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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104화 (104/174)

104화 색깔론

회의실 내부.

원탁으로 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약 10여 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것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의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

첫 번째는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을 제외하고 하나같이 옷깃에 번쩍이는 금배지를 달고 있다는 것.

작은 글씨로 ‘국회’라는 단어가 음각(陰刻)된 금배지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내에서 거의 없었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에서 현직 국회의원들의 신분증이자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금배지.

모두가 예상대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현 야당에 소속된 국회의원들이었다.

그것도, 야당 내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강한 인물들.

흔히 실세라 불리는 인물들만 모여 있었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다시 한 번 얘기해 보게.”

이곳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 영향력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차기 야당을 이끌어 갈 실세이자 김재욱의 아버지, 김문성이 한쪽 귀를 후비며 말했다.

“…….”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유일하게 금배지를 착용하고 있지 않은 남자.

명성그룹의 부사장인 박건우였다.

“레드 콤플렉스를…….”

“허, 허허허허허허.”

박건우가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김문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레드 콤플렉스? 설마 내가 아는 그 ‘색깔론’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지?”

“…….”

침묵은 긍정의 또 다른 표시라고 했던가?

박건우의 침묵이 길어지자, 김문성의 눈초리가 점점 사납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이봐, 박 부사장.”

“…예, 의원님.”

“여기 계신 의원님들의 시간. 일 분, 아니 일 초로 나눠서,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 것 같나?”

“…….”

“장사치이니만큼, 돈 계산은 확실히 할 것이라 믿네.”

김문성의 말에 박건우가 움찔 몸을 떨었다.

장사치.

정치인들이 기업인들을 낮잡아 부를 때 쓰는 표현이다.

물론, 아무리 정치인들이라지만 이렇게 기업인을 앞에 두고 대놓고 ‘장사치’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富)는 곧 권력이다.

번쩍번쩍한 금배지를 달고 있는 국회의원들조차, 돈이 없으면 내부적으로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누군가 나서서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그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뼈에 사무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단순 의원 출마 비용만 수천만 원.

각종 선거 비용까지 포함하면, 억대는 가볍게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이 나라의 선거였으니까.

정치 후원금 명목으로, 누구보다 돈을 필요로 하는 정치인들의 든든한 자금줄이 되어 주는 기업인들.

그중에서도, 가장 굵고 튼튼한 자금줄 중 하나인, ‘명성’이라는 줄을 손에 틀어쥐고 있는 박건우에게 면전에서 ‘장사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무리 이 나라 정치권에서 그 영향력이 드높은 김문성이라지만, 지금 한 말은 분명히 과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아무런 제지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몇몇 인물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김문성의 입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모두가 김문성과 같은 마음이리라.

한차례 쓰게 웃은 박건우가 이내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의원님들의 시간을, 어찌 돈 따위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박건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김문성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분히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박건우의 말이 그리 기분 나쁘진 않았는지, 김문성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자네 말대로, 여기 있는 모두가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한 분들이네. 나랏일이라는 게 좀 골치 아픈 일이던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원님들의 귀한 시간을, 자네 하나가 함부로 허비하고 있네. 지금 이 상황이 기업인들을 기준으로, 벌어 놓은 돈을 바다에 뿌려 대는 것과 뭐가 다른가?”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박건우를 보며, 김문성이 말을 잇는다.

“색깔론. 색깔론이라고? 허헛, 허허허허. 어이가 없군. 비장의 무기랍시고 준비해 왔다는 것이, 고작 색깔론이라…….”

“그 분야에서만큼은, 여기 계신 분들만큼 전문가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뭐라?”

박건우의 말 속에 있는 가시를 느낀 김문성이 눈썹을 꿈틀했다.

“저런 건방진…….”

“괜히 시간만 버렸네요.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꼬장꼬장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입을 여는 순간, 유일한 여성 국회의원이 불쾌한 듯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진정하시죠, 성 의원님.”

“하… 제가 지금 저따위 말이나 듣고 앉아 있어야 하나요? 뭐요? 색깔론 전문가?”

김문성이 재차 앉으라는 듯 손짓하자, 성 의원이라 불린 여자 국회의원이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자네는, 방금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네. 혹여나 세가 기울어 가는 명성을 믿고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이라면…….”

“어디까지나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입장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래도 저, 저……!”

예의 꼬장꼬장한 인상의 중년사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박건우를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닙니까? 남북이 분단한 이래로 좌파, 공산당, 빨갱이라는 단어만큼 국민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게 또 있습니까? 선거철, 후보자들 개개인의 비리보다 수 배, 아니 수십 배는 더 자주 등장하는 것이 색깔론 아니었습니까?”

“…….”

“그 어떤 방법보다 빠르고 확실한 효과. 상대 후보자 낙선의 보증수표와도 같은 그 단어를, 제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꺼내는 것이 그리도 불편하십니까?”

“이런 미친……!”

