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레드 콤플렉스
“…박건우?”
지금 막.
오로지 명성의 핏줄들에게만 허락된 장소인 대서재에 들어서는 인물을 보며, 오창원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예상은 했다.
바로 손아래 동생인 오길태가 옥살이를 하게 되고, 나름 집안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오성춘마저 죽지도, 살지도 못한 병신이 되었다.
가족들 앞에서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가슴속에서는 천불이 났을 것이다.
정을 떠나서, 핏줄에 대한 신뢰는 아마 그 무렵부터 완전히 무너져 내렸으리라.
자신의 아버지인 오춘화 회장은 핏줄에 대한 정 따위와는 비할 바 없이 명성을 끔찍이 여긴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보다 유능한 인재를 컨트롤 타워 안으로 들이는 게 옳다.
자신이 만약 오춘화 회장이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 테니까.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우리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속으로 중얼거리던 오창원이 이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고작 그따위 이유로 박건우를 이곳에 들이기에는, 지금의 회사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다.
명성이 이 땅에 세워진 이래,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평소 개차반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오춘화 회장 앞에서만큼은 침묵으로 일관하던 넷째, 오남규도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오남규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대서재에 들어선 박건우를 향해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나가, 나가 이 새끼야! 집안 구두나 닦던 천한 놈의 자식이, 어디 감히……!”
“…….”
오남규가 외치는 고함 소리에 박건우가 움찔했다.
잠시 오남규를 바라보던 박건우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망나니라지만, 명성그룹 내에서만큼은 여러 계열사를 발아래에 둔 사장이다.
특히나 오남규는 명성의 주력 중 하나인 외식 사업 전체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알려진 것보다 실제 그 영향력이 훨씬 더 어마어마했다.
성격을 떠나, 외식업계에서 오남규가 가진 실력과 사업 수완은 누구보다 엄격한 오춘화 회장마저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이 버러지 같은 새끼, 내 말이 우습다, 이거냐?”
이윽고 오남규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박건우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박건우의 코앞까지 다가간 오남규가 박건우의 멱살을 그대로 틀어쥐려는 순간.
“그만.”
나지막이 들려오는 오춘화 회장의 목소리에 움찔 몸을 떤 오남규가 홱 하고 몸을 돌렸다.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
“……!”
이어지는 오남규의 반항 어린 목소리에, 자리에 앉아 있던 대부분의 식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남규가 막 나가는 성격이라지만, 오춘화 회장 앞에서만큼은 예외다.
공식 석상에서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해 가며, 저렇게 반항 어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결단코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뭐가 말이냐?”
당장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 여긴 식구들의 생각과 달리, 의외로 오춘화 회장이 담담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이곳은 수십 년 동안 명성의 핏줄들에게만 허락된, 명성의 역사와 비밀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특별한 곳입니다. 단 한 번도, 외부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심지어 저 높은 곳에 있는 대통령조차도!”
“…….”
다시 눈앞에 있는 박건우를 향해 시선을 돌린 오남규가 말을 잇는다.
“한낱 구두닦이나 하던, 비천한 종놈의 자식이 올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 설마, 잊으셨습니까? 그게 아니면…….”
잠시 말끝을 흐리던 오남규가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목구멍까지 ‘노망’이라는 단어가 치솟아 올랐지만, 끝내 그 말만큼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회사 내 자신의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발언권의 수위와 한계는 딱 여기까지다.
이미 위험 수준을 넘나들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 정도까지는 오춘화 회장도 허용해 주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오남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위로 형이 둘, 누이가 하나.
막내나 다름없는 위치에서 오남규가 이만큼이나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실력에 버금가는 눈치 또한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니까.
잠시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던 오춘화 회장이 이내 입을 열었다.
“너도 잊었나 보구나.”
“……?”
“이곳에 출입할 수 있는 건 오직 명성의 핏줄뿐이다. 그 규칙을, 누가 만들었지?”
