 병원인데, 슬슬 이용해야겠지? 환자들도 더욱 끌어들이고 말이야.”
말을 마친 도윤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이제 남은 건…….
생각을 마친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 말을 잇는다.
“슬슬 지금까지 뿌려 놓은 것, 이제 하나씩 거둬들여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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