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기업인수계획 (3)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초고층 건물.
건물 외벽이 유리로 되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을 줬다.
온갖 부류의 회사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이곳에서도, 이 유리 건물은 특히나 웅장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당연할 것이다.
이 건물은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항상 대한민국 10대 그룹에 손꼽히던 명성의 건물이었으니까.
건물 최상층 바로 아래, 50평은 훌쩍 넘어 보이는 크기의 사무실이 위치해 있다.
사무실 주인이 상당히 검소한 성격인지, 내부는 오히려 특별할 게 없었다.
수많은 책이 꽂혀 있는 책장이 몇 개 있었고, 창가 쪽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커다란 책상 하나가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곳 의자에 앉아 연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
이 어마어마한 명성그룹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을 자랑하는, 숨은 권력자.
명성그룹 부사장, 박건우가 책상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강도윤 검사가 이번에 복직한다고요?”
박건우의 물음에 사무실 한쪽,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한다.
“예. 아마 특수부로 갈 것 같습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라…….”
박건우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끝을 흐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요즘 크고 굵직한 사건들은, 특수부에서 도맡아 처리하고 있을 테죠?”
“예. 현재 분위기는 다른 어느 부서도 특수부에 미치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초대형 군납비리 사건부터 서울경찰청장 구속 사건까지, 모두 깔끔하게 마무리하면서 지검장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박건우의 인상이 조금 더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지원과 편의를 많이 받아 힘이 강한 특수부에서 그 정도 실적까지 올리니, 다른 부서 사람들은 입만 삐죽 내밀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죠.”
“그런 곳에 강도윤 검사를 발령이라… 그 정도로 실적에, 그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면, 아무도 특수부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왜…….”
“그래서 티오가 난 겁니다. 최소 두 사람은 더 좋은 곳으로, 영전(榮轉)이 확정된 상황이거든요.”
“음…….”
남자의 말에 박건우가 침음을 삼켰다.
좋지 않다.
안 그래도 사사건건 일을 방해하여 회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놈의 손에, 칼까지 쥐어지게 되면…….
얼마나 더 큰 피해를 입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김 검사님은, 이번 하반기 발령 대상자십니까?”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박건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눈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아, 저는 뭐, 지금도 괜찮습니다. 마음만 먹으면야, 원하는 자리 찾아가는 것쯤이야 문제도 아니지만…….”
남자의 말에 박건우가 옅게 미소 지었다.
“만약 이번 탄핵안이 가결되면, 김 검사님 집안에 또다시 경사겠군요. 말씀 좀 잘 부탁드립니다, 김재욱 검사님.”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항상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는 사적인 자리에서 부사장님을 형이라 생각합니다.”
“영광입니다.”
박건우가 한층 짙어진 미소로 말을 잇는다.
“혹시나, 김 검사님은 특수부 쪽, 생각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저는 지금이 딱 좋아서요. 골치 아픈 것은 딱 질색이기도 하고, 또…….”
잠시 누군가를 떠올린 김재욱이 싱긋 미소 지으며, 말을 잇는다.
“가까운 곳에, 아름다운 미인도 있어서 더 좋구요.”
“…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박건우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박보윤 검사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부사장 님도 알고 계십니까?”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그보다…….”
“……?”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재욱을 보며, 박건우가 말한다.
“듣기로, 박보윤 검사도 이번에 특수부에 지원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데…….”
“뭐라구요?”
박건우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김재욱이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그거, 확실한 정보입니까? 아니, 내부 직원인 저도 모르는 걸, 어떻게…….”
“잊고 계시군요.”
“…….”
“아무리 세가 기울었어도 명성은 명성. 특히나 터닝 포인트가 필요한 시점에서, 저희는 어디에든 눈과 귀를 열어 두고 있습니다.”
“명성의… 정보…….”
잠시 말끝을 흐리던 김재욱이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갑작스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
이런 더러운 기분의 예상은, 항상 들어맞곤 했다.
공안부 출신인 박보윤이, 다른 부서도 아니고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특수부를 지원했다.
단순히 특수부가 잘나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박보윤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따위 이유는 절대 아니다.
자존심이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박보윤이, 고작 그런 이유로 특수부에 지원했을 리가 없다.
차라리 다시 공안부로 돌아가, 실적을 세워 특수부의 세를 꺾으려 든다면 모를까.
“설마, 그놈 때문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에, 김재욱이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박보윤의 집안인 조국일보 사람들과 자신의 집안사람들이 모두 참석했던 그 모임.
당연히 그 모임에는 김재욱도 참석했었다.
누구보다 모임 장소에 빨리 도착했고, 다른 모든 일들을 제쳐 두고, 박보윤만 찾고 있었다.
이윽고, 박보윤이 총리인 박보군과 함께 모임 장소에 나타났을 때.
평소 복장과는 전혀 다른,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고 옅게 화장한 채 나타난 박보윤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심장이 떨렸던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보윤을 바라보기를 잠시.
웬 미친놈이 모임 장소에서 흉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김재욱이 잠시 자리를 피하고 있자,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문제는, 출동한 경찰관들이 흉기를 휘두른 미친놈뿐만 아니라, 놈을 제압한 젊은 남자까지 데리고 갔는데, 무슨 생각인지 박보윤도 그들을 따라 건물을 나섰다는 것이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미친놈을 제압한 젊은 남자가, 서울지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강도윤이라는 놈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박보윤이 강도윤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언제부턴가 지검 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알아본 바로, 고졸 출신에 집안도 별 시원치 않은 놈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보윤이가, 강도윤 그놈 때문에 특수부에 지원했다, 이 말씀이십니까?”
