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탄핵
2004년 5월 14일 아침 10시,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금요일.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멋대로인 환절기 날씨에 일부 사람들은 몸살까지 앓았건만, 이날은 햇볕까지 따스하게 내리쬐는 맑은 날씨였다.
가족끼리 나들이 가기 딱 좋은 날씨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물 밖으로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단순히 평일 오전, 일과 시간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가 숨 쉬는 장소 중 한 곳인 헌법재판소에서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 심판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 직장인 할 것 없이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TV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고, 이윽고 심판은 진행되었다.
그리고…….
<여당을 지지하는 발언은 공직선거법상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했으며 대한민국 선거법을 폄하한 것과 국민투표를 언급한 것은 각각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수동적 그리고 소극적으로 위반하는 데 그치고 있어 탄핵을 기각한다.>
땅, 땅, 땅.
마침내 헌법재판소에 재판관의 법봉(法棒) 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한 곳에서는 아쉬움의 탄식소리가, 또 다른 곳에서는 희열에 가득 찬 환호 소리가 대한민국을 뒤덮쳤다.
* * *
서울중앙지검 인근 법조타운 한가운데 위치한 호식의 사무실.
“탄핵안 가결은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대통령의 정략입니다. 탄핵을 기다리며 버티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TV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현직 야당 국회의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자, 가만히 TV를 바라보고 있던 호식이 피식 미소 지었다.
“정치인들은 어찌나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심판이 끝나니까 더 시끄러운 것 같아.”
TV에서 시선을 땐 호식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 니 말대로 판은 벌어졌어. 탄핵소추가 기각되면서, 지금 정치판뿐만 아니라 재계 쪽도 하루하루가 비상이야.”
“…….”
“여, 야가 작정이라도 한 듯 합심해서 대통령 탄핵을 밀어붙였는데, 설마 기각될 거라고는 그쪽에서도 생각 못 했겠지. 소식통에 의하면, 명성뿐만 아니라, 이번 판에 끼어든 대부분의 기업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하더라. 아마 다른 곳에는 신경 쓸 틈도 없을 거야.”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도윤을 보며, 호식이 말을 잇는다.
“비룡 인수든, 뭐든. 움직이려면 지금이 기회야. 일단 내가 그쪽 라인에 연락을…….”
“아니, 잠깐만.”
“……?”
도윤의 말에 호식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해야 할 일?”
호식의 반문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탄핵소추가 기각되면서, 대통령의 모든 직무 권한이 원상복귀 되었어. 아마, 미뤄졌던 정부기관 중요 인사 내정 건도 다시 진행될 확률이 높아.”
“…대부분의 인사야, 작년 대통령 임기 첫해에 모두 발령이 났을 테고, 니가 말하는 인사라면…….”
“우리 수장.”
호식이 눈을 크게 떴다.
“정승만 지검장님?”
“그래. 내부 회의는 모두 끝난 상태. 아마, 근 시일 내에 인사청문회를 하고, 총장으로 임명되겠지.”
“와우. 든든한 지원군이 생기겠는데?”
호식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씨익 미소 지었다.
“설마, 우리 현명하신 지검장님이 다른 뜻을 품으셨던 건 아니겠지? 가령, 탄핵 가결 쪽에 힘을 실었다든가…….”
“미리 언질을 줬으니까, 그럴 일은 없어.”
도윤의 말에 호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미리 언질을 줬다고? 너, 설마 이번 탄핵소추 결과도 예상했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야?”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도윤을 보며, 호식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진짜, 무서운 새끼…….”
“니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내가 해야 할 일?”
도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나는 이 길로 지검장님을 바로 만나러 갈 거야.”
“만나면?”
호식의 반문에 도윤이 손가방 안에서 작은 휴대용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이거, 터뜨려야지.”
“그걸 지금 터뜨린다고?”
호식의 기억이 맞다면, 지금 도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분명 얼마 전 그 쥐 같은 인상의 사내가 갑질을 하는 동영상이 저장된 카메라다.
“시기가 별로 좋지 않은 것 아냐? 이미 충분히 시끄러워졌는데, 굳이 비장의 카드를 지금 꺼내는 건…….”
호식이 부정적인 어투로 말끝을 흐리자, 도윤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터뜨리는 거야.”
“엥?”
“지금 상황은,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기업인들도 자신들이 싸질러 놓은 똥을 치우기에 여념이 없을 거야. 일분일초가 아까울 테지.”
“그렇겠지. 자신들이 이번 탄핵을 뒤에서 지원했다는 흔적도 지워야 하고, 나중에 꼬투리 안 잡히려면, 탄핵을 예상하고 준비해 놓은 계획들. 그 흔적까지 모두 지워야 할 테니까…….”
“그래. 이런 상황에서 그 사람들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게 뭐일 것 같아?”
도윤의 물음에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호식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을 벌어 줄… 또 다른 사건?”
사건을 사건으로 뒤덮는다.
그 사실을 떠올린 호식의 말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이 순간, 조금이라도 관심을 끌 만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
“제 놈들이 알아서 물고, 뜯어 줄 거다? 몸집을 키우면 키울수록,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게 수월할 테니까?”
자신의 생각들이 호식의 입에서 술술 나오자,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 이제 머리가 조금 똑똑해진 것 같아.”
“원래 똑똑했거든?”
헹 하고 코웃음을 친 호식이 도윤의 두 눈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래서, 언론에는 소스를 어떻게 뿌릴 예정인데? 그때 그, 니가 아는 기자한테 또? 그쪽도 지금 바쁠 텐데…….”
