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정의의 철퇴
“변, 변호사?”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변호사님……!”
지금 막 들어서는 호식의 얼굴을 확인한 하청업체 사장인 중년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혹시나 싶어, 출발하기 전에 미리 연통을 넣어 놨는데,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국가에서 갑질하지 마라고 연체이자 지급하랬더니, 법인세에 부가세에, 아주 그냥 독박을 씌우는구만. 당신네들 배만 채우면 장땡이지?”
“뭐, 뭐라고?”
“아니, 지금 상황이 참 황당하네. 대기업들 횡포, 짐작이야 했지만 확실히 듣는 거랑 실제로 보는 거는 느낌이 확 달라. 아주 그냥 개스끼들이여, 개스끼들.”
“뭐, 개……?”
호식의 말을 따라하던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턱’ 하고 뒷목을 잡았다.
골이 아픈지 인상을 찌푸리며 연신 뒷목을 주물럭거리던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변호사라고. 변호사면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반말에 욕설에, 아무렇지도 않게 폭언해도 되는가 보지?”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말하자, 기가 찬 표정을 짓던 호식이 잠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뭐, 제가 언제 처음 보는 사람한테 폭언을 했다고… 그냥 혼잣말한 건댑쇼?”
“…큭, 좋아. 그렇다고 치고…….”
잠시 말끝을 흐리던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힐끗 하청업체 사장을 돌아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보아하니 김 사장 손님인 것 같은데, 변호사님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가서 좀 기다려 주시지. 아직 대화가 안 끝나서 말이야.”
“엥?”
호식이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문제 있나?”
“아니, 이건 뭐…….”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호식이 힐끗 눈앞의 사내와 마찬가지로 하청업체 사장을 돌아봤다.
여전히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장을 보며, 인상을 굳힌 호식이 말을 잇는다.
“죄송한데, 저쪽 사장님이 제 고객님이라서요. 국가에서 명령한 법정연체이자, 그거 지급하는 거 보기 전까진 못 나갈 것 같은데?”
새파랗게 어린 호식이 은근히 말을 놓자, 부아가 치미는지 잠시 호식을 노려보던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지급 안 해 준다고 했나?”
“뭐요?”
“나는 한 번도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없는데? 모두 지급해 줄 거야. 세금도 물론 우리가 다 낼 거고.”
“…….”
입을 다문 채 멍한 표정을 짓는 호식을 바라보며,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아! 뽀너스도 두둑하게 챙겨 줘야겠군. 그동안 우리 밑에서 고생 많았는데, 따로 회식비 한 번 못 챙겨 줬구만. 김 사장, 내 사과하네.”
“어, 어…….”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어버버 벌리는 하청업체 사장을 보며, 호식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제야 눈앞에 있는 쥐새끼 같은 인상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아까 사내가 얘기한 대로, 아마 앞으로 해당 하청업체와 거래를 완전히 끊어 버리겠다는 뜻이리라.
“그런 보복성 조치에, 나라에서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요?”
호식이 야비한 인상의 사내를 노려보며 중얼거리자, 사내가 또 한 번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복성 조치? 그게 무슨 말이지?”
“연체이자에 대한 보복으로, 앞으로 업체와의 거래를 완전히 끊겠다는 것 아니오?”
화가 난 표정으로 따져 묻는 호식을 보며, 사내가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다.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기업 입장에서야, 더 나은 조건, 더 이익이 되는 업체와 거래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기업이라는 곳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해 내야만 하는 집단이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업체 거래에 있어 최소한의 신의는 지키는 게 이쪽 업계의 관례고, 예의요. 이미 언론에 보도가 된 상황에서, 이따위 보복성 조치를 하면 다른 업체들은 거래를 할 것 같소?”
“지들이 뭐 어쩔 거야? 먹고살려면 우리한테 일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뭐라고?”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리는 사내를 보며, 호식이 발끈했다.
“아, 아. 뭘 그렇게 흥분하시나? 나도 혼잣말이요, 혼잣말. 혼잣말하는 거 좋아하시더니, 다른 사람이 하는 건 빡이 좀 치나 봐요, 변호사님?”
“이…….”
“어쩌겠어, 이 사회가, 더 많이 가진 놈들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10명 중에 10명이 다 그런 상황인데, 너무 억울할 건 없잖아. 안 그래요, 김 사장?”
“그, 그건…….”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하청업체 사장이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오, 이런. 변호사님, 선량한 시민한테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 웃기지 마시오. 협박은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짓거리가 협박이지. 나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
“아, 설교는 됐고.”
호식의 말을 듣고 있던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손을 휘휘 저었다.
사내가 호식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증거 있소?”
“…뭐라고?”
“아니, 자꾸 보복성 조치, 보복성 조치. 듣자 하니까 기분이 나빠서 말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 가지고 나를 너무 몰아붙이시는 거 아니냐, 이 말이오.”
“…….”
“급변하는 상황에서, 조치 따위야 상대방이 하기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거고, 설령 우리가 다른 업체와 계약을 하더라도…….”
피식 웃음을 터뜨린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말을 잇는다.
“그게 보복성 조치라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우리가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것도 아니고, 정식 계약기간이 끝난 뒤, 같은 업체와 다시 계약을 할지, 하지 않을지는. 전적으로 당사자의 선택 사항 아닌가?”
“…….”
“자유경쟁 시장에서, 국가가 나서 기업 간의 거래와 계약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건 완전히 공산주의 국가들이나 하는 짓이잖아. 안 그래요?”
“회사 이익을 위해 거래하는 게 아니지 않소! 말 그대로…….”
“아, 그러니까.”
호식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사내가 중간에서 말을 끊었다.