이윽고 좌중에 앉아 있던 의원 중 한 사람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른 의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나같이 분노라는 감정이 얼굴 위를 가득 뒤덮고 있었다.

만약 박건우가 하고 있는 말이 아예 얼토당토않는 얘기였다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이토록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하면 고도의 전략(戰略)이고, 기지(機智)이지만 남이 하면 간계(奸計)이고 모략(謀略)이다.

특히나, 정치판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제3자에게 치부나 다름없는 얘기를 듣고 있으니, 불편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으리라.

“저는 지금 이 나라, 정치판에서만 국한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무어라 입을 열려던 김문성이 멈칫한다.

“…뭐라?”

“사법부와 외교부는 물론이고, 정치적 입김이 강한 각 기관장들 중, 호남지역 출신들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이어지는 박건우의 말에 김문성이 입을 다물었다.

“공직자들의 세계만 그럴 거라 생각하십니까? 재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이름 있는 대기업에서는, 회사 임원직을 뽑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이 바로 이 출신 성분입니다. 말 그대로, 사전에 호남 출신 대상자들을 승진 후보자 명단에서 빼 버리는 거죠. 마치 공직 사회처럼요.”

“…….”

“색깔론. 무슨 거창한 음모론처럼 들리지만, 그저 관행적으로 행해지는 지연이라는 놈의 연장선상일 뿐입니다. 분단이라는 세계 유일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는 전략이기도 하고요.”

“…….”

“아직도 색깔론이라는 단어가 불편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자리에 모인 의원님들께 묻겠습니다. 왜 투표함만 개봉하면, 호남과 영남의 표가 극명할 정도로 양방향으로 갈리는 겁니까? 호남은 민주당이니, 영남은 무슨 당이니, 그따위 말들이 국민들 사이에서 왜 돌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김문성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박건우가 말을 잇는다.

“아직도 제가 의원님들 불편하시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아니면, 말도 되지 않는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대통령 탄핵이 부결된 지금 상황에서, 다른 뾰족한 대책이라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만약 있으시다면, 저는 이 즈음해서 물러나겠습니다.”

“…….”

박건우의 말에 김문성이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 자리에 모인 의원들 모두도 알고 있었다.

색깔론이니, 빨갱이니 하는 단어들이 주는 불쾌한 무언가.

그 무엇인가가 가슴속 깊은 곳을 불쾌하게 쿡쿡 찔러 댔기 때문에 도리어 화를 냈던 것이지, 지금까지 박건우가 한 얘기들 중 사실과 다른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단지 마치 자신들이 죄인이 된 것 같은, 그런 더러운 기분 탓에 애써 도리질 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겨우 그 정도 생각도 못 할 것 같나?”

한차례 깊은 한숨을 내쉰 김문성이 이내 입을 열어, 말을 잇는다.

“지금 상황에서 어설픈 색깔론 따위는 우리한테 독이 될 뿐이야. 우리들이 사용해 온 방법들은 이미 모조리 시도해 봤다고 생각해도 좋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김문성의 말에 박건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렇다면 더더욱. 의원님들은  연극만 해 주시면 됩니다. 준비는 이미 이쪽에서 모두 해 뒀으니까요.”

“…….”

김문성이 말없이 박건우의 두 눈을 바라보기를 잠시.

“…얘기해 보게.”

“민수성 의원. 그를 이용할 생각입니다.”

“……!”

박건우의 말에 김문성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의원들도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들과 다른, 여당에 속한 민수성.

그 이름이 정치권에서 주는 영향력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야당에 김문성이 있다면, 여당에는 민수성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야댱의 대표 격 인물이 바로 민수성 이었으니까.

“민수성 의원을 이용한다니, 그게 무슨…….”

“오래전, 민수성 의원이 저희 그룹에 맡겨 둔 통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룹 차원에서 전국에 있는 고아원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저희가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이 돈도 꼭 보태어 써 달라며 내던지듯 맡긴 통장이죠. 워낙 오래된 일이라, 아마 본인은 새까맣게 잊고 있겠지만…….”

“민수성 의원 명의의 통장을 명성에서 보관 중이라… 그 통장으로 판을 벌이겠다는 말인가?”

김문성의 물음에 박건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얘기해 주겠나?”

어느새 회의실 내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박건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박건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명계좌를 통해 이체시키는 방법으로, 민수성 의원의 통장에 최소 수십억을 넣어 놓을 생각입니다.”

“그 말은…….”

“누가 보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데, 송금된 금액이 수십억 원. 경찰은 물론이고 검찰조차 그 출처를 절대 알 수 없는 시꺼먼 돈. 그리고, 세부적인 시나리오는 전문 작가분이 입맛대로 써 내려가면 되겠죠.”

“…….”

이윽고 박건우가 말을 마치자, 몇몇 인물들은 멍하니 입을 벌렸고, 또 일부 사람들은 두 눈을 반짝였다.

하나같이 제각각인 반응을 보이고 있던 그 순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문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군.”

짧게 중얼거린 김문성의 입가에는 어느새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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