“……!”
또 한 번 움찔 몸을 떠는 오남규를 보며, 오춘화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바로 명성이다. 명성이 없으면 나도 없고, 내가 없으면 명성 또한 없다. 그 사실을, 너야말로 잊었느냐?”
“그, 그게…….”
묘한 분위기 속에, 위기감을 느꼈을까?
다시 오춘화 회장을 향해 재빨리 몸을 돌린 오남규가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그동안 회사를 위해 니가 해 왔던 노력을 생각하여, 이쯤 하겠지만…….”
오춘화 고개를 들어, 정면에서 오남규의 두 눈을 바라본다.
마치 불길이 일렁이는 듯한 그 눈빛에, 오남규가 조심스레 시선을 피했다.
“내가 하는 행동에도, 내가 내뱉는 말 한 마디에도, 다시는 의문을 품지 마라. 만약, 또 한 번 이따위 우습지도 않은 행동을 한다면…….”
오춘화 회장이 말끝을 흐리자, 오남규가 마른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더 이상 명성에서 니 놈의 자리는 없을 것이다.”
“……!”
이어지는 오춘화 회장의 말에 나머지 식구들도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오춘화 회장이 한 말.
속에 담긴 그 의미를 생각하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말이다.
외부인을 처음으로 들인 이곳에서 방금 오춘화 회장이 한 발언은, 이제는 핏줄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이 자리에 앉은 명성의 식구들 또한 언제든지 내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회사에 치명적인 피해를 가져온 오길태와 오성춘 부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못지않게 사고를 쳐 왔던 오남규와 그 외 명성의 식구들.
지방 좌천이나 강제 해외 유학, 독방 신세까지 내부적인 징계 수준의 벌이야 많이 있어 왔지만, 오춘화 회장이 저렇게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내친다는 소리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만큼 회사 사정이 힘들어졌다는 뜻이리라.
“…죄송합니다.”
이를 꽈악 깨문 오남규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힘없이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털썩.
오남규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오춘화 회장이, 가만히 서 있는 오성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브리핑, 시작해.”
“예, 회장님.”
한차례 깊게 허리를 숙인 박건우가 이윽고 손에 쥔 종이 뭉치들을 조심스럽게 배부하기 시작한다.
종이 뭉치 가장 앞면에는 ‘명성그룹 기업 활성화 계획’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첫 번째 장을 넘긴 오창원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 이건…….”
“……!”
오창원을 따라 첫 번째 페이지를 넘긴 다른 식구들도,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이 순간 감정은 모두 똑같았다.
경악.
10페이지 정도 되는 작은 종이 뭉치 안에는, 정치와 회사 경영 외 각종 분야에 있어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
그 세부적인 사항들의 요점들이 자세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방향이라는 것이 범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위험한 내용들이었다.
특히나 가장 앞쪽, 정치권에 흩뿌려 놓은 명성의 흔적을 지우고, 지원 자금을 최대한 회수할 방안.
고작 한 페이지 정도 분량의 내용을 빠르게 훑은 오창원이, 떨리는 눈길로 박건우를 바라본다.
“…이 계획. 분명 건우, 니 계획이겠지?”
“예, 사장님. 회장님이 허락하신 계획이기도 합니다.”
오창원의 말에 박건우가 곧바로 대답했다.
차마 오춘화 회장에게는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오창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진심이냐?”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
눈을 크게 뜨는 오창원을 보며, 한차례 쓰게 웃은 박건우가 말한다.
“누군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지요. 분명 안정과 이익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자의 마인드로는 지양(止揚)해야 할 자세지만…….”
잠시 말끝을 흐리던 박건우가 자신을 바라보는 오창원의 두 눈을 마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그 경영자가 궁지에 몰린 상태라면, 도박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옛날, 명성을 한참 키워 나갈 당시의 회장님처럼…….”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던 오창원이 힐끗 오춘화 회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무런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지극히 무심한 얼굴.