“변호사님이니까 잘 아실 거 아니냐고요. 재판에서 사실의 인정은 반드시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 우리 선택이 보복성 조치라면, 그에 대한 증거는 당연히 저기 있는 고소인이나 변호사님이 제출해야 하는 게 맞는 거고.”
“큭…….”
말없이 입술을 콰득 깨무는 호식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린 사내가 하청업체 사장을 돌아본다.
“우리 김 사장, 어째? 당장 밑에서 김 사장만 바라보고 있는 식구들이 수십 명은 될 텐데, 하루아침에 전부 직장을 잃게 생겼네. 수주 50퍼센트 이상을 아마 우리 쪽에서 받아 갔던가?”
“…….”
“아! 바깥식구만 신경 쓸 게 아니었군. 당장 내일모레 딸내미 대학 간다고, 회사 장학금 지원 얘기도 했었지, 아마?”
“부장님!”
하청업체 사장이 결국 제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
그 모습을 발견한 호식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사장……!”
덥석.
당장이라도 무릎 꿇은 사장을 일으켜 세우려던 호식이, 옆에서 붙들어 매는 손길을 느끼곤 멈칫했다.
자신의 팔을 붙잡은 도윤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젠장…….”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호식이 눈을 질끈 감았다.
분하고 원통했다.
아니, 눈물이 나 미칠 것 같았다.
처음 변호사가 되었을 때,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억울함을 자신이 풀어 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자신의 눈앞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은 없게 만들겠노라, 다짐했다.
집안의 엄청난 지원들을 뿌리치고, 고집대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고, 내가 가진 소신만큼은 꼭 지키겠노라, 스스로 약속했다.
특히나, 바로 옆에 있는 도윤의 엄청난 활약들을 보며, 감동을 받아 자신도 꼭 저렇게 살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저 꿈만 꿀 줄 아는 철부지 멍청이일 뿐이었다.
눈앞에서 억울한 일을 뻔히 당하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 불의 앞에 무릎까지 꿇게 만들었다.
“병신 새끼…….”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꽈악 말아 쥔 호식이, 혼자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한심했다.
스스로 한심해 미칠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일어나세요.”
어느새 무릎 꿇은 사장에게 다가간 도윤이,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괜, 괜찮습니다.”
‘이건 또 뭐야?’ 하는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던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하청업체 사장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김 사장, 그동안 정들었던 김 사장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질 뻔했잖아. 얼른 일어나라고. 내 마음이 불편해서…….”
“아니, 아닙니다. 부탁 좀 드립니다, 부장님.”
도리질 치며 꿋꿋하게 무릎을 꿇고 앉은 사장을 잠시 바라보던 도윤이, 야비한 인상의 사내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만해, 이 새끼야.”
“뭐, 뭐라고? 새끼?”
“아, 정정. 앞에 쓰레기라는 단어가 빠졌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미친 새끼가…….”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야비한 인상의 사내를 바라보며, 도윤이 오른손에 쥔 작은 가방을 들어 올렸다.
“이거 보여?”
“무슨 개…….”
곧바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는 사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윤이 손가방의 덮개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연이어 활짝 드러나는 가방 내부 모습에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요즘 나오는 카메라들이 좋더라고. 동영상에 음성 지원까지. 확실히 비싼 제품이 좋긴 좋아.”
카메라를 집어 든 도윤이 야비한 인상의 사내 앞에 약 올리듯 좌우로 흔들어 댔다.
“아까 증거 어쩌고 했었나?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잠시 멍하니 도윤의 손에 있는 카메라를 바라보던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잠시 후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큭, 큭큭큭. 크크크크크크.”
별안간 낮게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사내를 보며, 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웃어?”
“큭큭, 아, 실례.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서 말이야. 그래, 지금까지 찍힌 상황이 증거라, 이 말인가? 그런데…….”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도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잇는다.
“혹시 죄명이 뭔지는 알 수 있나? 보복성 조치… 뭐,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일 뿐더러, 겨우 이 정도 동영상 하나로 검찰이나 경찰이 수사를 진행할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
“확실한 건수도 없이 수사기관에서 찔러보기에는, 우리 윗선에 있는 분들이 제법 대단하신 분들이거든. 니가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도윤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우습지?”
이번에는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어찌나 있는 놈들은 하는 짓이 하나같이 똑같은지, 그게 너무 웃겨서 말이야.”
“뭐라고?”
“나는 우선 이 동영상을, 내가 잘 아는 기자에게 넘겨줄 거다.”
“……!”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일단 언론에서 내보내 세상에 알려지기만 하면, 입건이 되든 되지 않든, 이 동영상 자체만으로 국민들의 지탄을 한 몸에 받게 되겠지?”
“과연 언론에서…….”
“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고. 법보다 무서운 게 국민들의 정서라는 말이 있지. 타이틀은 ‘갑질 기업의 횡포’ 정도가 좋으려나?”
“…니가 기자라도 된다, 이 말이냐?”
작게 입술을 깨문 야비한 인상의 사내가 묻자, 도윤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일단 기사가 보도되고,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 수사기관에서도 가만히 앉아 있지는 못하겠지. 국민의 뜻에 따라,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의의 철퇴를 내려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
“그렇게 되면, 아마 수사가 급물살을 탈 거야. 지금 이곳은 물론, 니가 얘기한 그 윗선 사무실까지. 검찰에서 압수수색영장을 가지고, 모조리 뒤집어엎을 수도 있겠지.”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
“응, 가능해.”
“…….”
도윤의 말에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지?”
품 안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끄집어낸 도윤이 야비한 인상의 사내 눈앞에 그 물건을 들이밀며 말한다.
“그건…….”
잠시 도윤이 들이민 물건을 유심히 살펴보던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공무원증이다.
그것도…….
“대한민국 검사다, 이 새끼야.”
도윤이 사내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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