“뭐, 개인 간의 남녀 관계를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 부분은 그저, 제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죠.”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김재욱을 보며, 박건우가 싱긋 웃으며 쐐기를 박는다.
“집안 수준 자체야 어마어마하게 차이 나지만, 두 사람 다 한참 불타오를 나이인 20대. 그런 게 눈에 들어올까요? 특히나, 손녀를 끔찍이 생각하는 총리님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만.”
김재욱이 타오르는 듯한 시선을 들어, 박건우를 바라본다.
“혹시나, 제가 보윤이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알고, 그걸 이용하려 하는 거라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뒷말을 삼키는 김재욱을 보며, 박건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 김 검사님이 말씀하셨죠. 사적인 자리에서 저를 형으로 생각하신다고.”
“…….”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김 검사님을 친동생으로 생각합니다. 벌써 알고 지낸 게 몇 년인지, 잊으셨습니까?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도, 제가 그런 거짓말을 해 봐야, 저한테 득 될 건 아무것도 없겠죠.”
“하…….”
이어지는 박건우의 말에 김재욱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했다.
고작 질투심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을 쏘아붙이는 꼴이라니.
“미안합니다. 제가 좀 예민했네요.”
곧바로 사과하는 김재욱을 보며, 박건우가 싱긋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사과할 거리도 아닌데요.”
“…….”
박건우가 입을 다문 채, 상념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가지고자 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진 권력과 집안의 힘은, 그런 것들을 충분히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자신이 점찍어 둔 무언가를 남에게 빼앗긴 적도 없었다.
“강도윤…….”
씹어 내뱉듯 중얼거린 김재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확하지 않은 정보에 휘둘릴 정도로, 자신은 어리석지 않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그 이후에 행동해도 늦지 않았다.
“제가 다시 한 번 연락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요.”
짧게 고개를 숙이는 김재욱을 보며, 박건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전화 주십시오. 명성의 박건우가 아닌, 형으로서 동생을 돕고 싶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잠시 박건우를 바라보던 김재욱이 홱 하고 몸을 돌려, 출입문을 빠져나갔다.
쿵!
작은 소음과 함께 출입문이 완전히 닫히자, 은은한 미소를 입에 물고 있던 박건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해 간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지극히 무심한 무표정.
“잘됐군. 만약, 김재욱이 특수부에 들어간다면…….”
이후의 상황을 상상하던 박건우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겠어.”
박건우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사무실 내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아니, 그래도 세금까지 이쪽에 물리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지연이자를 지급해 주시겠다고 불러 놓고, 막상 세금계산서를 들고 오니 돈을 못 주겠다니요!”
후줄근한 점퍼 차림의 중년 사내가 고래고래 고함치기 시작했다.
“허, 김 사장. 저희랑 거래 한 번 하고 말 겁니까? 저희 뒤에 누가 버티고 있는지 잊으셨어요?”
야비한 인상의 사내의 말에 중년 사내가 발끈한다.
“설마, 설마, 명성에서 이런 지시를 내린 겁니까? 적당히 하는 시늉만 하고, 힘없는 하청업체들 단물 쪽쪽 빨아먹으라고, 그렇게 시켰던 겁니까!?”
“그만큼 위에서 일거리도 줄 것 아닙니까. 김 사장, 정말 알 만한 사람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올 거요? 업체도 일거리가 있어야 돈을 벌지, 당장 일거리가 끊기면 누가 가장 손해를 볼 것 같아?”
“뭐요?”
중년 사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아니, 그렇잖아. 위에서는 어차피, 다른 업체에 일거리 주면 그만이고, 이쪽 아니라도 일거리 받겠다고 줄을 서 있는 상황인데, 우리는 김 사장네에 양질의 일거리를 물어다 주고, 김 사장은 그에 대한 명목으로 수고비만 조금 주면 되는 걸, 이렇게 자꾸 빡빡하게 나오겠다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던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중년 사내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앞으로 김 사장 업체에는 더 이상 일거리를 주지 않을 거요. 거래는 없단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큭!”
괴로운 표정으로 와락 인상을 구긴 중년 사내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럼… 그럼, 최소한 세금으로 낼 돈만이라도 좀 주십쇼. 부가세까지 저희가 독박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나는 이제 모르겠고. 위에서도 요즘 업체들이 변호사 선임한 건 때문에 있는 대로 열이 뻗쳐 있는 상황이니까, 직접 찾아가서 얘기해 보든, 알아서 하쇼. 어디 주제에도 안 맞게, 하빠리 변호사 하나 구해 와서는…….”
털썩.
이윽고 중년 사내가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그 순간.
사무실 출입문이 ‘벌컥’ 하고 열리더니, 두 남자가 내부에 들이닥친다.
“뭐, 뭐야? 너희 뭐야!?”
흉흉한 기세로 들어오는 두 사내를 발견한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놀라 고함쳤다.
“니가 말한 그 하빠리다, 이 새끼야.”
사내, 호식의 말에 야비한 인상의 두 눈이 부릅떠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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