“아니. 이제 슬슬 뿌려 둔 걸 하나씩 이용해야지.”
“뿌려 둔 거?”
잠시 고개를 갸웃한 호식이 묻는다.
“아, 됐고. 머리 아프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부터 말해 봐.”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하는 호식을 바라보며, 도윤이 대답한다.
“불씨를 던져야지.”
“불씨?”
“3일 뒤, 나는 복직할 거야. 아마 특수부로 발령 나겠지. 특수부 부임 후 첫 사건을, 이번 하청업체에 대한 갑질 사건을 수사하게 해 달라고 부탁드리려고 해.”
“…그림 좋겠는데?”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호식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가진 포털 사이트 지분이면, 메인화면에 기사 하나 띄우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
도윤의 말에 호식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다.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 지분… 아니, 강 사장님 지분이 자그마치 30퍼센트가 훌쩍 넘어. 그 정도쯤이야…….”
말을 잇던 호식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어, 어…….”
어버버 하는 표정을 짓는 호식을 보며 씨익 미소 지은 도윤이 이윽고 마지막 말을 잇는다.
“띄워 줘. 메인으로.”
말을 잇는 도윤의 한 손에는 카메라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 * *
명성그룹 오춘화 회장의 저택 대서재.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명성의 식구들을 조용히 둘러보던 오춘화 회장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입이 있는 놈들은 대답해 봐라.”
툭!
오춘화 회장이 손에 쥔 신문지를 테이블 위로 집어 던졌다.
“이번 탄핵소추안. 분명히, 가결되지 않을 거라 본 놈은 한 놈도 없었지?”
“…….”
오춘화 회장의 말에 장남인 오창원을 포함한 모든 식구들이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이런 것들이 내 핏줄을 이어받은, 명성의 식구들이라니…….”
화낼 힘조차 없는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오춘화 회장이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오창원이.”
“…예, 회장님.”
갑작스러운 오춘화 회장의 부름에, 잠시 흠칫한 오창원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대답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분명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나마 저희는 다른 그룹들에 비해…….”
오창원이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오춘화 회장이 눈앞에 있는 신문지 뭉치를 집어 들었다.
파라락!
투욱!
오춘화 회장의 손을 떠나,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신문지 뭉치가 그대로 오창원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그따위 소리나 듣자고 내가 너한테 물었는 줄 알아!”
“…….”
오창원이 입을 다물자, 오춘화 회장이 다시 한 번 버럭 고함친다.
“여기 있는 놈들. 목 위에 달고 있는 대가리가 장식이 아니라면, 한번 말해 봐. 지금 내가 뭘 묻고 있는 거 같아!?”
“…….”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조차 없이, 침묵으로 내려앉는 상황을 보며, 오춘화 회장이 또 한 번 발작하려는 순간.
주변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삼녀 오호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아버지, 혹시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걸 묻고 계신 건…….”
오호순의 말이 이어지자, 오춘화 회장이 희번덕거리는 눈초리로 그쪽을 돌아봤다.
피부를 에일 듯, 그 날카로운 기세에 오호순이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그래도 유일한 계집애라고,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머리는 돌아가는가 보구나.”
이윽고 오춘화 회장의 말이 이어지자, 가만히 듣고 있던 오창원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른 형제들의 반응도, 오창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
어떻게든 오춘화 회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들.
오춘화 회장이 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몰랐던 게 아니다.
단지 그 얘기를 꺼내게 되면,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올까, 그게 두려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있었던 거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눈치 없는 오호순이 기어이 그 말을 내뱉은 것이었고 말이다.
“그래, 기왕지사 니가 꺼낸 말. 니 입으로 직접 얘기해 보거라. 탄핵 가결을 예상하고 그동안 짜 온 사업 계획들을 어떻게 살려야 할지, 그동안 정치인 놈들 배때기로 들어간 우리 돈들은 어떻게 회수해야 할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정치판에서 실패한 그 패인은 뭔지!”
“그, 그게…….”
“단 한 가지라도, 제대로 대답해 보거라.”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 씹어 내뱉는 오춘화 회장을 보며 오호순이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위험하다.
남정네들만 득실거리는 이곳 명성에서, 오직 눈치 하나로만 지금까지 버텨 온 오호순이었다.
수십 년간 내공으로 다져진 그 눈칫밥이 지금 머릿속에서 요란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이쯤 되자, 다른 형제들 또한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 가기 시작했다.
언제 자신에게 총구가 겨누어질지 모른다.
그 압박감이 대서재 내부의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입을 다문 채 식은땀을 흘리는 오호순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오춘화 회장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너 따위 것에게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거라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죄송해요.”
“유일하게, 이번 사태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을 한 놈이 있다.”
“……!”
오춘화 회장의 말에 대서재 내부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그런 식구들을 한차례 둘러보며, 오춘화 회장이 말을 잇는다.
“심지어, 내 핏줄조차 아니지.”
말을 마친 오춘화 회장이 대서재 출입문을 향해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거라.”
오춘화 회장이 마지막 말을 잇는 순간, 대서재 내부에 있던 식구들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곳이 어디인가?
명성의 역사가 시작한 이래, 지난 수십 년 동안 외부인의 출입을 한 차례도 허용하지 않았던, 오직 명성의 식구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스르륵.
대서재 내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출입문을 향해 고정되어 있을 때, 마침내 출입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그 출입문을 통해 대서재 내부로 들어서는 인물을 발견했을 때.
“…….”
사위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깊은 침묵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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