지금의 명성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인 오춘화 회장이 어떤 일을 해 왔는지.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온 오창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내용들은…….”
박건우의 말에도 오창원의 걱정은 여전했다.
명성을 위해 아버지가 해 왔던 일들.
굳이 박건우가 얘기하지 않아도, 아니, 박건우보다도 아마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라 자신한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 또한 모조리 알고 있는 것이 자신이었으니까.
“레드 콤플렉스.”
“……!”
잠자코 있던 박건우가 입을 열자, 오창원이 또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오창원을 보며, 박건우가 조용히 말을 잇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그 감정을 건드릴 생각입니다. 비단 대통령 한 사람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당 전체를 대상으로.”
이윽고 대서재 내부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도윤이 호식의 사무실 내에 들어서자, 두 사람이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펜을 끄적이고 있었다.
자신이 사무실에 들어온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서로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손을 놀리는 모습에 옅게 미소 지은 도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지척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발딱 고개를 쳐들었다.
“기사 정리는 끝났어?”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싱긋 미소 지은 도윤이 물었다.
“말도 마라. 나는 기사 하나 쓰는 게 이렇게 힘든 건지 상상도 못 했다. 여기 넘버 원 톱기자, 배 기자님도 학을 뗀다, 학을.”
“아니, 기사 쓰는 건 문제가 아닌데…….”
호식의 말을 배영준 기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받았다.
“요즘 데스크 통과가 쉽지 않아서, 최대한 덜 거슬리는 방향으로 쓰려니까 골치네요. 현 상황에서 워낙 민감한 문제이기도 해서…….”
“배 기자님 영향력이면 어지간한 기사야 다 통과겠지만, 확실히 지금 상황은…….”
호식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성그룹 사건을 폭로하면서, 일약 언론계의 스타로 발돋움한 배영준이라지만, 현 상황에서 자칫 기사를 잘못 냈다가는, 시선 돌리기라며 국민들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
하지만, 여전히 배영준 기자를 바라보는 도윤의 두 눈에는 의문이 서려 있었다.
마치 ‘당신이 언제 그런 걸 신경 썼냐고, 앞뒤 안 가리고 들이박고 보는 성격 아니었냐고.’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듯한 도윤의 그 시선을 느낀 배영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이전 같았으면 제가 독박 쓰고 몇 달 쉴 거 생각하면 되는데, 집안 사정이 조금… 바뀌어서…….”
“응?”
쑥스러운 듯 중얼거리는 배영준의 모습에, 이번에는 호식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 아내가…….”
“아내가, 뭐요? 형수님 어디 아프세요?”
말을 잇지 못하는 배영준을 보며, 성격 급한 호식이 재차 물었다.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배영준이, 이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임신을…….”
“오!”
호식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도윤도 이 부분에서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축하드립니다! 그 나이에 두 자녀 아버지라니, 부럽습니다. 정말로요! 애기 분유값도 많이 올랐는데, 이 시기에 남자가 직장을 쉬면 큰일 나죠. 암요. 이해합니다!”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 축하 인사를 건네는 호식을 보며, 배영준이 또 한 번 머리를 긁적인다.
“저, 두 자녀가 아니라…….”
“……?”
“네 자녀 아버지가 될 것 같습니다. 세쌍둥이거든요.”
“…맙소사.”
호식이 입을 쩌억 하고 벌렸다.
도윤도 눈을 더더욱 크게 떴다.
회귀 전에는 분명히 없었던 경사였기 때문이다.
본인이 경사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멍하니 배영준을 바라보던 호식이 그 두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형님.”
“…네?”
갑작스러운 호식의 호칭에 배영준이 당황하여 대답하자, 호식이 의욕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지은 채 말을 잇는다.
“비법 전수 좀 부탁드립니다.”
“…….”
입을 다문 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배영준을 보며, 호식이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한다.
“꼭요.”
“…….”
사무실 내부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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